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동안거 기도를 유튜브 실시간 방송으로 매일 하고 있습니다. 신도님들도 방송으로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 듯 합니다. 방송으로 하는 간접 기도라, 현장의 긴장감이나 기도 열기를 느끼기 힘들 것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심을 조금이라도 증장시킬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 전후에 잠깐씩 법문이나 찬불가를 곁들이기도 합니다.방송이라 상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모든 것을 초심자의 눈높이에 맞추게 됩니다. 법문 주제도 따로 정하지 않고, 그날의 상황에 따라 기도하는 법, 수행, 사찰예절, 가피 이야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이념적 요소를 가진 것이 바로 불교이다. 타 종교를 존중하고 타 종교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칙령을 내린 아쇼카대왕이라는 위대한 선배를 지닌 불교는 타 종교를 존중하면서 그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하는 이념적 바탕을 제공할 수 있는, 여러 종교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에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선구적 종교라 할 수 있다.그렇지만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관용성 못지않게 공적인 영역에 있어서의 종교편향을 엄하게 금지하는 근본적 장치
작년 후덥지근한 여름을 지나갈 무렵의 일이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평범한 40대 직장인 신도 한 분이 주식투자에 대한 고민을 상담해온 적이 있다. 자신의 주변에서 평소 주식을 하지 않던 사람들도 어느 회사의 주식을 지금 사야 한다며 대출을 받아서라도 투자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주식에 관한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기에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누구도 한다더라는 말이 들려오고 언론에서 연일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업무시간 내내 주식시세를 보게
1968년 11월30일 권기종·권오현·김봉식·장만수·이지행, 이 다섯 명이 1700여년 한국불교 역사 최초의 군법사[軍僧]로 임관되었다. 조계종 군종특별교구에서는 이날을 ‘군승의 날’로 정하여 기념 법회를 열어 축하와 격려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연합군이 중국[당시 中共으로 호칭]의 참전으로 밀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수도 서울까지 위태롭던 1950년 12월21일 대통령이 기독교 군종장교 제도를 공식 승인하고, 1‧4후퇴 이후 서울을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1951년 2월7
그냥 떠나보는 것도 괜찮다. 그 곳에 무엇이 좋기 때문에. ‘누가 있다고 하기에’라는 이유를 붙이지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목적도 달지 말고 길을 나서 보는 것이다.버스가 달리다 종점에 서면 그 곳에는 절이 있고 절로 들어가면 바람 결에 풍경이 댕그렁거리며 기다린다. 대웅전 뒤 매화나무 가지에 겨울산새가 앉아 매화 피기를 기다리고 오후햇살에 오층석탑 그림자가 길어지는 산사를 바라보면 추워도 춥지 않다.“들어와 차 한 잔 하고 가요” 하는 스님의 짧은 말씀은 고스란히 법문이 돼 풍경과 함께 바래지 않는 추억이 된다.걷는 것도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161-1번지 정방사 법당에 주불로 봉안됐던 조선 후기 ‘목조관음보살좌상’이 2004년 5월13일 새벽 2시경 도난됐다. 2000년 7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6호로 지정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다. 아마 문화재 절도범들이 사찰에 불공드리러 온 것처럼 가장하고 낮에 법당 경내 구조를 살펴보았다가 한밤중 훔쳤을 것이다. 높이 51cm, 어깨폭 20cm로 크기가 작은 상이다. 불상 내부의 발원문에 의해 1689년 3월 단응(端應), 보웅(寶雄), 유특(裕特), 탁린(琢璘) 스님 등 조각승 4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붓다가 성도(成道) 당시 음미하고 있었다는 이 연기법(緣起法)은 접할 때마다 그 가르침의 깊이에 새롭게 놀라게 된다. 연기는 대승(大乘)에 이르러 단순한 인과(因果, causation)를 넘어 관계(關係, relation) 일반으로까지 확대 해석된다. 대다수 불자에게 연기는 존재세계를 가장 근본적으로 그리고 가장 포괄적으로 품는 진리다.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붓다의 성도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붓다의 성도를
고래는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젖먹이동물이다. 엄마 고래가 젖을 먹여서 아기 고래를 키운다. 이 사실이 아주 흥미롭다. 아기 고래가 엄마 고래를 따라 헤엄쳐 다니며 젖을 빠는 신기한 모습이 보고 싶어진다. 지금부터 몇 억 년 전 고래의 조상은 네 발로 뛰어다니던 육지의 젖먹이 짐승이었다고 한다. 이 사실도 흥미가 있다. 고래의 몸이 크게 된 것은 육지보다 몸을 움직이기가 자유로운 바닷물에서 살고부터라 한다. 고래는 세계의 동물 중에서 몸이 제일 크다. 고래 중에서도 제일 큰 것이 흰긴수염고래다. 몸길이가 30미터가 넘으며 몸무게가 1
틱낫한 스님이 말씀하시길, 붓다는 우리에게 매일 “다섯 가지 기억들”을 낭독하라고 권유했다. 늙어가는 본성, 건강이 나빠지는 본성, 죽는 본성, 변화의 본성, 그리고 “나의 행위는 진정으로 내게 속한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경구다. 죽음, 병, 이별과 같은 고통은 체험을 통해 어느 정도 받아들이겠는데 영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 가는 데는 순서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이 내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매사에 임하는 이를 찾아보기는 어렵다.한때 “문
7세기 중반 즈음 달성된 삼국통일은 신라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의 전체 역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삼국통일이 고구려・백제・신라 3국 가운데 국가의 발전이 가장 뒤떨어졌던 신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3국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각 나라의 전성기를 맞게 하였던 국왕들을 비교하면, 고구려의 19대 광개토왕(391~413)과 백제의 13대 근초고왕(346~375)에 견주어 신라의 24대 진흥왕(540~576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도량은 어느 곳인가? 지금 생사가 있는 바로 이 자리다.)이 주련은 글을 쓴 남전한규(南泉翰奎 1868~1936) 스님이 1908년 해인사에서 대중에게 설법한 내용을 새겨 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는 법보전 좌우에 걸어놓은 게송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스님은 올곧은 수행자였으며 명필로도 이름을 떨쳤다. 해인사 구광루, 성주 선석사 등에 묵적이 남아있다.“원만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도량은 어디에 있는가?”하고 먼저 선문답처럼 질문을 던져놓고 나서 여기에 대한 답을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은 모 학자 분의 설명에 의하면 똑같은 소리를 두고 짐승은 자신을 위협하는 소리로 알아듣고, 사람은 뜻을 헤아리는 소리로 알아듣고, 성인은 도의 소리로 알아듣는 다고 한다. 가령 산 속에서 북을 울리면 뭇 짐승들은 자기를 잡으러 오거나 해치려는 소리일지 모른다고 경계를 한다. 사람들은 귀에 익은 소리라고 생각하여 듣고 그냥 흘려버린다. 반면 성인은 천지만물이 그대로 도인줄 알아 북소리 속에서도 도를 본다.그래서인지 선가에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쳤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종소리를 듣거나,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신축년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월 말을 향해 달려 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복지관 어르신들이 입버릇처럼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시나 봅니다. 그렇게 또 한 살을 보태고 보니 자신이 처한 곳에서 초발심을 잃지 않고 신심껏 잘살아가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핀란드에 폭설이 내려 교통이 끊기고 시민들의 출퇴근이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
코로나19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 방식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팬데믹으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다준 부정적인 측면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사회적 거리두기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고,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집회가 금지됨으로써 평소 외향적인 사람들은 매우 힘들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소 자기계발을 위해 많
대승불교의 꽃이라 불리는 ‘화엄경’은 방대한 양도 양이지만, 그 속에 담긴 가르침 또한 심오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이다. 이런 ‘화엄경’을, 특히 그 중에서도 60권 ‘화엄경’을 7언 30구 210자의 게송으로 축약해 놓은 것이 바로 의상 스님의 법성게(法性偈)이다. ‘화엄경’이 팔만대장경을 응축한 것이라면 ‘법성게’는 ‘화엄경’의 벼리만을 추려 담은 ‘화엄경’의 엑기스라 할 수 있다.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및 명상심리상담학부 교수가 이런 ‘법성게’를 불교초심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춰 ‘화엄
승이 조주에게 물었다. “도란 무엇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성 밖에 있다.” “그 도[길]에 대하여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도에 대하여 물었는가” “대도(大道) 말입니다.” “대도는 장안까지 통한다.”삼조대사는 ‘신심명’에서 깨침에 대하여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분별심이란 이것과 저것을 서로 비교하고 재며 따지고 헤아리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은 분별심에서 벗어나면 지극한 깨침이란 특별히 어려울 것이 없다. 그 분별이란 바로 중생의 속성이다. 따라서 수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별히 경계해야 할
세상에는 다양한 종들이 존재한다. 종들마다 각각의 특징을 갖는다. ‘숫따니빠따’ 제3품에 ‘와셋타의 경(Vāseṭṭhasutta)’에서는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우월하다는 이야기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한다. 생물에게는 각기 출생에 따른 특징의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인간에게는 출생에 기인한 특징의 다양성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가르침인 것이다. 부처님은 계급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인간들의 행위에 따른 차이는 인정하셨다. 흔히 좋은 덕성을 갖춘 행위와 비열한 행위를 하는 자가 동등하게 평가받거나 대우받는 것은 있
오랜만에 지하철을 탈 일이 생겼다. 언제나 그랬듯이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 기사를 검색한다. 얼핏 눈에 띄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의리’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공직을 맡지 않고 외유를 떠나기로 했다는 대통령 측근이라는 사람의 기사였다. 순간 ‘의리’란 말 대신 퇴임한 대통령 곁에서 ‘말동무’라도 되겠다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왠지 의리란 말은 불편하게 들렸기 때문이다.누군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장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배신은 흔히 의리와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
2021.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앞으로 함께 할 한 해를 내다보며 조촐하나마 새해에 소망하는 것들을 적어 본다.새해에는 일터에서 근무하는 모든 이들이 생명을 위협받는 일 없이 안전하기를 소망한다. 지난해 대한민국에서는 882명의 노동자분들께서 산업재해로 돌아가셨다. 하루 평균 2.4명의 인원이 생계를 위해 일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새해가 한 달여 지난 지금 여전히 동탄의 물류센터에서 여수와 광주의 사업장에서 참담한 부고가 전해지고 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한다. ‘과로사’라는 말은 형용모순이고, 작업장에서의 생명안전
요하네스 브람스는 1853년 슈만과 클라라를 만나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번, Op.1을 연주했다. 그의 연주를 들은 슈만은 ‘신인(神人)과 미(美)의 여신 세 명이 지켜보았다’라는 평론으로 스무 살의 청년을 극찬했다. 신중하고도 진지했던 청년 브람스는 평소 존경하던 선배 음악가의 찬사에 ‘제 능력 이상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발표할 작품들에 상당히 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브람스는 그의 첫 피아노 협주곡을 1854년부터 4년여에 걸쳐 작곡했다. 원래 교향곡을 작곡하려던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