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불자들 중에는 “기도하는데 무슨 효과를 바라고 하는가?”라든가, “나는 그저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려고 염불할 뿐인데…”, “한 생각 잘 지키면 부처님인데 아직도 뭘 그리 바라는 게 많은가?”라는 이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린 목적이 있어서 기도를 하고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작게는 세속에서의 정당한 행복을 이루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고, 내 마음을 스스로 맑게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내가 바로 부처가 되려는 것입니다. 불자가 마음에 지니는 이런 목적을 서원(誓願)이라고 달리 표현해봅시다. 마음의 번뇌를 씻고 무명을 제거하여 밝고 진실한 경지와 하나되는 일이 내 개인적인 서원이라면, 밖으로 눈을 돌려 이 모든 생명체가 나와 똑같은 경지를 얻기 원하는 것이 또 하
“물 좀 주십시오.” 아난 존자는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여인은 슬쩍 아난 존자를 훔쳐본 뒤에 답하였습니다. “저는 천하디 천한 계급입니다. 저와 같은 계급의 사람이 어찌 스님같은 분에게 물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낮은 계급의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과 마주 서서도 안되고 바라보아도 안되며 제 손으로 물건을 집어서 줄 수도 없었던 것이 엄격한 인도 계급사회의 법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속의 그런 잣대를 벗어버린 출가자요, 한없이 인자한 아난 존자가 아닙니까? “저는 물이 먹고 싶습니다. 물을 주십시오.”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아난 존자는 거듭 물을 청하였고 그런 태도에 여인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물을 떠서 존자의 발과 손을 적셔 드리고 마실 물을 올렸습니다.
아무리 옷을 잘 차려입었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추하게 보이십니까? 편안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 이성을 잃어 선과 악이 뒤바뀌어 보이며 끝내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일을 저질렀습니까? 어렵게 모은 재산을 잃고 송사에 말려들었습니까? 끝없는 노력으로 얻은 명성을 잃었습니까? 친구와 일가 친척들이 당신을 피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에게 이런 징후가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 분노의 검은 회오리에 휘감겼음을 의미합니다.(『중아함 원가경』)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는 병, 바로 화병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 즉 분노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무거운 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한국 사람의 화가 공식적인 병명으로 기록에 올랐다
여하튼 우리는 버럭 화를 내고 봅니다. 화를 내는 동안 내 마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과 악의만이 가득 차 오릅니다.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켰고 내 것을 빼앗았다고 하여 증오를 품고 있으면 증오는 없어지지 않는다.”(『법구경』) 그러한 증오와 적대감은 나의 입을 지배하여 못하는 말이 없게 만들고, 나의 눈을 지배하여 부모와 자식들도 보이지 않게 하여 급기야 그들의 목숨까지도 빼앗게 만듭니다. 분노가 무서운 이유는 이렇게 다른 이를 향해 독한 마음을 품게 만든다는 데에 있습니다.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경전 곳곳에서 일러주십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자심관(慈心觀)으로 다스려야 한다.”(『정법념처경』) “자비로운 마음을
어떤 사람이 어둑어둑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튼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뱀이다!” 그는 기겁을 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그 길을 지나가던 그는 자신을 그토록 놀라게 했던 것이 뱀이 아니라 밧줄이었음을 알고서 실소를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밧줄을 밧줄인 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뱀이라 착각하였던 데에 기인합니다. 한번 일으킨 착각은 계속 반복하여 일어나 중생들은 영원히 밧줄인 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섯 갈래를 맴돌게 됩니다. 어쩌다 “아, 저건 뱀이 아니라 밧줄이었구나!”라고 눈치를 채는 일도 있겠지만 이내 뱀이라 보아왔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착각하며 지내왔
업인과보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금 살림살이를 풀어놓고서 일희일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세계[世間]의 원리를 설명한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나고 죽는 세상을 벗어난 진리의 세계도 있습니다. 출세간(出世間)이라 부르는 것인데 출세간의 이치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야말로 진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세간의 이치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나’라는 것을 분석해 들어가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고요한 숲 속에서 선정에 들어계시는 부처님 곁으로 젊은이 한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성자시여, 혹시 이리로 젊은 여자 한 명이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남녀가 짝을 이루어 놀러 나왔다가 그 중에 한 여자가 일행들 몰래 그들의 귀중품을 챙겨 달아났던 것입니다. 뒤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 동네 상가에서 만난 한 보살님의 말이 자꾸 떠올라서요. 이 분은 신심 하나는 참 대단한 불자입니다. 이전부터 정신세계와 기 수련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고 그에 따른 수행도 열심히 한 데다 불자가 되고 나서는 큰스님 설법하는 날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그리고 관음재일 같은 날에는 아예 가게문을 닫아걸고 절에 가는 열성신자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108배에는 아주 서툽니다. 몸도 약하니 더 그럴 터이지요. 평소 이 보살님은 “난 절 못하겠더라. 108배도 겨우 하는데 3000배 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이라고 말하거나 심지어는 “습이 배어 있지 않아서 절은 못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보살님의 딸이 올해 수능시험을 보았습니다. 어쩌겠습니까
행복은 마음 속에 존재한다꿈꾸는 듯한 표정의 예쁜 여자가 허름한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저… 여기 혹시 좋은 소식만 나오는 텔레비전 없나요?” 부자 되시라는 멘트로 한 때 우리나라를 부자열풍에 휩싸이게 만든 카드회사의 광고이지요. 저는 이 광고를 볼 때마다 정말 그런 텔레비전이 있으면 아무리 비싸도 한 대 꼭 들여놓겠다고 다짐합니다. 좋은 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니까요. 사람은 행복해지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불행하다는 뜻이고, 불행하다는 것은 괴롭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을 좋아하는 이는 온 우주를 다 뒤져보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을 피하고 행복(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은 목숨 있는 자의 본능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은 자기 옷은 스스로 꿰매서 입어야 했습니다. 제자 가운데 앞을 못 보는 아나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늘귀에 실을 꿸 수가 없었습니다. 아나율은 무심히 ‘이 세상에서 도를 얻은 아라한은 나를 위해 바늘을 꿰어다오’라며 생각하였는데 마침 부처님께서 그의 생각을 알아채셨던가 봅니다. “바늘을 이리 다오. 내가 꿰어주리라.”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자 아나율은 당황하였습니다. “저는 부처님께 청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복을 구하려는 사람에게 청한 것입니다.” 송구하여 바늘을 내밀지 못하는 아나율을 향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증일아함』 『역품』) 이 일화를 보면 부처님도 복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
시청의 성공회 대성당 안에는 4년 이상 된 이주노동자 60여명과 그들과 함께하는 한국인들이 ‘4년 이상 된 외국인의 전원 합법화’를 외치며, 벌써 20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11월 15일에 시작된 이번 농성엔 성공회 대성당 외에 한국기독교연합(NCC), 기독교백주년 기념관,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에서 총40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하고도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목사-신부 지지 방문 잇달아 성공대 대성당 안에는 성공회와 원불교 봉공회, 기독교 장로회와 정토회에서 마련한 따뜻한 점심 공양이 제공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지지 방문을 해 주고 있다. 목사님, 신부님, 일반 시민들까지 이 곳을 방문해 기도해 주고, 우리들과의 연대를 약속해 주고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네티즌 불자들의 대부분은 매월 1곳 이상 교계단체나 복지시설에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법보닷컴’이 지난 11월 29일부터 12월 4일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당신이 매달 후원하고 있는 교계단체나 복지시설은 몇 군데나 됩니까’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95명 가운데 전체 58.9%(56명)가 ‘한 곳’이라고 답변했다. 또 ‘두세 곳’이라고 답변한 응답자는 21.1%(20명)로 나타났으며, ‘네 곳 이상’이라는 답변은 5,3%(5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10명 중 8명은 적어도 한 곳 이상의 교계복지시설과 1대1 결연 후원을 맺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없다’라는 답변은 14.7%(1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형섭 기자 hsk@beopbo.com
저는 산청 대원사에 8년째 다니고 있는 불자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가족들의 후원 하에 대구 영남불교대학에서 불교공부를 배우고 있습니다. 집이 함양이라 영남불교대학을 갈 때면 버스, 지하철을 타게 되는 데 그 때마다 많은 보살님과 거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그 분들은 “왜 가족들은 나를 따라 절에 오지 않을까”하는 넋두리를 자주 합니다. 그럼 저는 그 분들께 제 얘기를 자주 하곤 합니다. 제 남편은 불교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절에 다니면서 저를 절에 데려다 주기 위해 함께 절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5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제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부처님께 귀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