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절은 노지(露地)에 약사대불이 모셔져 있다. 조석으로 다기에 물을 올리고, 사시에는 마지(摩旨)를 올리지만 이곳에는 일부러 생미를 놓고 있다. 지난겨울, 며칠을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참새 몇 마리가 눈에 들어 와서 그 날부터 화단 안쪽의 돌을 헌식대 삼아 쌀 몇 주먹씩을 놓아주었다. 처음엔 며칠이 지나도록 입질이 없었다. 그러다 점점 없어지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여름에 접어들면서는 마지를 올리기 위해 통로의 문을 열고 나가는 시간쯤이면 수 십 마리의 참새들이 기다리곤 했다. 그렇다고 헌식대에 무턱대고 날아들지는 않았다. 가지의 높은 곳에서부터 몇 단계를 거쳐 내려앉고서야 먹이에 입을 댔다. 그리고 주위에 누가 있건 없건 한 번에 오래 머물러 있지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자비명상 여행을 다녀왔다. 천안 만일사에 이르니 오색단풍은 그윽하게 대웅전 뜨락을 장엄하고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새와 청량한 석간수의 맛이 뼛속까지 시리다. 오랜만에 젖어드는 자비스러운 기운이 온통 감각을 드러내 놓는다. 여러 수행자들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서 노래를 하고 모든 감각을 스스럼없이 열어 놓고 그대로 바라보는 수행을 하고 있다. 거친 감각과 기운을 신나는 노래로 헹구어 내고 난 다음에는 심체를 드러내는 플롯연주가 시작되고 있다. 하늘의 별을 보고 청량한 공기를 맛보며 온통 감각을 있는 그대로 살피다 보면 어느덧 더 이상 흐르지 않는 성품이 드러나는데 이제 여기에 일체를 회광반조 하는 수행이다. 우리는 누구나 깨달으려고 하지만 이러한 순수한 감각을 덮어두거나 드러내지 않
고대 페르시아의 카즈윈 사람들은 손등이나 어깨, 혹은 신체의 어느 곳이건 푸른 잉크로 서로에게 문신을 새기며 행운을 비는 관습이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이발사를 찾아와서 용맹스런 사자를 어깨에 새겨 달라 했다. 이발사가 벌겋게 달군 바늘에 잉크를 묻혀 찌르기 시작하자 그는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하는 거요?”“사자.”“어디부터 새기는 것이오?”“꼬리.”남자는 꼬리는 필요 없으니 다른 곳부터 새기자 했다. 이발사가 다시 몇 바늘 찌르기도 전에 그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번은 어디요?” “귀.” “귀가 없어도 사자는 용맹하오.”다시 시작, 이번에도 남자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디를 그리는 데 이리 아프오.” “배” “나는 배 없는 사자가 좋소.”이발사가 곰곰이 생각하다 바늘을 놓으며 말했다
단비가 오랜 가뭄을 떨치고 지나가니 숲에는 다시 세찬 바람이 불고 있다. 낙엽은 바람을 타고 철새처럼 먼 바다로 여행을 떠나고 산벚나무는 벌써 빈 몸으로 청정법신을 드러내고 있다. 모처럼 볼일이 있어 시내에 나갔더니 도심 거리에도 그윽하게 가을이 내려앉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길을 가리켜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업을 하는 거사님 댁에 들렸더니 요즈음 참으로 힘든 시간이라고 하면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한 세상에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그러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느냐고 했더니 오전에는 업무를 챙기고 오후에는 공장 뒷산에 올라가서 화두를 챙기는데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좌선을 하다보면 화두가 순일하지 못하고 금방 고요한 경계에 떨어져서 혼침에 들
뒷산 봉우리에 벌써 단풍이 내려오고 있다. 예년에 비하여 빠른 것은 아마도 극심한 가뭄 때문인 것 같다. 도량에는 타는 목마름 속에서도 국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고절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밭에는 마을 사람들이 메마른 땅에 물을 뿌리며 뙤약볕 아래서 양파를 심는 모습이 무척 힘겨워 보인다. 지혜로운 사람과 자연은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제 빛깔과 향기를 포기하지 않고 시절인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참으로 신비하고 경이로운 모습이다. 혜초 스님은 신라 성덕왕 3년(704년) 에 출생하여 16살 때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인도의 스님인 금강지에게 밀교를 배우고 그의 권유로 구법여행을 떠났다. 인도의 거친 자연과 낯선 사람들 속에서 목숨을 내건 험한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남아시아 넓은 사막을 횡단하고 히
전국 시대, 위영공(衛靈公)은 미동(美童) 미자하를 곁에 두고 예뻐했다. 어느 날 미자하는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전갈을 받고 급한 김에 왕의 수레를 타고 집에 다녀왔다. 허락 없이 왕의 수레를 타면 발뒤꿈치를 자르는 중형, 그런데 왕은 “미자하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미를 위해 월형도 두려워하지 않는다”하며 오히려 칭찬하였다. 또 한 번은 과수원을 거닐다가 복숭아를 따서 한 입 먹어 보고는 왕에게 먹어보라며 건넸다. 이때도 왕은 “충성심이 대단하구나! 복숭아가 맛이 있으니 제가 안 먹고 과인에게 주다니”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미자하는 점점 왕의 신임을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자하가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 왕이 지난 일을 떠올리며 노했다.“저놈은 언젠가 허락도 없이 짐의 수레를 탄 적이 있고, 또 먹다
돌탑 주변에는 꽃무릇이 한줄기 붉은 마음을 토해내고 있다. 마치 꽃술 하나마다 전 우주를 포섭하여 화엄세계를 연출해 놓은 듯 장관을 이루고 있다. 텃밭에는 배추와 무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둘러보는 재미에 더없이 넉넉한 저녁이다. 가을 산사마다 특색이 있어서 풍성하기는 마찬가지일지 몰라도 유달리 잘 정리된 텃밭에 채소가 자라고 있는 절에 가면 왠지 고향에 온듯이 포근함을 느낀다. 근대 한국 불교의 대선지식이었던 학명선사는 반농반선(半農半禪)운동의 깃발을 내걸고 철저히 정진했던 선각자였다. 스님께서는 내장사에 주석하시면서 선원청규의 제일 원칙으로 오전에는 경을 읽고 오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녁에는 참선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아 대중과 더불어 실천하며 철저히 수행을 하였다. 또한 조용히 앉아서 고요함을 지
사람마다 한권의 경전이 있는데(我有一卷經)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不因紙墨成)펼쳐보면 글자 하나 없지만(展開無一字)항상 환한 빛을 놓고 있다네.(常放大光明)『화엄경』 일본 교토의 오바쿠사에는 경판이 모셔져 있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의 목각판이라 한다.신도인 데츠겐은 목판에 불경을 새기는 불사를 하고 싶었다. 대략 7천장이 소요될 것 같았다. 그는 불사 자금을 모으기 위해 전국으로 화주를 나섰다. 어떤 이들은 많은 금화를 내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시일반의 동참이었다. 그렇게 십년이 지나자 대략의 자금이 모아져 일에 착수하려는 찰나에 ‘우지’강이 범람하는 일이 생겼다.(이곳은 지금도 녹차의 산지로 유명하다.) 데츠겐은 망설이지 않고 수재민들의 구제에 모은 돈을 써버린 후 다시 화주를 시작하였다.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이 떠난 적막한 도량에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온통 소리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다. 온갖 풀벌레 소리와 파도소리가 겹치고 있지만 반딧불이는 마치 지휘자처럼 이리저리 날며 소리 없는 소리로 묘음을 연출해 내고 있다. 잠시 펼쳐 놓았던 어록을 덮어놓고 삼매에 들어본다. 어느덧 일체 소리의 흔적이 끊어지고 나니 동산의 능선에는 달이 솟구쳐 오른다. 관음상 뒤 억새밭에는 수 없는 손들이 솟아올라 달빛을 맞이하고 있다.“누구네 집엔들 밝은 달, 맑은 바람 없으리(誰家無明月淸風).” 『벽암록』 달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다가 마치 큰 파도를 타는 듯이 구름을 넘어 해맑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천진면목을 훤칠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느덧 선실에도 하나의 달이 들어오고 나무마다
조과 도림(鳥 道林741~824) 선사는 항주 사람으로, 조과는 ‘새둥지’라는 뜻이다. 절 안에 있는 소나무의 가지가 휘어진 높은 곳에 좌선대를 만들어 놓고 참선을 즐겨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루는 고을 태수로 있던 당대의 대시인인 백낙천(白樂天, 772~846)이 찾아왔다. 그때도 스님은 그곳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올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스님, 위험합니다. 내려오시지요.”스님이 백낙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더욱 위험 하네.” 자신은 땅에 서 있고, 스님은 높은 곳에 있는데 오히려 자신이 위험하다는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스님의 뜻은 ‘티끌 같은 세상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가 평생의
가을비 지나간 들녘엔 벼가 점점 고개를 숙이고 영글어가는 모습은 성스럽기만 하다. 논에 물을 가두고 모내기를 할 때는 백화가 만발했고 강남 제비가 찾아와 곡예비행을 하며 집짓기에 바빴다. 볼이 불그스레한 과일은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이 있었기에 더욱 탐스럽고 투명한 하늘아래 제 빛깔을 뽐내고 있으니 한가위를 맞이하여 걸림 없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머지않아 여기에 싸늘한 기운이 더하고 백설이 휘날리면 더욱 숙성되어 맛과 향기가 진동하리니 어찌 좋은 시절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사계절이 뚜렷한 이 땅의 은혜이니 참으로 조상님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잠사경잠 선사가 어느날 산놀이를 갔다가 돌아오는데 제자가 어디에 가셨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답하기를 “갈 때는 풀섭 우거진 곳을 따라 갔다
『벽암록』은 선가의 문헌 중에서도 최고의 반열에 있다. 송 대의 설두중현(980~1052)과 원오극근(1063~1135)에 의해 완성된 이래 수많은 참선수행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설두는 운문종 계열, 원오는 임제종 계열로 둘 다 기질이 강한 촉(蜀)의 사천성 출신이다. 선은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도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전통적으로 선문에서는 궁극에 대한 섣부른 견해를 경계하는데, 이 책은 도리어 언설로써 그 난해한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지금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화두’, 또는 ‘선문답’이라 하는데, 공부인의 기량은 한마디 던져보면 드러나게 되어있다. 구산 큰스님께서는 언제 어디서건 물으시곤 했었다. 묵묵부답으로 있다 해서 감춰지는 게 아니다. 그 또한 값이 매겨진다. 고대 그리스 철
새벽 기운이 서늘해지고 귀뚜라미가 우는 것을 보니 어느덧 가을의 문턱이다. 섬에는 올 여름 유난히 비가 오지 않아 꺾일 줄 모르던 더위가 어젯밤 천둥 벼락이 몰고 온 장대비에 물러나고 말았으니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시생멸법(是生滅法) 그것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연기의 법이기 때문이다.생멸멸이(生滅滅已) 생멸이 바로 적멸인줄 깨달으면적멸위락(寂滅爲樂)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 위 게송의 유래는 이렇다. 석가모니가 아득한 과거 보살인행 시절에 설산동자라는 이름으로 해탈을 구하기 위해서 고행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제석천이 구도의 뜻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험악한 나찰귀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설산동자 가까이 가서 몸뚱이를 먹이로 바치라는 말을 했
인류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선수와 응원객을 위시한 관광객은 물론이고 세계 100여개 나라의 정상들이 베이징에 모여들었다. 잔치도 큰 잔치다. 이날의 개막식을 밤늦도록 지켜봤던 것은 중국인들의 문화의 역량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다. 준비 단계부터 관심을 끌었던 새 둥지 모양의 주경기장은 로마의 콜로세움 이후 가장 이색적이고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토테미즘(totemism)은 한 사회나 개인이 동물이나 자연 대상물과의 신비적 관계 또는 친족관계가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복합적인 관념이나 의식으로 인류의 정신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 많은 상징 중에 하필 새 둥지였을까? 새 둥지에는 새가 사는 법, 어쩌면 다시 비상하고 싶은 중화민족 염원의 발로가 아닐까
태풍 갈매기가 많은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지만 섬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예년에 없었던 가뭄이다. 볼일이 있어 폭염을 뚫고 방문한 시내에 있는 절에서 한밤중에 맞이한 천둥벼락은 마치 천지가 무너지는 듯 요란하다가 몇 시간 동안 장대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밤새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하늘은 아무런 흔적이 없고 여여한 모습으로 새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람의 성품은 마치 허공과도 같아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가 한결같아서 차별이 없는 오매일여이다. 허공이 밝음과 어둠에 응하지만 물들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성품도 깨어있어 작용할 때나 잠잘 때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범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쓰기 때문에 둘이라고 착각하여 고통 속에서 헤매고 깨달은 사람은 분명하게 알고 쓰기 때문에 자나 깨나 한결같다. 수
호피인디언에게 기우제는 신성한 기도빗속에서 촛불 든 이들도 ‘호피인디언’ 미국 북동부 애리조나 사막 지대에는 호피(Hopi)인디언들이 산다. 사회학자인 머튼(Robert K. Merton, 1910)은 그들의 기우제 풍습을 연구했는데, 하나의 문화가 그 사회를 위해 어떤 잠재적인 기능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1년 강수량이 2,500mm이상이면 열대다우림, 600mm이하면 숲이 자라기 어려운 초원지대, 250mm이하면 사막이 생겨난다. 비 한 방울 내릴 것 같지 않는 오지의 사막에 씨앗을 뿌리고 거두기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경작의 전통은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모래언덕의 경사면 아래는 바람을 피하기 좋고, 비가 오면 가장 많은 습기를 머금는다. 그곳에 옥수수, 콩, 호박을 심는다. 호피 인디언 사회의
촛불은 ‘마음의 소’ 찾으려는 몸부림깨달음 사회화 하려는 몸짓 계속돼야 한바탕 굵은 소나기가 바다를 지나가니 폭염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바로 청량한 세계가 드러난다. 이맘때쯤 점심을 먹고 나면 뒷산 절마당에는 소들이 가득했다. 방학을 맞이한 친구들은 소고삐를 풀어놓고 멱을 감으며 놀이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는데 어느덧 배가 불룩한 소들은 뉘엿뉘엿 지는 해를 따라서 산을 내려온다. 이때 집으로 향하는 행렬은 참으로 넉넉하고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절에 가면 벽화에는 어김없이 소 그림이 등장한다. 소는 사람의 본래 성품을 가리키며 따라서 생명의 본질을 상징하고 있다. 장대비 속에서도 촛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은 잃어버린 마음의 소를 찾으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그 동안 소를 찾으려는 나머지
현사 사비(玄沙師備, 835~908)스님이 대중 법문을 하였다. “여러 총림의 고승들이 모두 ‘사람을 제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하나, 갑자기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가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맞이하겠는가? 봉사에게 불자를 곧추세워도 그는 보지 못하며, 귀머거리는 일체의 말을 듣지 못하며, 벙어리에게는 말을 시켜도 하지 못한다. 만일 이들을 제접하지 못한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는 것이다.” 한 학인이 이 말을 가지고 운문 문언(雲門文偃(864~949)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절을 해봐라.” 절을 올리고 일어나던 학인은 스님이 주장자로 밀치자 몇 걸음 물러섰다.“너는 눈이 멀지는 않았구나.” 스님께서 가까이 오라 하자 학인이 다가섰다. “귀머거리는 아니구나.”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알았느냐
사찰은 잡철을 강철로 만드는 용광로난파선 같은 세상서 참된 섬 찾기를 포살 법회 참석차 모처럼 출가 본사를 찾았더니 쏟아지는 장대비는 더욱 성성하게 성품을 깨우고 떨어지는 자리마다 그윽하여 물듦이 없으니 여기가 정혜쌍수의 고향 조계총림이다. 많은 대중들이 법당에 함께 모여 묵은 허물을 참회하고 다시 범하지 않기를 발원하니 천둥은 일갈하고 대중들은 법비에 젖어 청정법신을 통째로 드러내고 있다. 여름 수련회 준비가 한창이다. 산사라고 해서 더위가 없는 줄 알고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쇠가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서 잡철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강철로 다시 태어나듯이 수련회도 마찬가지여서 세상사에서 찌들은 번뇌와 무명을 밝은 지혜로 돌이켜 전환하는 과정이다. 잠시 사자루 수련장에 앉아서 지도법사 시절을 떠올리
불편함 견디는 자세가 진리의 마음스스로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 『울지 않는 늑대』라는 책이 있다. 캐나다의 동물학자인 팔리 모왓(Farley Mowat. 1921년생, 캐나다의 자연학자 겸 작가)은 젊었을 때 캐나다 야생생물보호국의 연구에 참여했다. ‘순록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인간을 해치기까지 하는 늑대에 대한 조사’로 캐나다의 북극 지역에서 1년가량을 보내게 되는 데, 이 책은 바로 그때의 기록이다. 순록은 늑대에 먹힐 위험을 피해 목초지를 따라 하루에 50km의 속도로 여름동안 거의 3000km를 이동한다. 순록을 찾지 못하면 늑대는 굶어 죽기 때문에 이 둘은 일생을 쫓고 쫓기며 살아간다. 당국은 순록을 보호하기 위해 늑대의 개체수를 대폭 줄여주었다. 그런데 순록은 시름시름 생기를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