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요구하는 중국 내 티베트 스님들의 소신공양이 또 다시 벌어졌다. 12명째 소신공양으로 입적한 스님은 46세의 텐진 푼촉으로 알려졌다. 인도에 위치하고 있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티베트 센터 측은 “텐진 푼촉 스님이 12월1일 티베트 동쪽 창두(昌都)에 위치한 카르마사원 근처에서 소신했으며 인근 병원에서 치료 중 6일 입적했다”고 전했다. 푼촉 스님은 중국 정부에 항의하는 전단을 뿌리고 반 중국 구호를 외친 후 몸에 불을 붙였으며 근처에 있던 중국 경찰들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됐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 정부 측의 공식 발표는 아직 없다. 푼촉 스님의 소신공양으로 티베트의 종교와 자유를 요구하는 티베트 스님들의 소신공양 희생자는 12명으로 늘어났다. 남수연 기자 nam
새벽 6시,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여기가 교토라는 자각과 함께 어제 도후쿠지(東福寺)에서 보았던 쇼이치국사(聖一國師)의 영정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늙고 주름진 얼굴에 오른쪽의 불편한 눈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700년 된 그림이었다.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평생을 수행자로 살았던 스님. 마지막 순간 그는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방편을 베푼 지 79년, 그 실마리를 알고자 하는가. 부처님과 조사들도 전하지 못했네.(利生方便 七十九年 欲知端的 佛祖不傳)’라는 게송을 남기고 적멸에 들었다고 했다. ‘중생을 이롭게 한다(利生)’는 것은 무
▲ 혜능 스님의 수계도량인 광효사.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에 대한 논쟁인 풍번문답(風幡問答)으로 유명한 곳이다. 위사군이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께서 법을 설하심은 실로 부사의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그마한 의심이 있어서 큰스님께서 여쭙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큰스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거든 물으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위사군이 물었다. “대사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일조 달마조사의 종지가 아닙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제자가 듣자오니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무제가 달마대
▲부산 혜원정사 원돈선원 시민선방에서 지난 12월15일 40여명의 수행자들이 선원장 원허 스님과 정좌에 들었다. 오전 9시. 청명한 공기가 흐르는 도량의 아침에 죽비소리 세 번이 울린다. 어디서 들려오는 지 알 수 없지만 이 소리가 들린 이후 사찰 분위기가 뭔가 묵직하고 고요해 진 것은 분명하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간 곳, 바로 혜원정사 명심전의 반 지하 공간에 자리 잡은 시민선방 원돈선원이다. 이곳에서는 40여명의 보살들이 회색 법복을 입고 정좌에 들었다. 정갈한 실내는 어느 깊은 산골 수선사 분위기다. 여기서 10분 거리에 부산의 가장 붐비는 거리 연산교차로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다.부산에서도 손꼽히
고려시대 보조 지눌 국사 저술 ‘수심결(修心訣)’을 통해 마음 닦는 비결을 배운다. 명상상담연구원 교양대학원은 2012년 1월5일부터 8주 동안 매주 목요일 저녁 7시30분 인경 스님의 ‘수심결’ 특강을 연다. ‘수심결’은 보조 국사 저술로 중국과 일본 지식인들도 극찬 한 동북아시아 대표적 어록이다. 보조 국사는 ‘수심결’ 서두에서 ‘법화경’의 ‘화택비유’를 인용, 삼계의 뜨거운 고뇌는 마치 불타는 집과 같으니 괴로운 생사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부처를 이루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이며 자신 성품이 참다운 법임을 알지 못해 밖에서만 찾으니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본론에서 마음 닦아 부처 이루는 방법론을 9문9답으로 제시했다. ‘불교에서는 영성을 이떻게 정의
제따와나선원은 2012년 1월4일~3월21일 3개월간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선원에서 ‘제7기 아비담마 법회’를 개최한다. 아비담마는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론서다. 이번 법회는 물질과 범주에 대한 공부다. 몸이 어떤 물질 요소로 이뤄졌는지와 오염원, 번뇌, 족쇄 등 마음작용들을 배운다. 교재는 대림 스님과 각묵 스님이 번역한 ‘아비담마 길라잡이 상, 하’다. 02)595-5115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 47·휴암 비스킷을 먹고 그네를 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네를 밀어주셨다.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하얀 옷을 입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이제 떠나야할 때라고 말씀하셨다. 떠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죽는다고 하셨다. 웃으면서 가셨다. 죽음이 뭔지는 몰랐지만 여하튼 헤어지는 것이라 울며 매달렸다. 울다가 잠에서 깼다. 할아버지는 멀쩡히 잔디에 물을 뿌리고 계셨다. 6세 때 일이다. 죽음은 이렇게 강렬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동안 죽으면 어떻게 될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디로 가실까? 죽음 뒤에는 또 다른 죽음이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꿈이 있을까 등등의 고통스런 생각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어느덧 그런 생각은 일상
서울시의회가 12월19일 학생들의 종교 강요를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학생인권조례’를 가결 시킨 것과 관련해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이하 종평위)가 20일 논평을 내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종평위는 이날 논평에서 “서울시의회가 학생인권조례를 통과시킨 것을 환영한다”며 “이로써 학생들은 학교에서부터 종교의 자유 등 인권의 소중함을 체험하며 성장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종평위는 이어 “그 동안 종교가 혹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아이들이 상처를 받아왔다”며 “이번 학생인권조례 통과가 ‘차별’로 인해 생겼던 상처들을 치유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종평위는 “인권의 소중함을 체험하고 ‘너’와 ‘나’의 다름을 이해하며 자라난 학생들이 사회로 나갈 때, 그들이 구
▲포교학 개론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빠르게 변해간다. 변해가는 사회의 분위기와 함께 사람들의 삶의 자세도 변해간다. 갖가지 사회 제반 양상은 생물처럼 변해가고 있고 그들 중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종교도 피할 수 없이 변해가야만 한다. IT산업의 등장과 더불어 변해가는 사회현상에 보조를 맞춰가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얘기들을 한다. 매스컴의 홍수에 불교의 세계는 얼마나 그 같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여타종교에 비교하더라도 불교의 변화는 그리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닌듯하다. 종교도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준엄한 사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듯하다. 30년 세월 포교
멸성제(滅聖諦)란 무엇인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가리킨다. 갈애(愛)를 제거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전하는 가르침이다. 멸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열반(涅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거룩한 진리(苦滅聖諦)가 있다. 즉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포기·버림·벗어남·집착 없음이다.” 멸성제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괴로움이 그친 이상적인 세계를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그러한 경지를 스스로 실현하여 머물겠노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멸성제는 우리 자신이 갈애의 속박에 무력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의 원인인 느낌에 대해서도 적절히 대처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을 우리도 똑같이 깨달아서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열망은 모든 불자들의 로망이다. 다만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 얼마나 효과적이고 실용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다.불교의 모든 가르침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깨달을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개인의 수준과 조건에 맞추어 팔만사천가지(셀수 없이 많다는 의미로)로 설명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천백억화신불, 온 우주에 가득한 불보살님들이 다양한 인연으로 우리들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을 돕는다고 한다. 또 평생을 공부해도 다 공부하지 못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경전들과 논서들이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다양한 방편들이 애초에는 우리들의 수준에 맞추어 깨달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고자 시작된 친절함이고 연민이었을
문무왕·김유신 명령으로용이 임금에게 직접 전달 지배층에 의해 널리 유포정치적 목적과 깊은 관련 ▲ 신문왕은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만파식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만파식적 설화의 무대인 경주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 문화재청 제공 문무왕 16년(676) 11월 신라는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를 기벌포에서 격파하고 승리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오랜 전쟁은 마침내 끝났다. 그래도 문무왕은 왜병을 대비하여 감은사(感恩寺)를 짓기 시작했지만 마치지 못하고 681년 7월1일에 돌아갔다. 문무왕은 평소에 죽은 뒤에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