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브랜드위원회’가 떴다. 첫 보고대회에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했다. 정부는 앞으로 5년 안에 우리나라의 국가브랜드 순위를 세계 15위권으로 끌어올리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좋은 일이다. 대한민국의 국가 브랜드를 높이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해 발표된 국가브랜드 순위를 짚어보아도 그렇다. 국가 브랜드 1위는 독일이다. 프랑스, 영국, 캐나다, 일본, 이탈리아, 미국 순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은 조사대상 50개 국가 가운데 33위다. 누가 보더라도 낮다. 우리 앞에 중국은 물론, 폴란드, 체코, 이집트가 놓여있다. 대한민국이 세계 13위의 경제 규모를 갖춘 사실에 견주면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대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 절실할수록 문제의 고갱이가 무엇인가
뉴요커들은 뜻밖에도 그 바쁜 일상 속에서 웃음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험상궂은 표정을 짓는 경우는 드물었다.돌아와 서울 지하철에서 시민들의 표정을 바라보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 표정에서 찾은 것은 살기 아니면 절망이었다. 고개를 들어 타인을 바라보는 눈길에서는 살기가, 가만히 혼자 생각에 잠긴 얼굴에서는 무력감이나 절망감이 느껴졌다. 뉴욕 지하철의 모습과 대비하다 보니 그렇게 극단적인 인상을 받게 되었다.그때 서울 지하철에서 만나게 된 표정들은 분명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이며 내면 풍경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여전히 우울과 절망, 자포자기의 얼굴을 더 자주 만난다. 우울증의 기세는 악령인양 세계를 뒤덮을 형세다. 우울증으로 자식을 아파트 창문으로 던지는가하면 유명 연예인들까지
지난해 ‘승려노후복지법’이 종회에 상정되어 현재 계류 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 이를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눈치이며 언론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다.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 비구승단에서 수행자 노후 복지의 무한책임이 교단에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승려노후복지법’이 제정된다는 소식을 접하니 아쉬움이 남는 것은 웬일일까? 우리의 인간미 넘치는 상경하애(上敬下愛) 정신의 미풍양속이 버려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불교계가 장로 승려의 노후문제를 법으로 제정한다고 하니, 어느 신부님은 “우리나라 효의 마지막 보루가 불교였는데 불교계마저 법으로 노후문제를 강제화 한다하니 이제 어느 곳에서도 효를 찾을 수 없는 나라가 되는 것 아닌가?”라고 나에게 되려 묻는다. 이제 우리나라의 고령화문제
인생에는 하나의 기본 법칙이 있습니다. 주고받는 법칙이지요. 이러한 법칙 안에서 생각을 해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주고받는 것입니다. 서로가 말을 주고받고, 인사를 주고받고, 웃음을 주고받고, 사랑도 주고받고, 물건도 주고받고, 도움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면 인간은 메말라 살 수가 없으며 또한 사는 재미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주고받는다’고 말을 하지 ‘받고준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영어에서도 ‘Give and Take’이지 ‘Take and Give’가 아닙니다. 이러한 말의 어순이 곧 순리입니다. 물의 흐름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다른 사람에게 주고 베
말이 넘치는 시대다. 글도 넘친다. 신문과 방송만이 아니다. 책도 날마다 쏟아진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슬기가 깊어가지도 않는다. 그래서다. 말과 글의 홍수에서 새삼 불문(佛門)에 기대고 싶을 때가 많다. 탐욕에 사로잡힘 없이 맑은 눈으로 세상을 투명하게 뚫어보고 싶은 간절함에서다. 그럼에도 기대와 달리 불문에서 전혀 엉뚱한 ‘대답’을 듣는다면 어떨까. 되레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두루 알다시피 조계종 총무원은 서울 용산의 철거민 참사와 관련해 “교계 NGO 단체가 조계사에서 봉행하기로 한 시국법회를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한 까닭을 들어보면 가슴이 더 답답해온다. “시국법회라는 정치적 성격의 집회”는 바람직하지 않단다. 정치적 집회. 참 많이 들어온 말이다. 누구의 지청구인가? 바로 이명박 정권과
필자의 어머니가 절에 다닌 지는 오래된다. 그런만큼 어머니가 그간 들었던 법문들이 어머니의 인생 마무리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했다.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의 속옷 안에 주머니가 달려 있는 걸 발견했다. 손을 놀리는 것이 불편한 어머니가 손수 만든 것인데, 그 안에는 만 원짜리 지폐들이 꼬깃꼬깃 접혀져 들어 있었다. 자식들이 드린 용돈을 고스란히 그 속에 넣어 두었다. 저승사자에게 줄 노잣돈인데, 그게 없으면 저승 갈 때 무척 고생한다는 것이 어머니 말씀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해 재구성된 죽음과 저승길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죽음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물론 어머니의 죽음 관념은 우리 문화의 관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와 다를 바 없이 절을 지속적으로 참배해온 다른 분들도
우리나라 사회복지계는 현재 ‘大 변혁기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듯하다. 특히 노인복지분야의 경우 기존의 시스템, 그 동안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고 하겠다. 사회복지의 변화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요인은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며 지방분권 이양사업으로 인한 시설운영정책의 변화일 것이다. 국민연금이나 의료보험 재정문제 등은 모두가 이 문제와 연관되어진 이슈들이며 또한 국민의 삶의 질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국가의 과제이다.2008년부터 실시한 노인 장기요양보험제도는 노인복지 55년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요보호 대상자의 구제를 목적으로 운영하던 기존의 요양시설이 바야흐로 요양이 필요한 노인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돼 보편적 복지시대가 활짝 열
체중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처럼 기본에 충실한 것입니다.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기본’은 무시한 채 ‘기교’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입니다.비만으로 고민하는 40대 중반 남자가 의사를 찾아가서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선생님, 어떻게 하면 체중을 쉽게 줄일 수 있을까요?” 그러자 의사는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고칼로리 음식은 피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기막힌 처방을 기대했던 이 남자는 의사에 답변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선생님,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그걸 누가 모르나요.” 그렇지만 그 남자는 의사로부터 더 이상 어떠한 해결방법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체중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처럼 기본에 충실한 것입니다. 문제는 대다수의 사
새해다. 설을 맞으면 완연한 기축년이다. ‘소의 해’ 2009년에 한국 불교의 화두는 무엇일까. 그 화두를 감히 제시하겠다는 깜냥은 전혀 없다. 한낱 재가자에 지나지 않으면서 한국 불교의 화두를 들먹이기란 누가 보더라도 우스개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외람되게 쓰는 까닭은 있다. 한국 불교의 아픈 현실에 대해, 옷깃을 여미며 누군가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에두르지 말고 곧장 말하자. 지난 한 해, 한국 불교는 새롭게 중흥할 수 있는 큰 전환점을 맞았는데도 그것을 살리는 데 아쉽게도 실패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장엄한 범불교도 대회가 큰 시차 없이 여러 지역으로 곰비임비 이어지고, ‘이명박 장로 정권’이 저지르는 공안 탄압을 불교가 막아내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면, 그것은
종이는 사람의 생각과 정신, 문화 예술적 소양을 기록하고 담아내는 그릇이다. 따라서 그 민족의 정신문화와 예술적 수준을 알려면 그 민족의 종이문화가 얼마나 발달해 있느냐를 알아보는 것이 척도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4,000여년 전 부터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전해 내려오고 있고 최소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거나 불교의 전래와 맞물려서 종이를 만들어 사용해온 기록이 있다. 시대를 소급하여 올라 갈수록 종이는 귀한물건이다. 소위 문필능력이 있는 귀족이나 왕족 그리고, 절집의 스님들만이 종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절집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과 불화를 모시기 위해서 종이가 꼭 필요하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종이를 법장(法藏)이라고 하여 아주 귀하게 여겼다. 천수경에서 ‘개법장진언’을 하
필자는 요즘 한국 간화선 가운데 ‘사선적(邪禪的) 요소’에 대하여 천착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이른바 ‘오매일여의 환상’이다. ‘오매일여(寤寐一如)’의 본뜻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나 깨나 한결같이 참구하라’는 뜻이다. 상징적인 말로서 삼매와 같은 뜻이며, 또 오매불망과 같은 말이다. 이것을 화두참구에 적용시키면 ‘분별심을 갖지 말고 오로지 일심으로 참구하라’는 뜻이다. 닭이 정성스럽게 알을 품고 있듯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듯이, 그리고 어머니가 군에 간 아들을 생각하듯, 시집간 딸을 생각하듯, 화두일념이 되라는 뜻이다. 부단(不斷)히 화두를 상념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오매일여’인 것이다. 속담에 ‘자식이 죽으면 그 자식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는 말이 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일제고사를 거부한 젊은 교사 일곱 명이 전격 파면되었다.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지사(志士)의 기개’를 갖춘 교사들이, 느닷없이 치러지는 일제고사에서 ‘비교육적 저의’를 간파한 후 교육자로서의 소신을 갖고 항의하다가, 시험 당일 ‘현장학습’이라는 행동으로 의사표시를 한 것일 뿐인데 설득, 징계, 감봉과 같은 중간 과정을 일거에 뛰어넘어 ‘파면’이라는 극형이 언도된 것이다. 누가 봐도 도를 넘는 가혹한 처벌이었다. 청년실업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지 오래인 이 시대에 그것이 교사직이든, 사무직이든 어렵게 구한 정규직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생업전선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부패한 공무원이나 마약사범을 전격적으로 사형에 처하는 ‘어떤 나라’를 보고서 ‘개명한 지금 이 시대’에 아직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