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대 진덕여왕대(647〜654)는 선덕여왕 말년 일어난 비담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혈투를 계속하였고, 친당정책의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는 당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 정치와 문화의 개혁을 추진하여 다음에 등장하는 강력한 중대왕권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진덕여왕대 김춘추가 주도한 정치와 문화의 개혁내용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것은 중앙 행정관서의 정비와 새로운 운영원리의 모색이었는데, 이것은 왕권강화의 차원을 넘어
26대 진평왕대(579~632)는 대내적으로는 노리부(弩里夫)와 수을부(首乙夫)가 연이어 상대등으로 취임해 왕을 보좌함으로써 왕권과 귀족세력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가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혈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백제는 성왕의 피살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 국력을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분쟁은 있었지만, 격렬한 전투는 없었다. 이로 인해 비교적 정치적 안정을 이루게 된 신라는 대내적으로 지배체제 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대외적으로 불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문화 수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신라는 22대 지증왕대(500~514)부터 본격적으로 고대국가로의 발전을 추구하였다. 21대 소지마립간의 6촌재종아우로 정변을 통해 64세의 늦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증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정치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그는 즉위 4년(503) 10월에 국호를 ‘신라(新羅)’, 왕호를 ‘왕(王)'으로 확정하고 자신 외에는 왕을 칭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지배체제를 안정시켰다. 그보다 한 달 앞서 세워진 ‘영일 냉수리비’는 7명의 6부 대표들이 모여 재산분쟁 문제를 함께 의논해 결정하고
신라 ‘중고’ 시기 왕실은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의 계통과 용수(용춘)-김춘추의 계통으로 구분하여 전자는 성골, 후자는 진골로서 신분상의 차등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혈통의 면에서 진평왕과 용수는 함께 진흥왕의 손자로서 4촌 종형제 사이였다. 또한 진평왕이 용수를 사위로 받아들이는 근친혼으로 친・인척의 중복된 관계가 이루어짐으로써 김춘추는 부계로 진평왕의 5촌 당질이며, 모계로 외손자가 되었다. 그리고 선덕여왕과는 부계로 6촌 남매 사이였으며, 동시에 모계로는 3촌 이질의 사이가 되었다. 결국 두 계통은 내외간의 혈
24대 진흥왕(540~576)이 세상을 떠난 뒤 ‘중고(中古)’ 왕통은 큰 아들 동륜 계통과 둘째 아들 사륜 계통으로 나뉘었다. 동륜 계통은 동륜(태자)-백정(진평왕)-덕만(선덕여왕)・승만(진덕여왕)으로 계승되었고, 사륜 계통은 사륜(진지왕)-용수(문흥갈문왕)-춘추(태종무열왕)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왕통의 분열은 단순한 왕실 계보의 분화로 그치는 문제는 아니었다. 역사학계에서는 동륜 계통의 ‘중고’ 왕실은 성골, 사륜 계통의 ‘중대’ 왕실은 진골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승만(진덕여왕)에서 춘추(태종무열왕)에로의 왕위교체를 성골에서 진
신라 ‘중고(中古)’ 시기는 23대 법흥왕대부터 28대 진덕여왕대까지 5세대 6인의 국왕이 재위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 ‘중고’ 시기를 새로 연 인물은 법흥왕의 아버지인 22대 지증왕이었다. 지증왕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즉위년조에, “성은 김씨,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혹은 지도로(智度路), 또는 지철로(智哲老)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왕력조와 지철로왕조에는 지증왕의 이름을 지철로・지도로・지대로, ‘영일 냉수리비’에서는 지도로(至都盧)로 표기되는 등 약간의 글자 차이를 보여줄 뿐이고, 동일인물이다. 지증왕의
지금까지 46회에 걸쳐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라는 주제로 신라 ‘중고(中古)’ 시기 불교의 수용과정과 사회적 역할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았다. 이제 내용을 종합하면서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불교가 담당했던 역할, 특히 왕권의 신성화와 정통성 확립에 기여했던 불교의 역할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신라는 3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선진국이던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해 3국통일을 달성하였고, 이어 3국의 문화를 종합하여 고대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리고 건국한지 992년 만에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나, 다음 시대를
이제 원광의 세속오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순서가 되었다. 세속오계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유교나 불교, 또는 유・불・도 3교의 조화에서 구하는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사상적 배경을 지적하기에 앞서 고려할 점은 원광의 가르침을 내린 대상자가 남의 신하와 자식 된 사람이라는 점이다.원광은 가르침을 내리면서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 조목이 열 가지가 있으나, 그대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 된 몸이니,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세속의 가르침으로 오계가 있다”고 하면서 다섯 가지
원광은 26대 진평왕 22년(600) 귀국하여 동왕 52년(630) 입적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경전 강론과 호국법회 주관, 정치 자문과 외교문서 작성 등 세속과 출세간을 넘나드는 활약을 하였는데, 다양한 업적 가운데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라는 윤리덕목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덕목의 제시는 당시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하게 평가된 사건이었다. ‘삼국사기’권45 귀산전에서 원광의 세속오계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해 주었으며, ‘삼국유사’ 원광서학조에서도
원광이 귀국한 진평왕 22년(600) 즈음 고구려・백제・신라 관계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백제는 30대 무왕(600~641)이 즉위하면서 46년 전 성왕이 피살된 후유증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흥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신라에 대한 침공을 재개하여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원광에게 세속오계를 받았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전사한 것도 진평왕 24년(602)의 아막성(阿莫城)의 전투에서였다. 한편 고구려는 26대 영양왕(590~618)이 즉위하여 말갈병을 동원, 요서지역을 침공하는 한편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였
원광이 오랜 중국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것은 진평왕 22년(600)이었다. 진흥왕 36년(575) 즈음 25세의 나이로 남조의 진나라로 유학을 떠나 금릉에서 성실학을 비롯한 다양한 조류의 불교학을 섭렵하였다. 진평왕 11년(589) 진이 멸망하자, 수나라의 장안으로 옮겨 새로 유식학 계통의 섭론학을 공부하면서 수문제에 의한 불교치국정책과 남조의 교학불교와 북조의 실천불교가 종합되는 불교계 변화상황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50세 전후인 진평왕 22년에 본국의 요청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25년이 넘는 장기간의 유학생활이었다. ‘속
원광은 신라에서 일찍이 유학과 현학을 공부하고 제가서(諸家書)와 역사서(歷史書)를 섭렵하는 등 세속의 학문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25세 때 그러한 학문의 공부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문명국이라 일컬어지던 남조의 진(陳)에의 유학을 결심하였다. ‘속고승전’ 원광전에 의하면 원광은 진(陳)의 금릉(金陵)에 도착한 이후 이전에 가졌던 의문점들을 묻고 조사하면서, 요의(了義)를 탐구하였다. 그런데 원광은 남조의 발달한 불교의 교학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공부의 방향을 바꾸었다. ‘속고승전’ 원광전에서는 불교의 종지를 듣고 세간의 학문을 썩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교학승의 자료만을 따로 모아 놓은 ‘의해(義解)’편에서 원광전을 가장 먼저 싣고, ‘속고승전’과 고본 ‘수이전’의 원광전의 전문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그밖에 일연은 ‘삼국사기’의 관련 자료, 운문사 등에 전하는 고문서, ‘해동고승전’ 원광전 등의 원광에 관한 자료들까지 총망라하여 검토하고 종합해 주었다. 그 결과 원광에 관한 자료는 오늘날 신라의 승려 가운데서 비교적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광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이해는 아직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학
신라 ‘중고’시기의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자장과 함께 원광(圓光)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자장이 27대 선덕여왕대(632〜647) 불교의 상징적 인물이라면, 원광은 그보다 한 세대 앞선 26대 진평왕대(579~632)의 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13세기에 편찬된 ‘삼국유사’ 가운데 불교 교학승들을 다룬 ‘의해(義解)’편에서 ‘자장정률(慈藏定律)’과 ‘원광서학(圓光西學)’이라고 각각 제목을 부치어 자장에게는 계율을 정비한 업적을 강조한 반면, 원광에게는 중국에 유학한 선구자로서의 업적을 내세움으로써 차이
자장은 최고귀족인 진골출신으로 25세에 벼슬길에 나오라는 왕명을 거부하고 출가하였다. 선덕여왕 7년(638) 당에 유학을 떠나서 장안과 종남산을 오가며 다양한 스승을 찾아보았다. 선덕여왕 12년(643) 대내외의 국가적 위기상황에 처한 본국의 소환 명령에 따라 귀국한 그는 새로 창건된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섭대승론’을 강의하고, 뒤에는 황룡사의 사주(寺主)가 되어 ‘보살계본’을 강의하면서 계율을 정비하였다. 마침내 대국통이 되어 전국의 교단을 통솔하면서 수계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나라 안 사람으로서 그에게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신라 본국의 명령에 따라 자장이 급거 귀국한 선덕여왕 12년(643)은 내우외환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시기였다.대내적으로는 진평왕대(579〜632)의 54년이라는 오랜 통치기간을 통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어 딸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여왕(女王)’이라는 점에서 통치능력에 불신을 사게 되었다. 즉위 초기에는 종실의 대신 을제(乙祭)가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는 섭정을 담당하였고, 뒤이어 상대등 수품(水品)과 내성사신 용수(龍樹)가 국정과 궁중의 관리를 분담하였다. 그러나 여왕의 통치능력에 대한 불신은 해소되
자장은 ‘중고’기 후반에서 ‘중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극적인 반전을 거듭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4시기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편리하다. 첫째는 출가와 수행 시기, 둘째는 입당 유학 시기, 셋째는 대승통으로서의 교단 통솔 시기, 넷째는 은퇴 입적 시기 등으로 시기 구분이 가능하다. 자장은 3등 관계인 소판 무림(武林)의 아들로서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왕실과 가까운 가문의 출신이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가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한 공덕으로 자장을 얻었고, 석존의 탄일인 4월 8
자장은 선덕여왕대(632~647) 당(唐)에 유학하고 중국의 선진문화 수입에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대국통(大國統)에 취임하여 계율을 정리하고 교단을 정비하여 다음 ‘중대’기 불교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또한 왕실불교・국가불교의 상징물로서 황룡사 9층탑을 건립케 하고 신라의 불국토설(佛國土說)과 진종설(眞宗說)로 ‘중고왕실’을 신성화하는 정치이념을 수립케 하였다. 그러나 고승으로서는 비교적 단명이라고 할 수 있는 50대 전후에 지방에 쫓겨나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불운을 맞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보다 한 세대 앞을 살
지금까지 13회에 걸쳐 27대 진평왕대(579~632)부터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까지 83년 동안 용수(龍樹)‧춘추(春秋) 부자의 정치적 성장과 즉위과정을 중심으로 하여 왕권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을 추적하여 보았다. 신라의 ‘중고’기에서 ‘중대’로 전환되는 시기의 고대국가의 발전과정 문제를, 용수‧춘추 부자의 정치적 성장과정을 중심으로 하여 이해를 추구한 것은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동륜태자‧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계통을 성골(聖骨), 진지왕(사륜)‧용수‧춘추(태종무열왕) 계통을 진골(眞骨)로 신분을 구분하고, 이
28대 진덕여왕은 즉위 8년(654) 3월에 사망하고, 김춘추가 뒤를 이어 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되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대 국내정치와 대당외교의 실권을 장악했던 최고의 실력자였으나, 왕위계승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김춘추에게는 강력한 경쟁자로서 알천(閼川)이 있었는데,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上大等)의 직위에 있었다. ‘삼국유사’ 권2 진덕왕조에 의하면, 진덕여왕 때에 귀족세력을 대표하던 알천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무림공(武林公)・염장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