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無碍) 서돈각(徐燉珏, 1920~ 2004)은 1949년 서울대 법과대학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법과대학장 등을 지내고 1972년 이후 동국대와 경북대 총장을 맡아 교육행정가로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학자의 최고 명예인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을 지냈다.유년기 할머니 따라 사찰참배일본 유학시절 본격 불교공부대불련 지도교수로 적극 지원상법학자보다 불교 수행자로상법(商法)을 전문하여 ‘상법개론’ 등 관련 저술을 여러권 남겼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나 세상을 떠난 뒤에나 그를 이야기할 때에는 ‘상법학자 서돈각’ 보다는 ‘불교 수행자 무애거사’를
흔히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 해인사 보관 대장경은, 그 보다 앞서 대구 부인사에서 판각‧봉안했다가 몽골군 침입 때에 불탄 초조대장경과 구별하여 ‘고려재조대장경(高麗再雕大藏經)’이라 불러야 정확하다. 그러나 이미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국제학계에서도 ‘Tripitaka Koreana,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이하 고려장)’으로 통용되고 있다.가장 완벽하다는 고려대장경‘찬란한 과거 유물’로만 존재활용방안은 여전히 큰 과제이 ‘고려장’은 불보살(佛菩薩)의 가피로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고자 1236~1251
개신교와 천주교에 비하여 20년 가까이 늦은 1968년에야 아주 힘든 과정을 거쳐 군법사 제도가 도입되는 과정을 지난 글에서 소개했다.(‘44회 최초의 군법사 해외 파견’, 2017년 12월6일자)청담 스님, 열반 이틀 전에군 법당 준공식 동참 격려기독교계보다 20년 늦지만오토바이 타고다니며 포교승재가가 힘을 모아서 어렵게 군법사를 파송하게 되었지만 초기 군법사들은 가시밭길을 헤치고 나가야 했다. 법회를 진행할 수 있는 법당과 법요집이 없었고 법사 숫자는 부족한데다 넓은 담당 구역을 다니며 장병들에게 법문을 하고 불자 장교와 준사관
1970년 9월 미국 변호사인 굿윈씨 부부가 내한하여 전국의 사찰을 순회하고 삼보법회에서 강연회를 가졌다. 덕산 이한상 거사와 인연이 있었던 굿윈 씨는 “한국불교가 훌륭한 진리와 전통이 있지만 이것을 전체 인류에게 보급할 길이 없으니 딱한 일”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혔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한국 사찰을 짓겠다고 하였다.(‘대한불교’, 1970. 9. 13.)미국인 변호사 굿윈씨 부부가한국불교 보급 어려움 말하자캘리포니아 삼보사 등 창건해조계총림에 첫 국제선원 개원굿윈 씨는 자신은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제국주의‧식민주의
“섣달그믐 흩어졌던 이웃들이 모여 오손도손 나누는 정다운 제야 나는 검은색 코로나에 실려 낯선 사벽의 초대를 받는다. … 정월 초이틀 얼어붙은 추위 속에 또 누가 나를 부르는가 비상 고등 군법회의 검찰부 염라청의 사자처럼 소환장을 내미는 가죽잠바 둘 나는 또 검은 코로나의 신세를 진다.…저 포학무도한 전제군주 시절에도 상소하는 제도가 있었다. 억울한 백성들이 두들길 북이 있었다. 그런데 자유민주의 나라 대한민국 1974년 1월 백성들은 재갈을 물린 채 손발을 묶인 채 두들길 북도 상소할 권리도 없이 쉬쉬 눈
법정 스님이 길상사에서 입적하신지 8년이 지났다. ‘무소유’를 비롯해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버리고 떠나기’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아름다운 마무리’ ‘홀로 사는 즐거움’ 등에 담겨있는 짧은 글들은 스님의 깊은 사유에서 우러나온 정제된 언어를 담고 있어 불자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을 감동시키고 깨우쳐 주었다.1960~1975년까지 머물면서청정성 잃어가는 승가 향해“그러려고
두 인물이 코트와 구두를 벗지 않은 채로 그리고 한 사람은 모자를 쓴 채로 의자에 앉아 있는데 주지 스님(보경 보현, 寶鏡普現)은 그 앞에서 공손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진은 1953년 11월13일 대통령 이승만과 바로 전날 방한한 미국 부통령 닉슨이 서울 정릉동 경국사를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두 사람이 한국과 미국의 최고위급 인사이고 그들의 몸에 배어있는 서양식 매너로는 구두를 신고 방에 들어가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장면을 보면서 기분이 씁쓸하다. 요즈음 같으면 스님들이 이런 식으로 맞이하지도 않을 것
불국사는 중고등학생 시절 수학여행으로, 1980년대 이후 제주도와 그 뒤 해외여행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신혼부부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이기도 하다. 이때 어렴풋이 담아온 불국사의 이미지가 국민 대부분의 머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것이 ‘불국사의 본래 모습'일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불국사는 신라시대에 처음 세워진 이래 1000년 세월을 거치며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정부가 1969년 복원위 구성재벌 헌납으로 경비 마련해빈터에 무설전·회랑 등 복원관심보인 박정희 공사후 방문일제강점기 초기 고적조사보고서 기록을 보면
1996년 11월9일, 불연(不然) 이기영은 한국불교연구원 주최 국제학술회의에서 학자들의 경력과 학문세계를 일일이 소개하고 자신의 기조 발제를 마친 뒤 심근경색이 닥쳐 세상을 떠났다. 유학 시절부터 혼신을 다했던 불교 연구와 실천의 길을 가다가 이렇게 떠난 그에게 후학들은 ‘학술열반’이라는 헌사를 드렸다.1996년 국제학술회의에서학자들 학문 일일이 소개심근경색 닥쳐 세연 다해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추앙참선 수행 중 입적한 선사들처럼 심장 문제로 입원해있던 중 의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일시 외출하여 학술회의장에서 갑작스럽게 떠난 불연에게
1922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1944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수료한 불연 이기영(不然 李箕永)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제의 학병으로 징용되어 참전하는 고통을 겪었다. 1954년 유학을 떠나 벨기에 루뱅(Louvain) 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다가 불교학으로 바꾸어 불교 서지학의 대가인 라모트(E. Lamotte)의 지도를 받아 ‘불교의 참회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대불련에 대해 열정적 포교지금도 ‘아버지’로 존경받아원효사상 출판 학당 개설해원효의 대가라는 애칭 붙어1960년 3월 귀국한 불연은 여러 대학의 강의
1975년 6월, 이생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대원(大圓) 장경호 거사는 자손들에게 “개인명의 재산을 부처님 은혜를 갚는 데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7월10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사재 일체를 불교 진흥을 위해 써 달라”고 당부하며 헌납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9월 9일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이 사람은…이제 멀지 않아 삶을 마칠 것을 내다보고…남자로 태어난 것과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과 불교를 신봉하게 된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였습니다.…국가와 사회 그
2015년 9월 16일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석가탑 사리와 관련 유물(이하 ‘사리구’) 봉안식이 열렸다. 1966년 도굴 사건에 이은 석가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뒤 이리저리 떠돌다가 49년 만에야 본래 자리를 찾아 모신 것이다.불국사측 부주의 사리병 파손절과 다툼 최씨 폭로로 확인40여 조각 복원해 국보 결정국립박물관 옮긴뒤 불교계로 “충격 준 도굴-복원 공사–파손–사리와 다라니경 발견까지 : 소홀했던 복원 작업, 격분 뒤에 온 기쁨, 국보급의 사리”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전한 기사(‘경향신문’ 19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