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무척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어머니가 홀로 3남매를 키우며 생계를 꾸렸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불안정했다. 이 때문인지 바깥세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무엇이든 혼자서 해결하는 습관이 들었다.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학창시절엔 열심히 공부했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겉으로는 온순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내면은 언제나 우울함과 허전함, 알 수 없는 그리움과 답답함으로 먹먹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종교에 관심을 갖고 정신 서적을 제법 탐독했지만 답답함을 쓸어낼 수 있는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이따금 찾아낸 시원한
명상과 ‘법화경’ 독송을 꾸준히 하면서 ‘알아차리는 마음’이 내가 의지할만한 안식처이고 안전지대이며 모든 생명들을 살릴 수 있는 보물임을 알게 됐다. 알아차리는 마음 이외에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었다.‘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기에 모든 형상, 생각, 감정, 느낌들이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기분이 좋거나 화나거나 항상 오염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늘 깨어있었다. 나이와 성별, 국적, 이념, 종교 등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동물들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음을
“너는 누구니. 너는 우리 편이 아니잖아.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네가 누구인지 어디 가서 말하면 다칠거야. 여기에 끼지 말고 저쪽으로 가. ”살아오는 동안 삶을 사로잡은 건 세상이 떠들고 있는 화려함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었다. 세상이 나에게 던진 비난·오해·미움·분노·몰이해와 무관심·냉소적인 반응들은 내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평생 풀어야 할 화두를 안겼다.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보호와 도움을 준 감사한 분들도 많았지만, 괴로울 때마다 화두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국적, 종교, 이념 등 그들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아들 둘을 군대에 보낸 엄마의 마음이었다. 자식 같은 용사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간식 하나라도 더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개인전화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가족과 여자친구에게 통화를 하게 해주고 종교활동 사진을 찍어 부모님께 보내줬다. 아들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도록 포교사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인사를 드렸고, 부모님들은 반가워하며 감사하다는 답장을 주셨다. 전역한 군종병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끓는 피가 한창인 청춘의 용사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군대라는 제약이 가득한 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
초등학교 3학년 때 전기가 들어온 시골마을에서 자랐던 나는 같은 반 도시아이처럼 하얀 피부를 뽐내던 전도사의 딸과 친해지기 위해 교통수단도 없는 길을 1시간30분씩 걸어 교회에 찾아갔다. 남편과 결혼한 26살이 되던 해까지 교회를 다니던 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시어머니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당신이 다니시는 조계사를 가자고 했다. 시어머니 말씀이니 ‘한번 따라갔다 오지 뭐’ 하는 심정으로 시작된 길이다.시어머니는 새벽 4시에 도착해 제일 좋은 자리에 촛불을 켜고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을 향해 두 팔로 큰 원을 그렸다. 남편과 자식을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 법문 중 “생각을 조복시키지 못하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는 말이 귀에 확 꽂혔다.‘내가 생각을 조복시켰나’ 하는 의문이 올라왔다. ‘그럼 내가 지금까지 체험한 것은 뭘까’ ‘어떻게 생각을 조복시키지’ 천근만근 바위덩어리가 가슴에 달린 것처럼 숨을 쉬기 힘들었다. 너무 답답해 앉아있기도, 누워있기도 힘들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 법회 마지막 날, 선생님에게 ‘똥 막대기’던 ‘뜰 앞의 잣나무’던 다 똑같은데, 도대체 생각은 어떻게 조복시켜야 하는지 여쭸다. 선생님은 그저 웃으며 “보살님, 그냥 이것뿐이에요”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필수 교양수업으로 불교를 공부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접했는데, 처음 보는 내용이었지만 깊은 공감이 몰려왔다. 특히 부처님은 내 마음속에 있다는 구절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었다. 80년대 초, 암울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 수많은 정신세계에 관한 책들이 홍수를 이뤘다. 인도철학과 노자, 장자 등에 푹 빠져 20대를 보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참나에 대한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삶의 굴레 속에 허덕이며 살았다. 그러던 중 60대 중반 친
주변은 고요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소리, 이따금씩 들리는 새 소리. 선방에는 30명 남짓한 수행자들이 좌복 위에 앉아 각자의 수행 주제로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 보호받는 느낌도 들었다. 선원에서 집중명상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평온함은 이내 무너졌다. 10년간 요양병원에서 홀로 생활하시며 외롭게 생을 마무리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에 한동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소홀했던 분이었다.
서른 살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진로와 비전, 대인관계, 직장 문제 등 또래 청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과 어려움이 찾아왔다. 대학생 때부터 꿈꾸며 해왔던 일들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고, 맺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리되던 시기였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스스로를 위축시켰고, 긍정적이고 활발했던 예전의 ‘나’를 잃어버렸다.어렸을 적 법당은 놀이터였고, 비구니스님들의 존재가 엄마이자 친언니처럼 느껴졌던 곳이다. 가장 좋아했던 곳, 가
어떻게든 1시간은 버티려고 하다 보니, 지나치게 힘을 주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혜연 스님께 ‘쉐우민 방법’으로 지도를 받고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는 걸 배웠다.혜연 스님은 ‘고엔카 10일 코스’ ‘미얀마 단기출가’를 알려주고, 순룬 사야도나 떼인구 사야도와 같은 미얀마의 아라한 스님들 이야기도 해주셨다. 스님의 소개 덕분에 고엔카 10일 코스에 몇 번 참가하다 보니, 집을 떠나 더 오랫동안 수행에만 전념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먼저 부처님 말씀인 ‘니까야’를 모두 읽고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졸업하고 1년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처음 위빠사나 명상을 배웠을 때, 아무래도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몸은 자꾸 구부러졌고 허리와 무릎은 여기저기 아팠다. 배의 부품, 꺼짐 같은 건 알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집중을 잘해서 신기한 현상들을 경험하곤 했지만, 나는 그런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명상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알았다. 이상하게 ‘이것은 진실’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후 미얀마에 가서 짧게나마 출가생활도 경험하고 15년째 명상을 이어오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어렸을 때부터 친구를 사귀거나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어려웠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까지 강화되자 이참에 제대로 수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수소문하다 연락이 닿은 한 선원에서 곧 1년에 몇 번밖에 없는 선회(禪會)를 여는 것을 알게 됐다. 참석해 5박6일간 열심히 정진했는데, 참선 지도는 단 1분 만에 끝이 났다. 호흡 수련 등을 배울 줄 알았는데 단지 “왜 마삼근일까?”하는 의심만 놓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고 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마삼근’이라고 써 붙이고, 나중에는 손에 ‘禪’이라고 크게 문신을 새겨 넣었다. 심지어 꿈에서까지 화두를 참구했다. 그러나 몇 년을 참구해도 전혀 어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