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보이는 것은 그 전과 같지 않으리라.”정조 때 문장가 유한준(1732~1811)의 명언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를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언급하면서 보편화 된 말인데,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는 뜻이다.듣는 귀가 없다면 좋은 음악을 들어도 소음에 불과하다. 위대한 화가의 작품이라도 보는 눈이 없다면 하찮은 낙서와 다를 바 없다. 어떤 예술이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이에 더해 작품의 동기와 배경, 작가가 살았던 당시 사람
‘엿장수 중’ ‘판사 중’ ‘절구통 수좌’ 일제강점기와 근현대를 더불어 살았던 효봉(1888~1966) 스님의 별칭은 여러 개다. 스님의 별칭은 스님이 견뎌냈던 삶의 단단한 옹이들을 한마디로 웅변하고 하고 있다. 38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했으나 구산 스님과 법정 스님을 길러내고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던 우리 곁에 가장 가깝게 머물다 간 선지식이었다. 스님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스님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였다. 그러나 독립투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이후 참을 수 없는 양심의 가책으로 모든 인연을 접고 엿장수로 3
불교의 대승경전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경전이 ‘반야경’이다. ‘반야경’은 600권이나 되는데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반야경 577부에 들어있다. 600권 ‘반야경’은 공(空) 사상을 천명하고 있는 반야부 계통의 경전을 모두 집대성한 것이다. ‘반야경’은 대승불교의 골수를 담고 있는 경전이지만 내용이 워낙 방대해 경전 속에 담긴 사상과 내용을 한 줄로 관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책은 바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600권에 이르는 방대한 ‘반야경’의 핵심만을 추려, ‘반야경’의 종류와 요점을 소개하고, 사상의
불교는 마음의 종교다. 기도와 수행도, 그리고 모든 의식마저도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쓸 것인지에 방점이 찍혀있다. 마음을 강조하지 않은 종교가 없겠지만, 불교만큼 마음 그 자체를 중시하는 종교는 드물다.걱정과 번뇌, 분노, 탐욕 등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감정적인 모든 것들은 다 마음이 짓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만 잘 다스리면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들 평생을 마음수행에 매달리거나, 혹은 마음으로 인해 힘들게 사는 것 아니겠는가.불가(佛家)에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는
세계 불교도는 같은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지만 다른 언어와 글자를 사용하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방식으로 예배를 본다. 인도의 불교가 각 지역으로 퍼지면서 그 지역만의 독특한 불교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오랜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시나브로 변화한 것으로 북아시아 불교와 남아시아 불교, 티베트 불교가 확연히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중국화의 과정을 거쳐 중국불교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위한 토대를 쌓은 시기를 찾는다면 북위(北魏, 386년~534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민족 왕조였던 북위는 불교를 통한
붓다는 과연 전지자(全知者)일까? 많은 불교도들이 붓다를 일체지자(一切智者) 혹은 전지자로 이해한다. 일체지자 혹은 전지자란 ‘모든 것을 다 아는 자(The Omniscient One)’란 뜻이다. 만일 붓다를 전지자로 이해하게 되면 전지전능한 신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붓다는 스스로를 전지자로 말한 적이 없다. 붓다는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진리의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붓다는 오로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칠 뿐”이라고 강조했다.그러나 대다수 불자들에게, 특히
시간을 분초로 쪼개서 살다보면 잠시 쉴 수 있는 여유마저 빼앗기기 일쑤다. 요즘 현대인들이 자주 앓고 있는 질병이 번아웃, 즉 탈진 혹은 소진증후군이다. 번아웃이 되면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우울증과 자살충동까지 갖게 된다. 두통과 소화불량 등 몸 곳곳이 고장나는 것은 덤이다.이 책의 저자 또한 그랬다. 일이 주는 성취감과 보람 때문에 몸과 마음에서 보내는 신호를 참고 넘겨왔다. 그러다 주춤하는 순간, 한계에 다다른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아무리 쉬어도 피곤하고, 우울감은 해소할 길이 없었다. 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역시 번아웃, 소
다른 종교와 차별화 되는 불교의 정체성은 ‘출가’에 있다. 출가는 입산하여 불도를 닦는다는 의미인데 표면적으로는 가족, 세속과 완전한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는 불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러나 불교는 이로 인해 많은 공격을 받아왔다. 인도의 바라문 전통과 동아시아의 유교로부터 불효(不孝)와 불충(不忠), 인륜(人倫)을 저버린 종교로 매도됐다. 불교는 이런 비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항상 방어와 수세에 몰렸다. 그러다보니 힌두교나 유교적 윤리가 불교 안으로 스며들어 출가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는
“우리가 모든 생명 있는 것에 자비를 베풀 때까지는 우리는 평화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이 말은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슈바이처 박사의 명언은 실현가능성 없는 허공 속의 독백임을 알게 된다. 인류에 의해 파괴되고 착취당하는 지구를 보면서 그저 지구와 생명과 환경에 대한 작은 관심과 이해, 그리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만이라도 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게 된다. ‘함께 살아갈 인연’은 지금 이 순간 지구촌에 벌어지는 재앙과 같은 현상들에 대한 불교적 견해와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불교에서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들 감각으로 사물과 세상을 인식하고 어쩌면 진실이라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고구정녕으로 이들 감각이 진실이 아니기에 결코 집착하거나 매몰되는 것을 경계한다. 특히 ‘반야심경’은 이들 감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진실이 아니기에 공(空)임을 체득하면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고.독실한 불자로 대학시절 감각이란 무엇이며, 감각이 세상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깊이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중무장했던 중세유럽의 시대가 저물면서 현실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래적 자기, 혹은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다. 그러나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고민 혹은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작업이 깊어질수록, 알 수 없는 태어남의 원인과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실존의 진실 앞에서 불안과 괴로움은 필연적이다.인간이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힌다는 점에서 불교는 실존주의 철학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불안과 괴로움이라는 불교와 비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가 지은 동화에 ‘파랑새’가 있다. 어린 남매가 크리스마스 전야에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다 깨어나는데, 자기들이 기르던 비둘기가 바로 그 파랑새였음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음을 일깨우는 동화다. 수행과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수행은 일상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가능하다는 생각이나, 깨달음이 도깨비 방망이나 손오공의 여의봉을 얻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수행도 깨달음도 딛고 선 자리에서 시작되고 완성 되는 법이다.석암 스님의 책 ‘파랑새 창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