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하는데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이 질문이 때로는 불교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단초와 함께 어떤 신행생활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마치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에서 출발한 사유가 삶의 설계도를 그려내는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작은 책자로 보급되는 『법공양』에 의미심장한 한 스님의 법설이 실린 바 있다. 마음이 있지만 행하지 못하면 마음이 없는 것과 같고(有心不行同無心),마음이 있고 행도 있으면 모든 부처님과 같다(有心有行同諸佛). 금강선원장 혜거 스님의 일언이었다. 스님은 ‘마음은 있고 행이 없으면 마음을 먹지 않은 무지한 이와 다를 바 없으며, 마음이 있고 실천행도 뒤따르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부연 설명과
▲정무 스님. 조계종 원로의원인 원공 정무(圓空 正無)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안성 석남사로 향하는 시골 길은 고즈넉하고 푸근했다. 높지도, 그렇다고 너무 낮지도 않은 서운산은 어릴 적 살던 고향의 앞산을 연상케 했다. 여기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처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다. 1958년 출가한 이후,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를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실천해 온 정무 스님은 이 시대 청빈의 사표다. 단순히 제자들과 밭 갈고 채소 가꾸며 산다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절 살림 한다고 계곡물
조계산 호랑이로 유명한 신광 활안(神光 活眼)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천자암을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달랑, 카메라 가방 하나 메고 오르는 길이었지만 숨이 턱턱 막혀왔다. 가파른 이 길을, 활안 스님은 천자암 불사를 위해 지게에 기왓장을 짊어지고 오르내렸다. 지고한 원력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활안 스님은 몸마저 허약해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오죽하면 허공을 향해 ‘이렇게 나를 죽이려면 뭐 하러 태어나게 했느냐!’며 하소연 했을까. 그러나 그 고통이 1945년 전북 순창 순평사로 향하게 했다. 고통 받는 이 육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출가 후 스님은 ‘나고 죽는 이전의 나는 무엇인가(生滅未生前 是甚)’ 화두를 들고 법주사, 수덕사, 상원사,
경남 함양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벽송사는 예로부터 선교겸수 대 종장 108명이 배출됐다 하여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 일컬어졌다. 행화(行化)란 수행(修行)과 교화(敎化)를 두루 행했다는 말이다. 무자화두로 무명을 타파한 벽송 지엄 선사가 창건한 벽송사는 그야말로 조선불교의 선맥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도량이다. 벽송 지엄 이후 부용 영관, 청허 휴정, 부휴 선수, 청매 인오, 환성 지안 등 기라성 같은 대선사가 줄지어 나와 인천의 사표로 우뚝 섰으니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 칭할만하다. 이토록 유서 깊은 벽송사에 지난 2006년 봄 부터 한산 월암(閑山 月庵) 스님이 주석하며 벽송사 선풍을 다시 휘날리고 있다. 월암 스님은 1973년 도문 스님을 은사로 동진 출가해 중국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80화엄경의 주석서 하면 ‘통현장자의 합론(合論)’과 ‘청량(淸凉)스님의 소초(疏抄)’를 일컫는다. 거사였던 통현장자(通玄長者)의 ‘합론’이 선이 굵다면 청량 스님의 ‘소초’는 섬세하다고 한다.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합론’을, 교가에서는 ‘소초’를 선호했는데 아마도 선교가 갖는 독특한 가풍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화엄경소초』를 지은 청량 스님의 눈에 비친 『화엄경』은 어떠했을까! “비록 텅 비고 텅 비어 자취가 끊어졌으나 진리의 하늘에는 뭇 별들이 찬연히 빛나고, 맑고 맑아서 말을 붙일 수 없으나 가르침의 바다에는 그 물결 호한(浩瀚, 넓고 크다)하기 이를 데 없다.” 청량 스님의 마음을 꿰뚫은 것일까! 부산 해인정사 주지 수진 스님이 ‘청량 화엄경소초’ 전권 역해에 나섰다. 재가불자
지운 스님의 요사채 다락방 서고에는 1만 여 권의 책으로 가득하다. 강백의 지난 여정이 오롯하게 느껴진다. ‘송광-동화사 강백 근 20년‘지관’ 조예 깊은 선지식‘명철한 강의 -수행점검 철저‘성주 자비선사로 대중 운집 원허 지운(圓虛 智雲) 스님은 송광사와 동화사에서 근 17년여 동안 강주를 지내며 불교교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 온 선지식이다.경북 성주에 자리하고 있는 자비선사로 향하는 길에 옛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지운 스님의 강론집 『뿌리없는 나무에 핀 꽃』(도서출판 법공양)은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전 세계가 술렁일 때 세상에 선을 보였다. 지금도 근기가 약하지만 그 책을 접했을 때는 더했기에 제1장 ‘깨달음의 교리적 이해’ 부분을 펼친 순간 바로 덮는 우를 범
화두 놓치지 않겠다고붙잡고 집착하면 안 돼순일한 의단독로 속삼매 얻으면 곧 소식1973년 대원 스님은 해인총림 방장으로 주석하고 있는 고암 스님을 찾아갔다. 고암 스님이 물었다.“정전백수자(庭前百樹子) 화두는 몇 년이나 들었는가?”“8년 참구했습니다.”“잣나무 꼭대기 위에서 손을 놓고 한 걸음 나아갔을 때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인가?”고암 스님의 한 마디가 떨어진 순간, 대원 스님은 박장대소 했다. 홀연히 깨우친 바가 있었던 것이다.“무슨 기특한 일이 있기에 웃는가! 속히 일러라.”“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없습니다.”“아니다. 다시 말하라.”이에 대원 스님은 삼배를 올리고 말했다.“설사 천언만구를 다 이른다 해도 이 속에 있어서 상신실명 합니다.” 대원 스님은 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 앉았다.
“마명(馬鳴)도 용수(龍樹)도 염불을 했는데 나는 무엇이기에 염불을 하지 않겠는가!” 서산대사가 『선가귀감』에서 일갈한 일구다. 염불을 하근기 불자가 하는 수행법이라 오해하는 풍토가 아직까지도 상존하고 있지만 실상염불의 역사는 지금의 화두선과는 비견되지 않을 정도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염불을 극락왕생만을 기원하는 타력신앙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지만 그들에게 영명연수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선정만 있고 염불이 없으면 열 사람에 아홉이 미끄러지고 중음경계가 나툴 때 별안간 그를 따라간다. 선정과 염불 모두 없으면 무쇠 평상과 구리기둥의 지옥, 일만 겁과 일천 생에 믿고 의지할 데 하나도 없다.” 영명연수의 이 말은 안일하게 흘러가고 있던 중국의 묵조, 조사선에 대한 비판의 일성이지
생활의 발견이 곧 자아의 발견일상의 원각인데 모르니 ‘중생’ 영축총림 통도사 극락선원은 근대 고승인 경봉 스님이 주석하며 선풍을 날린 곳이다. 암자에 도착하자마자 경봉 스님의 옛 선취가 남아 있는 삼소굴(三笑窟)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 1982년 7월 경봉 선사가 남긴 임종게다. 극락암 참배객 중에는 선지식이 남긴 향취나마 느껴보고자 대문 빗장을 직접 만져 보는 이가 적지 않다. 경봉 스님은 왜 대낮도 아닌 한밤중에 가까이 있는 문고리를 놔두고 굳이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 했을까? 이런 사량도 공연한 것이라 여겨져 곧바로 삼소굴 옆 원광재(圓光齋)로 향했다. 경봉 스님의 법호 ‘원광’을 따 지은 명정 스님 거처다. 극락선원장 명정(明正) 스님은 1943년
64년 종단 3대 사업으로 출발40여년 만에 한글대장경 완간남양주 봉선사의 겨울이 유난히 차갑다.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별채 앞마당에는 찬바람만 가득하다. 조실당에 걸려 있는 ‘다경실(茶經室)’, ‘능엄대도량(楞嚴大道場)’ 두 개의 현판도 유달리 외로워 보인다. 동국대, 역경원, 월운 스님. 이 셋은 셋이 아닌 하나였다. 불자라면 그 누구도 동국대를 떠난 역경원도, 역경원을 떠난 월운 스님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이 순간은 아니다. 동국대는 역경원장 월운 스님을 일방적으로 해임했고, 역경원 조차 단일 원이 아닌 ‘불교학술원’과 통합할 태세다. 불자들로부터 ‘역경보살’이라는 칭송까지 들었던 월운 스님의 심기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기에 충분하다. 방문을 열자 300여권의
죽음 문제 풀려 철학 선택 청화 스님 만나 출가 결심보시-감사-사과-관용 4가지 덕 실천하면 완벽 대학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청년은 고등학교 은사를 만났다. “무슨 학과를 지망할까요?” 철학을 전공한 은사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거지될 각오가 서 있으면 철학이 좋지!” 어려서부터 죽음에 천착했던 그에게 죽음과 철학, 그리고 거지는 낭만(浪漫)적으로 전해져왔다.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자신의 의식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두 친구를 만난다. 한 친구는 늘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얼마나 좋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읊조릴까? 그
삼일 닦은 마음 천년보배 일구에 마음 동요해 출가50년 정진 속 대강백 우뚝 카페 ‘염화실’로 人佛사상 펴 여래가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온 법계의 모든 사람들을 두루 살피시고 말씀 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모든 사람들(衆生)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추고 있구나. 다만 어리석고 미혹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奇裁奇裁 此諸衆生 云何具有如來智慧 愚癡迷惑 不知不見)”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나오는 이 일구는 ‘일체중생이 다 부처’라는 뜻이다. 전 조계종 교육원장 무비 스님 역시 여기에 입각, 인터넷 전법도량 ‘염화실’을 통해 ‘사람이 곧 부처(人卽是佛)’라는 ‘인불’사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간의 ‘참 나’찾기 등과는 또 다른 맛과 힘이 느껴진다. 어렸을 당시 한 동자승과
소승-대승 모두 하나의 강일 뿐바다에 이르면 결국 물이요 불법맹목적 殺佛殺祖는 대단한 착각成佛作祖에 마음두고 공부해야 193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한학에 밝았다. 1954년 ‘오천년조선역사’라는 책에서 우연히 이율곡이 산사에서 공부를 했다는 대목에 ‘나도 입산하겠다’며 네 살 연상의 벗과 함께 만암 스님이 주석하던 백양사를 찾았다. 그의 얼굴을 살핀 만암 스님은 시 한수를 지어주며 입방을 허락했다. “어린 나이에 중이 되려는가?…. 봄바람은 무슨 힘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가? 물의 넋은 천연해서 어디든 맑아지네.(春風何力人人樂 水魄天然處處澄)/ 불법은 결코 속세의 문턱이 아니라 소심한 뜬 생각으로 오르기 어려워라.(佛法決非塵俗境 小心泛想必難登)” 그러나 며칠 후 동행한 도
원효 ‘무애’-혜능 ‘무상게’ 인용 막행막식-‘不持戒’ 절대 안 돼계·정·혜는 셋이 아닌 하나요 지계없인 선정 힘도 약할 뿐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서 대중 설법을 하실 때 한 바라문이 “나는 부처보다 더 청정하고 훌륭하다”며 손타리 강에서 목욕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유인 즉, “복과 광명을 주는 강이므로 거기서 목욕을 하면 모든 죄가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죽이지 않으며, 진실을 지켜 거짓이 없으면 그것이 진정으로 깨끗한 것이다. 그대는 ‘계율의 강물’에 목욕 하라. 그러면 반드시 편하고 아늑하게 될 것이니 굳이 강물에 갈 필요가 없다.” 이에 바라문은 부처님을 찬탄하며 제자가 되어 수행정진 한 결과 아라한에 이르렀다. 바로 강측(江側) 아라한이다
지견으로 열린 눈 깨달음 착각 안 돼도리-분별로 알려말고 간단없는 의심 지속해야 화두 안 들릴 땐 놓고 참회 통해 재 발심무작정 깨달음 서두르면 퇴굴심 생겨 위험천만 현산 스님은 불자들이 꼭 주의해야 할 하나로 화두를 깨치려는 의지는 굳건히 하되 서두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스님은 “신심을 내어 한 1·2년 하다가 타성일편은 고사하고 의심 하나 이어가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는 불자가 너무 많다”며 “화두 하나 잡고 긴 여정을 떠나보면 언젠간 길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리산 화엄사는 인도에서 온 연기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당시 이 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모여 이뤄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연기 스님은 대중들에게 “이 산에 처음 닿
중국 당나라 서암 스님은 매일 자신을 ‘주인공아’ 부르고는 ‘예’하고 대답하며 ‘성성하게 깨어있어라, 남에게 속지 마라’ 하고는 ‘예, 예’했다. 이 역시 ‘참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고려 야운 스님의 「자경문」에도 ‘주인공’이 나온다. 야운 스님 스스로 경책하는 글인 「자경문」에서도 ‘주인공아! 내 말을 들어라’하고 시작된다. 이후 이어지는 “인류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의 공의 이치를 깨달아 도를 얻었건만 너는 어찌하여 아직도 괴로움 속에서 헤매고 있는가?”라는 첫 구절은 신심과 발심의 정곡을 찌르는 일언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그 뿐인가. 야운 스님은 자신의 일생에 삼가야 할 것과 갖춰야 할 덕목 10가지도 농축해 함께 전하고 있다.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찾지 말고,
고불총림이 ‘백양사’(白羊寺)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일화를 들여다보면 그 유명한 ‘백장야호’(百丈野狐) 선문답이 아른거린다.조선 선조 때 환성지안 (喚醒志安) 스님이 정토사 영천암에서 경을 설하고 있었다. 운집한 대중과 법회를 연지 삼일 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뒷산에서 내려왔고, 7일 법회가 끝나는 날 흰 양이 스님의 꿈속에 나타났다.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극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하고는 절을 올렸다. 이튿날 암자 아래를 살펴보니 흰 양이 죽어 있었다. 이후 정토사는 백양사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환성 스님의 법호도 환양(喚羊)으로 바꿨다.『무문관』 2칙에 나오는 ‘백장야호(百丈野狐)’도 의미는 다르지만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