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로 지정된 석조물은 대부분 환자 상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환자 상태의 석조문화재 보존사업의 경우 환자의 치료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 석조 유적의 대부분이 마애불, 불상, 석탑 등 인물의 부조와 문양을 포함하기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그 진단 과정과 처방과정에서 특히 그러하다. 겉으로 멀쩡한 사람도 종합정밀진단을 해보면 자기도 모르던 병명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쁜 균이 침입했다가 몸 속의 항체에 의해 자연적으로 치유되어 지나가는 수도 있지만, 때로는 너무 늦게 발견되어 발달된 현대의술로도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경우를 주위에서 종종 보곤 한다. 만일 정기적으로 정밀 진단을 실시하여 조그만 이상 징후라도 조기에 발견하여 정확한 상태와 원인이 규명된다면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국보 2호 원각사탑에서 5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원각사지로부터는 불과 10여 미터 지점에 8층 규모의 대형 건물이 버젓이 신축 중에 있는 것은 정부든 서울시든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 정도의 문화의식으로 우리나라가 문화대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문화재 인근 지역에 건축물을 신축할 경우 반드시 문화재청장이 허가를 득해야 함에도 불과하고 시 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 허가 승인을 내준 과정에 우리는 의혹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건축주가 관할 자치단체의 구의원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음을 감안하면 정부당국은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책임소재를 가려야 할 것이다. 서울시 문화재 심의위원회 관계자의 말대로 이번 공사가 법적으
한바퀴 돌아 볼까하여 발을 때고 나니 “그 한바퀴”가 작지 않더라. 걸음을 멈추어야만 될 것 같은 곳은 왜이리 많았던지.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면 되는 구나.”하고 생각케 한다. 처음 서있던 곳에 다시 서니 범영루도 다시 보이는 구나.불국사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60, 70년대 성장위주의 산업화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수를 하면서 근대화를 이루어 왔다. 우선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로 수출위주의 성장정책을 통하여 ‘달러’라는 외국의 돈을 벌어 들이고자 노력하였다. 국립공원 도로에 둘러싸인 ‘섬’ 그리하여 이제 먹고 사는 문제는 최소한 해결하였으며, 보다 나은 삶은 질의 추구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의 부작용으로서 편리함을 추구하고,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모든 것을 돈으로 결정하려는 사고와 전국의 청정한 국토가 오염되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점이다. 물론 80년대 이후 20여 년간 산업화과정에서 환경오염이 심각해진 대도시지역과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후처리대책이 마련되었으며, 현재까지도 환경관리
11년 전 충남대에 50억 상당의 부동산과 현금을 장학사업에 써 달라며 흔쾌히 기증했던 ‘김밥 할머니’ 이복순씨를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외아들을 키우며 평생 김밥을 팔아 모은 재산을 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여러 설명이 필요 없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 불자들에게는 그가 정심화(正心華)라는 법명을 가진, 또 유명 선원이나 사찰의 불사에도 적극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독실한 불자였기에 그 감동은 더욱 컸었습니다. 당시 그 소식을 접하며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서 “그 재산을 기왕이면 동국대학이나 중앙승가대학과 같은 불교계 대학에 기증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이라는 ‘속된’ 생각을 했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김밥 할머니의 너무나 아름다운 무
얼마 전 불교텔레비전은 매주 화요일과 일요일에 방영되던 ‘바로보는 동양학2’ 프로그램을 서둘러 종영했다. 30강을 예정으로 진행됐던 강의를 17강에서 중단한 것이다. 이렇게 방송을 중도에 내린 것은 재가자인 강의 진행자의 발언이 원인이었다. 8월 28일분 방송에서 문제가 된 것은 강의 내용 중 언급된 ‘가사적(袈裟賊)’. 가사입은 도적이라는 이 표현에 대해 불교텔레비전은 승가에 대한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평가하고 이날 방영된 불교수행론 1강을 원래 예정된 9월 2일에 재방송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 대해 방송 진행자 측이 방송국과 상의해 불교수행론 1강은 재방송이 되지 않고 2강과 3강까지 방송하고 프로그램을 마쳤다. 그러나 47분 여의 방송 시간 동안 전해진 내용은 승가에 대한 단순한 비방이 아
우리는 행복한 사람일까? 세속적 가치관인 돈·건강·출세 등은 과연 행복의 기준일까? 또 인간의 행복의 기준은 주관적 요소일까 객관적 요소일까? 주관적 요소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본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것이고 거꾸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하다는 것이다. 객관적 요소는 돈·명예·권력·건강 등의 요소를 갖춘 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일반적 통념의 시각일 것이다. 우리는 알렉산더대왕의 ‘당신 소원이 뭐냐’는 질문에 ‘당신 때문에 내 몸에 그림자가 졌소, 비켜주시오, 그게 내 소원이요’라고 답하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3000천년 전의 대화를 생각해 본다. 과연 누가 더 행복했을까 권력·부·명예를 쥔 알렉산더의 입장에서 본 디오게네스는 가련한 철학자 이었겠지만 철인
자비심과 함께않는 깨달음 깨달음 없는 자비심도 허망 자비심 없다면 불자도 아닐 것 요즘 나는 ‘깨달음은 자비심과 함께 한다’내지 ‘대자대비를 佛性이라 한다’는 경구를 가장 좋아하고 즐겨 인용하고 있다. 앞의 문장은 박성배 교수의 책 〈깨침과 깨달음〉)에서, 뒤의 문장은 〈열반경〉에서 거의 비슷한 무렵에 만났다. 앞의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엔 괜히 울컥하여 눈물까지 찔끔거렸던 기억이 있다. 깨달음을 내게는 너무나 먼 일로 여기고, 혹은 영원히 내 것으로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초조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은데 앞의 문장을 만나 후부터는 어떤 점이 좀 분명해져 그동안 없던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일상으로 만나는 불자들의 삶과 우리의 신행활동을 보는 관점이 조금 변했다
한국의 불교학 연구가 세계 수준에 비해 크게 뒤지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최근에는 불교학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대안과 현대 불교학이 타파해야 할 과제들이 구체적으로 제시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불교학계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비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불교학 연구가 한국불교 발전의 첩경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直指人心 見性成佛’만을 신봉 한국의 불교학이 크게 발전하지 못한 요인은 무엇일까? ‘깨달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선불교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스님은 물론 재가 불자들도 입만 열면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외치고 있다. 이러한 선불교의 영향으로 돈오(頓悟), 즉 ‘단박 깨닫는다’는 생각이 불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위산에서 앙산을 거쳐 남탑(南塔)으로 내려오는 위앙종의 법맥을 이은 이에 파초혜청(芭蕉慧淸)이 있으니, 신라 출신으로 당(唐)에 건너가 거기서 일생을 마친 선사다. 그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은 다음같은 설법에서도 엿볼 수 있다. ‘네게 주장자가 있다면 나는 네게 주장자를 주려니와, 네게 주장자가 없다면 나는 네게서 주장자를 뺏으리라’ 이 한마디가 선객들에게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선문염송집』에 십여명의 내로라 하는 선사들의 게송과 논평이 나와 있는데에다가, 후대의 『무문관』까지 이 화두를 다루고 있는 데서도 짐작이 간다. 지금은 죽암사규(竹庵士珪)가 이에 언급하면서 읊조린 게송이 시사하는 바 큰 듯하므로 이를 통해 화두에 다가서 보자. 많으면 조금 더하고
서울과 부산에 거주하는 불자들에게는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다름 아닌 지하철 승강장의 벽에 걸려 있는 ‘자비의 말씀’을 읽는 기쁨이지요. 내로라하는 불교작가들과 글 솜씨 좋은 스님들이 정성껏 작성한 아름답고 지혜로운 글들이 예쁜 액자에 담겨져 불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감동과 여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비의 말씀’은 불자에겐 열차를 기다리는 짜투리 시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번 더 읽는 즐거움을, 비불자에겐 자연스럽게 불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이 일을 주관하는 풍경소리의 일꾼들은 ‘자비의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거나, 불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됐다는 시민들의 감사전화를 받을 때면 지친 어깨가 저
구리시립 딸기원어린이집의 운영주체인 봉선사와 전 시설장 박경주 씨 간에 빚어진 갈등이 법정 시비로 이어질 조짐마저 보이며 확산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딸기원사태’는 봉선사가 “시설장의 비정상적 시설운영으로 인한 부작용 발생”을 이유로 해고한데 대해 박경주 씨가 “해고사유가 부당하다”고 반발하면서 감정 대립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봉선사가 보육시설장 및 보육교사 관계, 시설물관리 소홀, 보육정원 미달, 수탁자 기만 등의 사유를 들어 5월 12일자로 박 씨에게 행임을 통고했으나, 박 씨는 “부당한 처사”라며 5월 17일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구제신청서를 접수해 행정기관을 통해 원직 복직을 요구하고 나선 것. 또 경기지방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에 대한 진정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봉선
“화살이나 칼에 맞은 상처는 치유할 수 있지만, 한마디 말에 입은 상처는 아물지가 않네.” 말을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이 경구(警句)는 [판차 탄트라]라는 인도의 우화에서 새들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까마귀의 반대로 왕이 되지 못한 올빼미가 내뱉은 말이다. 올빼미는 못생겼으며 낮눈이 어둡다는 까마귀의 비방성의 발언 때문에 올빼미의 즉위식은 무산되었으며, 올빼미와 까마귀는 서로 원수가 되었다. 이 이야기가 불교의 본생담에서는 합리적이고 완전한 합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약간 각색되어 있다. 한마디 말이 칼보다 무섭다 한마디 말이 칼보다도 더한 상처를 남긴다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겪고 있는 사실이다. 그 예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바로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지금 겪고 있는
육자진언이 궁예진언인가.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의 지난 주말 방영분(11월 18, 19일)을 본 불자들의 한결같은 의문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한 사극(史劇)이라도 드라마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각색이 필요로 한 것이라 이해된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본 드라마에서는 다행히 그런 부분에 대하여 해설을 곁들이거나 시청자들의 상상력을 유발하는 쪽으로 처리하곤 하였지만, 지난 주말 궁예의 육자진언 강권 장면은 그런 흔적조차 보이지 않아 당황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그 방영 분을 시청한 불자들의 생각은 대략 두가지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관세음보살 본심진언인 육자대명왕진언을 궁예가 차용하여 '궁예진언’처럼 인식된 점이고,
법보신문-녹색연합 전국답사 결과 내원사 화엄벌 등 ‘생태寶庫’ 확인 “사찰 환경을 지방자치단체의 무분별한 개발의 손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녹지자연도 7등급 이상인 주변 식생(植生)의 보호 가치를 알리고 ‘일사찰-일 희귀 식물’을 연계하는 작업을 벌여야 한다.” 환경 전문가들은 사찰의 생태학적 가치에 대해 “녹지자연도(보통 야산 3∼4등급)가 우수하고 평균 400여 종의 식물종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자연사 박물관”이라고 강조한다. “사찰 주변에는 ‘일 사찰-일 희귀 식물’을 연계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식생이 자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의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어 사찰이 생태활동을 곁들인 문화재 보존 운동의 중심이 될
왜 갑자기 〈노틀담의 곱추〉 얘기를 쓰고 싶어졌을까. 그 이유는 이렇다. 6월말에 막 올릴 작품을 연습하고 있는데, 그 작품의 여주인공은 노틀담의 곱추를 마음에 품고 사는 참을 가련한 여인이다. 내 마음의 곱추를 찾아가고 싶다는 그녀의 마지막 대사는 정말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로, 우리 삭막한 현대인들의 심리를 어둡게 그려놓은 작품인 것이다. 남편으로부터 23년간 단 한번의 따뜻한 사랑도 받아보지 못한 여주인공이 아주 비참하고 허탈한 심정으로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읊는다. “내 마음의 곱추? 그런 것이 있나? 그런 것이 있나보지… 그래 사랑아 제발 좀 거기 있어다오.” 얼마나 참되고 순수한 사랑을 갈구 했으면 또 얼마나 사랑없는 가정이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대사를 뱉었겠는가
1987년 2월 10일 전세계는 인도 델리발 한 통신사의 흥미있는 기사로 떠들썩했다. “환생한 라마로 알려진 두 살난 스페인 어린이”란 제목의 소식이었다. 오젤 이자 토레스(Osel Iza Torres)란 두 살난 스페인어린이가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네팔왕국의 한 불교사찰의 주지로 임명되어 3월 12일 성대히 그 취임식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어린이는 파코(Paco)와 마리아 토레스(Maria Torres) 부부의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났는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입적한 예셰(Yeshe)라마의 환생이라고 했다. 예셰 라마는 오랜 동안 스페인에서 거주했다. 마리아 토레스 부인에 따르면 스페인의 한 로마 가톨릭교의 성당에서 예셰 라마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는데, 레이저 광선을 받은
불자 네티즌의 3/4이 일년에 5권 이하의 불서를 읽는 것으로 나타났 다. 법보신문이 11월13일부터 30일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 51표 중 75%인 38표가 5권 이하의 불서를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3~5권을 읽는다는 네티즌이 31%인 16표였고 한두 권 읽는다는 네티즌이 33%인 17표였다. 전혀 읽지 않는다는 네티즌도 10%인 5표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6권 이상 읽는다는 네티즌은 25%인 13표에 불과했다. 이같은 결과는 불자들의 독서량이 일반인의 그것에 못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참고로 지난해 국민 1인당 연평균 독서량은 9.8권이었다. 최근에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기독교의 교회나 가톨릭의 성당에선 결혼
1980년대 후반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에게 수상된 노벨 평화상은 폴란드에 티베트 불교 바람이 불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티베트 불교가 알려지면서 그전까지의 소규모로 이뤄지던 불교관계 서적의 번역, 모임, 법회 규모가 크게 성장한다. 폴란드인들의 티베트에 대한 관심은 다른 서유럽이나 북미에 대한 호기심과 견주어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을 만큼 활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1991년 불교는 새로 구성된 민주정부에 의해서 정식 종교로 인정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폴란드 방문이나 티베트 스님들의 상주, 포교활동은 매우 활발히 전개됐다. 특히, 덴마크 출신의 올레 니달 법사의 금강도 불교(카르마 카규파)는 폴란드 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 현재 25개 도시에 법당이 있으며, 1
“우리 나라 불교를 기복불교라 말하지 말라.” 대구·경북 지역불교 하면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갓바위 부처’. 영험 있는 부처님이라는 소문에 전국에서 불자들이 몰려오는 곳이다. 그러나 대구·경북지역에는 갓바위 부처님외에도 불교를 알리고 교리 공부에 열심인 대학생 불자들이 있다. 대학생불교연합회 대구·경북지부(지부장 손재운, 이하 대경지부)회원들이 바로 그들.대경지부는 경북대, 영남대, 대구가톨릭대, 계명대 등 대구·경북지역의 15개 대학 지회로 이뤄져 있다. 대경지부의 나이는 사람으로 치면 43세. 현재 약 500명의 회원이 활동한다. 대경지부가 지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의 불교를 알리는데 가장 성공한 경우는 지난 10월 27일 《만행》의 저자 현각 스님을 초청했던 것. 지역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