초등학교 3학년 때 전기가 들어온 시골마을에서 자랐던 나는 같은 반 도시아이처럼 하얀 피부를 뽐내던 전도사의 딸과 친해지기 위해 교통수단도 없는 길을 1시간30분씩 걸어 교회에 찾아갔다. 남편과 결혼한 26살이 되던 해까지 교회를 다니던 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시어머니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당신이 다니시는 조계사를 가자고 했다. 시어머니 말씀이니 ‘한번 따라갔다 오지 뭐’ 하는 심정으로 시작된 길이다.시어머니는 새벽 4시에 도착해 제일 좋은 자리에 촛불을 켜고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을 향해 두 팔로 큰 원을 그렸다. 남편과 자식을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 법문 중 “생각을 조복시키지 못하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는 말이 귀에 확 꽂혔다.‘내가 생각을 조복시켰나’ 하는 의문이 올라왔다. ‘그럼 내가 지금까지 체험한 것은 뭘까’ ‘어떻게 생각을 조복시키지’ 천근만근 바위덩어리가 가슴에 달린 것처럼 숨을 쉬기 힘들었다. 너무 답답해 앉아있기도, 누워있기도 힘들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 법회 마지막 날, 선생님에게 ‘똥 막대기’던 ‘뜰 앞의 잣나무’던 다 똑같은데, 도대체 생각은 어떻게 조복시켜야 하는지 여쭸다. 선생님은 그저 웃으며 “보살님, 그냥 이것뿐이에요”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필수 교양수업으로 불교를 공부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접했는데, 처음 보는 내용이었지만 깊은 공감이 몰려왔다. 특히 부처님은 내 마음속에 있다는 구절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었다. 80년대 초, 암울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 수많은 정신세계에 관한 책들이 홍수를 이뤘다. 인도철학과 노자, 장자 등에 푹 빠져 20대를 보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참나에 대한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삶의 굴레 속에 허덕이며 살았다. 그러던 중 60대 중반 친
주변은 고요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소리, 이따금씩 들리는 새 소리. 선방에는 30명 남짓한 수행자들이 좌복 위에 앉아 각자의 수행 주제로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 보호받는 느낌도 들었다. 선원에서 집중명상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평온함은 이내 무너졌다. 10년간 요양병원에서 홀로 생활하시며 외롭게 생을 마무리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에 한동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소홀했던 분이었다.
서른 살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진로와 비전, 대인관계, 직장 문제 등 또래 청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과 어려움이 찾아왔다. 대학생 때부터 꿈꾸며 해왔던 일들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고, 맺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리되던 시기였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스스로를 위축시켰고, 긍정적이고 활발했던 예전의 ‘나’를 잃어버렸다.어렸을 적 법당은 놀이터였고, 비구니스님들의 존재가 엄마이자 친언니처럼 느껴졌던 곳이다. 가장 좋아했던 곳, 가
어떻게든 1시간은 버티려고 하다 보니, 지나치게 힘을 주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혜연 스님께 ‘쉐우민 방법’으로 지도를 받고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는 걸 배웠다.혜연 스님은 ‘고엔카 10일 코스’ ‘미얀마 단기출가’를 알려주고, 순룬 사야도나 떼인구 사야도와 같은 미얀마의 아라한 스님들 이야기도 해주셨다. 스님의 소개 덕분에 고엔카 10일 코스에 몇 번 참가하다 보니, 집을 떠나 더 오랫동안 수행에만 전념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먼저 부처님 말씀인 ‘니까야’를 모두 읽고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졸업하고 1년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처음 위빠사나 명상을 배웠을 때, 아무래도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몸은 자꾸 구부러졌고 허리와 무릎은 여기저기 아팠다. 배의 부품, 꺼짐 같은 건 알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집중을 잘해서 신기한 현상들을 경험하곤 했지만, 나는 그런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명상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알았다. 이상하게 ‘이것은 진실’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후 미얀마에 가서 짧게나마 출가생활도 경험하고 15년째 명상을 이어오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어렸을 때부터 친구를 사귀거나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어려웠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까지 강화되자 이참에 제대로 수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수소문하다 연락이 닿은 한 선원에서 곧 1년에 몇 번밖에 없는 선회(禪會)를 여는 것을 알게 됐다. 참석해 5박6일간 열심히 정진했는데, 참선 지도는 단 1분 만에 끝이 났다. 호흡 수련 등을 배울 줄 알았는데 단지 “왜 마삼근일까?”하는 의심만 놓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고 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마삼근’이라고 써 붙이고, 나중에는 손에 ‘禪’이라고 크게 문신을 새겨 넣었다. 심지어 꿈에서까지 화두를 참구했다. 그러나 몇 년을 참구해도 전혀 어떠
어린 시절, 불교를 잘 알진 못했지만 절에 열심히 다니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항상 호감을 갖고 살아왔다. 그러다 입대 후 우연히 부대의 불교 군종병에 선발되면서 매주 3번씩 절에 다니게 됐다. 원해서 된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제대하기 전에 ‘반야심경’ ‘천수경’ 등 기본적인 경전을 외울 수 있었다.제대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원래는 자동차 정비를 전공했는데, 일본에서 갑자기 외국어에 흥미를 느꼈고 불경을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중국문학을 공부했다. 한국인이 일본에서 중국어를 전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힘든 생활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매자작시의 이하령중생 득입무상혜 속성취불신(每自作是意 以何令衆生 得入無上慧 速成就佛身)’이라, 부처님께서 하시는 불사는 오직 어떻게 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지혜에 들게 해 부처님 몸을 빨리 이룰 수 있게 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이며, ‘소작불사 미증잠폐(所作佛事 未曾暫廢)’라, 부처님께서는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의 불사를 잠시도 그만 둔 적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이하령중생 득입무상혜 속성취불신’의 ‘매자작시의’ 이외에 일체의 모든 생각은 본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니, 참으로 본래 있는 법을 그대
방편업은 민법·형법 등 세속의 법전을 읽으며 살아가는 변호사이지만, 본업은 부처님의 일대사인연이 온전히 담긴 진실법인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를 생각 생각마다 놓지 않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고 있는 염불불자다. 초등학생시절 내가 왜 이 지구라는 별에 왔는지,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은 성장할수록 깊어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능공부에 매진하다가 갑자기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싶어 무작정 휴학하겠다고 부모님께 통보한 적이 있다. 당연
단순히 한국을 멀리 떠나 인도까지 갔기 때문에 행복했던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괴롭히던 각종 잡념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수행에 매진했기에 행복했던 것이다. 모든 괴로움은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생각에 따라 변화함을 알자는 마음으로 수행했다. 매순간 들었던 부정적인 생각이 내 원래 모습이라는 착각으로 괴로움과 우울에 파묻혀 살아온 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처음에는 선은 어렵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라 생각해 지레 겁먹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정 반대였다. 가야산선원장 효담 스님은 법문마다 “선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