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애(仁愛)에 관한 철학적 해석은 보다 풍부하게 사랑을 이해하게 해준다. 신유학(성리학)의 정초를 닦은 정이천은 인 자체는 성이며(仁自是性), 애 자체는 정이다(愛自是情)고 해석했다.(‘근사록’ 도체류35). 본성의 이치를 궁구하는 성리학의 관점에서 공자 이래 유학에서 특별히 강조돼 온 인을 인간의 본성으로 본 것이다.그러면서 맹자가 측은지심을 인의 단서(‘맹자’ 공손추 상6, 고자 상6)라 했지 인 자체라 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고, 한퇴지가 박애를 인이라 한 것도 잘못이며 더구나 애는 인과 등치될 수 없다고 했다. 인에 박애나 애
서양화가 이만익(李滿益, 1938~2012)을 잘 모르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는 많이 보셨으리라 생각된다. 그 작품이 바로 이만익의 작품이다. 그는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나 1946년 가족들이 모두 월남하면서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이때부터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공부했으며, 중학생이던 1953년에는 국전에 ‘정동의 가을’과 ‘골목’을 출품하여 입선할 정도였다. 입선시켜놓고 보니 고작 중학생인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국전 출품자의 나이 제한 조항이 신설되었다고 하니 그의
‘얘야! 내 유튜브 계정 하나 만들어 봐라.’2018년 11월 말 내가 카톡으로 젊은 선지식에게 했던 말이다. 유튜브를 구독만 하다가, 운영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요구한다.나는 흔히 “절에 신도로 30년을 다니는 것보다, 행자로 3개월 사는 게 사찰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말하곤 한다. 신도분들은 ‘설마?’ 할지 모르지만, 스님들에게 얘기하면 100% 공감받는 말이다.이런 마법 같은 일이 유튜브에서도 일어난다. 처음에 생각 없이 저작권 동영상을 올렸다가, 삼진 아웃으로 계정을 정지 먹었다. 얼마 지나면 풀리겠거니 했으나
한국이 속해 있는 아시아든 유럽·아프리카 등 다른 대륙이든 가릴 것 없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가가 특정종교에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특혜는 ‘국가종교[國敎]’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지위를 얻어낸 종교가 휘둘렀던 권위와 힘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무서운 것은 근대 이전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역사를 돌아보거나 최근 일부 이슬람 국가가 신정(神政)일치 체제를 도입하면서 보여준 모습에서 생생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이웃 중국에서도 2000여년 전부터 ‘유교만을 존중한다’는 독존유술(獨尊儒術)을
부처님 말씀이 기록된 경전 중에 가장 읽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능엄경(楞嚴經)’이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경전의 어법과 논리가 난해하기 그지없다. 특히 2권과 3권의 견(見)에 관한 법문은 극도의 집중력과 논리력을 동원해야 한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능엄경’에서의 능엄(楞嚴)은 ‘최상무극(最上無極)’, ‘필경견고(畢竟堅固)’의 의미를 지닌다. 최상무극은 가장 높아서 더 이상 없다는 뜻이고, 필경견고는 끝내 굳세다는 뜻이다. ‘능엄경’ 내용들 중 수행과 관련한 부분
고행은 부처님 당시 사문들만의 수행법은 아니었습니다. 베다 전통에서 고행을 뜻하는 ‘타빠스’(tapas)란 고행에 의해 축적되는 영적인 힘을 의미했고, 기원전 700년경 초기 우파니샤드 시기에 이르러 해탈에 필요한 자기 통제와 영적인 힘을 성취하고자 고행은 반드시 필요한 수행법으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고행은 부처님 당시 인도 종교문화 전통에서 바라문과 사문 모두에게 해탈을 위한 필수 수행법의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부처님이 고행을 버렸음은 인도의 오랜 통념에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인도에서
觀音菩薩大醫王 甘露甁中法水香 관음보살대의왕 감로병중법수향灑濯魔雲生瑞氣 消除熱惱獲淸凉 쇄탁마운생서기 소제열뇌획청량(관세음보살은 큰 의왕이시라.감로병 안의 법수가 향기롭도다.마의 구름을 씻어내니 상서로운 기운이 생기고번뇌의 열기를 없애주니 청량함을 얻게 하네.) 이는 조선 경종 2년(1726) 지환 스님(智還)이 엮은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과 순조 26년(1826) 백파긍선 스님이 엮은 ‘작법귀감’ 쇄수게(灑水偈)에 실려있다. 쇄수는 정화하기 위해 쓰이는 향수를 뜻한다. 이러한 의례는 밀교에서 발전돼 도량을 청정케 하는 의식으로
수행이란 마음을 조절하여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건강한 마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능수능란하게 잘 쓸 줄 아는 자가 수행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마음을 자재롭게 쓰려면 마음의 구성과 작용 원리를 이해해야 하고, 그 작동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 사념처(四念處)다. 사념처란 신수심법의 네 가지를 관찰하는 것으로 신(身)은 몸에 대한 고찰, 수(受)는 그 몸으로 느끼는 것들을 말한다. 심(心)과 법(法)은 마음과 마음에 반영되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깊이 있게 관찰하는 것이다.신과 수는 몸 관찰이 포함되는데 몸을 명료하게 관찰해
승이 암두에게 물었다. “옛 돛을 내걸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암두가 말했다. “후원에서 나귀가 풀을 뜯어먹는다.”본 문답은 본래 여여한 불법의 이치를 아무런 조작이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응용할 줄 알아차려야 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암두(巖頭)는 암두전할(巖頭全豁, 828~887)로서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의 제자이다.옛돛[古帆]은 예로부터 전승해 오는 가르침 내지 이치 등 언설로 표현된 일체를 말한다. 여기에서 승이 질문한 옛 돛을 내걸지 않을 때란 언설 내지 개념 등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
초기경전의 대부분은 수행과 관련된 내용이다. 선정수행에 대한 가르침, 선정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예비수행, 번뇌에 대처하는 수행법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잠을 번뇌로 언급할 때는 나태와 게으름, 혹은 수면의 달콤함 등으로 설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경전에 보면 잠과 수행을 직접 연결 지어서 설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몇 가지 경우를 보면 잠과 수행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우선 ‘앙굿따라니까야’ (AN.III, 156)에 나오는 ‘잠을 못 이루는 자의 경(Appaṃsupatisutta
[1574호 / 2021년 2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배구계에서 촉발된 학교폭력 여파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기저기서 ‘나도 당했다’고 폭로되고 있다. 지난날을 생각해보니 나 또한 폭력의 장 속에서 살아왔음을 느낀다. 어릴 때 집안에서는 부모님의 폭력,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폭력, 군대에서는 고참들의 폭력, 대학생 때는 경찰들에 의한 폭력의 세례를 받았다. 민주화 끄트머리에서는 죽고 싶을 정도의 육체적 폭력으로 인한 고통이 절정을 이루었다. 커갈수록 더욱 ‘쎈’ 폭력을 온몸으로 받은 셈이다. 하나하나가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로 각인되어 있다. 지난날 한국은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일찍이 미국을 중심으로 ‘커머셜 릴리젼(commercial religion')이란 개념이 등장했다. 극도의 개인주의가 일상화되어 있는 산업사회에서 종교의 자립을 위해 상업과 종교가 융합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런데 혹자는 이런 점을 악용한다. 종교가 지니는 지순성이나 청정함을 버리고 세속에 영합해 이윤 활동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교회나 사찰이 추구하는 일상의 모습으로 다가와 있다. 종교적 감성마저도 상업성과 결부 지어 이용하려는 위험이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종교의
최근 되찾은 나한상들이 있다. 1988년 1월30일에 도난된 경상남도 고성군 옥천사 나한상 일곱 구 가운데 두 구가 2014년 6월2일 서울 관훈동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마이아트 옥션에 경매물품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도난된 지 30년 만에 문화재청·조계종·경찰청이 협력해, 서울 한 사립박물관장으로부터 나한상들을 회수했다. 사립박물관 측은 “도난문화재인 줄 몰랐고 고미술상으로부터 합법적으로 구입했다”며 선의취득을 주장해 사찰 측과의 소유권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본래 고성 옥천사 나한전에 모셔졌던 열여섯 존의 나한상으로 이 가운데
연기(緣起)가 공(空)이라는 주장은 대승의 상식이다.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면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하는 어떤 본성, 즉 자성(自性)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만물은 자성을 결여한다는 의미에서 공하다. 만물이 연기하기에 공하고, 따라서 연기하는 것이 공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연기가 공’이라는 주장은 옳다. 그런데 연기와 공이 동일하다고, 즉 ‘연기=공’이라고까지 볼 수 있을까?먼저 “연기와 공은 동일하다”는 명제를 분석해 보자.1. “연기=공”은 ‘연기’와 ‘공’ 두 개념이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옛 부처 나기 전에도의젓하게 한 상(相)이 있어 둥글다.석가 부처님도 알지 못했는데가섭 부처님이 어찌 전할 것인가?)“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도다.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사람이 송(頌) 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뚜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전하겠는가? 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달마 스님이 동시의 캐릭터로 등장했다. 달마 스님이 어린이들 친구가 된 것이다. 시의 화자 어린이의 할아버지는 달마도를 아주 좋아해서 사진 액자 곁에 달마도를 걸어 놓고, 할아버지 사진과 달마도를 번갈아 바라보며 기쁨을 맛보고 있다. 달마도는 신필이라 불리던 조선 중기의 화가 연담 김명국(蓮潭 金明國) 선생의 이름난 작품이다. 국립박물관에 있는 원작을 사진 복사한 것이 널리 보급되고 있다. 달마 스님(?~528)은 남인도 향지국(香至國) 셋째 왕자였다. 처음 이름은 ‘보뎨다라’였는데 후에 보리달마(菩提達磨)로 불리었고, 줄여서 ‘달
부처님의 깊고 넓은 통찰 가운데 하나는 식과 명색의 관계다. 우리는 인식한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이 있어야 그것을 제대로 인식한다. 책상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우리에게 책상은 어떻게 보일까? 책에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면 책을 책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고대 유물을 발굴하는 이들은 늘상 이 문제에 부딪친다. 오래 된 지층에서 캐내 살살 먼지를 털어낸 이 물건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뼛조각은 어떤 동물의 일부였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식과 명색이 단절된 유물은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이 버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서 나당동맹협정이 체결된 것은 삼국통일전쟁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사실은 신라인들에게 크게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말기 최치원이 찬술한 ‘성주사낭혜화상비명’에서 구체적으로 특필하였던 내용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춘추의 대당외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동맹협정의 체결을 전후하여 다양한 문화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김춘추는 당에 도착하자, 먼저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에 참관하기를 요청하여 당 태종의 허락을 받았고, 군사
붓다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마하깟사빠(Mahākassapa, 摩訶迦葉) 존자는 스승인 붓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마하깟사빠 존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수행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가끔씩 스승인 붓다를 찾아뵙고 문안 인사를 드렸다. 붓다는 그를 높이 평가했고, 자신과 동격으로 여겨 다른 비구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라고 부탁했다.‘오와다-숫따(Ovāda-sutta, 敎誡經)’(SN16:6)에 의하면,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마하깟사빠 존자가 세존을 찾아뵈었다. 그때 붓다는 마하깟사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