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사람의 생각과 정신, 문화 예술적 소양을 기록하고 담아내는 그릇이다. 따라서 그 민족의 정신문화와 예술적 수준을 알려면 그 민족의 종이문화가 얼마나 발달해 있느냐를 알아보는 것이 척도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4,000여년 전 부터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전해 내려오고 있고 최소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거나 불교의 전래와 맞물려서 종이를 만들어 사용해온 기록이 있다. 시대를 소급하여 올라 갈수록 종이는 귀한물건이다. 소위 문필능력이 있는 귀족이나 왕족 그리고, 절집의 스님들만이 종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절집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과 불화를 모시기 위해서 종이가 꼭 필요하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종이를 법장(法藏)이라고 하여 아주 귀하게 여겼다. 천수경에서 ‘개법장진언’을 하
필자는 요즘 한국 간화선 가운데 ‘사선적(邪禪的) 요소’에 대하여 천착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이른바 ‘오매일여의 환상’이다. ‘오매일여(寤寐一如)’의 본뜻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나 깨나 한결같이 참구하라’는 뜻이다. 상징적인 말로서 삼매와 같은 뜻이며, 또 오매불망과 같은 말이다. 이것을 화두참구에 적용시키면 ‘분별심을 갖지 말고 오로지 일심으로 참구하라’는 뜻이다. 닭이 정성스럽게 알을 품고 있듯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듯이, 그리고 어머니가 군에 간 아들을 생각하듯, 시집간 딸을 생각하듯, 화두일념이 되라는 뜻이다. 부단(不斷)히 화두를 상념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오매일여’인 것이다. 속담에 ‘자식이 죽으면 그 자식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는 말이 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일제고사를 거부한 젊은 교사 일곱 명이 전격 파면되었다.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지사(志士)의 기개’를 갖춘 교사들이, 느닷없이 치러지는 일제고사에서 ‘비교육적 저의’를 간파한 후 교육자로서의 소신을 갖고 항의하다가, 시험 당일 ‘현장학습’이라는 행동으로 의사표시를 한 것일 뿐인데 설득, 징계, 감봉과 같은 중간 과정을 일거에 뛰어넘어 ‘파면’이라는 극형이 언도된 것이다. 누가 봐도 도를 넘는 가혹한 처벌이었다. 청년실업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지 오래인 이 시대에 그것이 교사직이든, 사무직이든 어렵게 구한 정규직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생업전선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부패한 공무원이나 마약사범을 전격적으로 사형에 처하는 ‘어떤 나라’를 보고서 ‘개명한 지금 이 시대’에 아직도 ‘
톨레랑스. 프랑스 말이다. 관용이라는 말이 있지만 어느새 보편화되어 있다. 프랑스 말이 많은 이에게 바투 다가오는 까닭은 아마도 프랑스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나라로 손꼽힌다. 공산당은 물론,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나선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은 이들이 망명하는 곳도 프랑스다.하지만 착각하지 말 일이다. 프랑스의 관용은 아무 원칙이 없는 게 아니다. 관용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 전제되어 있다. 가령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던 시기에 히틀러를 찬양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총살했다. 예외가 없었다. 가령 ‘천재작가’ 로베르 브라지야크는 레지스탕스활동을 했던 사람들마저 재능을 아껴 사면을 원했지만, 사형 당했다. 심
고려시대 나옹 스님의 출가 일화입니다. 소년에게 “무엇 때문에 중이 되려 하느냐”고 스승이 묻자 소년이 “삼계(三界)를 뛰어넘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고 말하자 요연선사가 출가를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나옹이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다음 게송을 지은 분으로 유명하지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물같이 바람같이 사는 것일까요. 욕심 없이 인연 닿는 대로 사는 것일까요. 저는 행자시절 계곡의 물줄기를 바라보다가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저렇게 흘러가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생겨서 물줄기를 거슬러 그 시원을 찾아 산 위로 올라 가 본적이 있습니다. 가다보니 물줄기는
어느 사회나 단체, 종교를 막론하고 개선해야할 점이 있다. 불교에도 교리, 사상적, 신행적으로 개선해야할 점이 있다. 오늘은 그 개선점에 대하여 좀 논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내생에도 불자이기 때문이다. 먼저 교리적인 방면에서 개선해야 할 점은 불교의 교리와 사상이 너무 번쇄하다는 것이다. 교리, 경전, 사상, 철학이 너무 번쇄하고 많아서 교리와 신앙 사이의 상충은 물론이고, 교리 간, 사상 간에도 상충이 심해서 신행생활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와 사상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무아’와 ‘공’이다. ‘무아’이고 ‘일체개공’이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론이기도 하지만 존재의 실상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다. 그런데도 신앙적으로 보면 내생과 윤회, 천도재 등이 압도하고 있다. 문제점을 제
절약이 미덕인 시대가 있었다. 흘러간 유행가처럼 아련히 기억되는 1960년대의 가난과 재건의 기치 아래, 절약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에 배인 습관이었다. 1970년대 초 ‘잘 살아 보세’라는 국민가요가 거리마다 들려오고 생산성과 수출을 늘리기 위해 정부와 국민은 한 덩어리가 되어 부지런히 뛰었다. 1980년대 들어서 수출이 흑자를 기록하며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서자 1990년대에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 국민정신을 이끌 진정한 지도자 하나 없이 국민들은 저마다 소비와 향락에 친해지고 더러는 낭비와 한탕주의에 빠져 들었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은 문화국임을 자처하면서도 건전한 공익의 발전보다는 인생을 즐기고 낭비하는 개인주의 세상으로 흘렀다. 물론 불이익과 불평등의
힘없는 사람들은 종종 벌레에 비유되곤 한다. 증권시장에 멋모르고 뛰어든 개인투자가들을 싸잡아서 개미군단이라고 부른다. 몇 달 전 촛불을 들고 시청 앞 광장에 수많은 인파가 모였을 때, 인터넷 토론방에서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용어가 가끔 눈에 띄었다. 벌레에 대해서나 쓸 수 있는 용어였다. 불매운동 주도자, 항명했던 전경, 조계사의 농성자 등 ‘이념가(理念家)’들이 거의 모두 체포되었다. 권력자의 눈에는 그들이 하찮고 성가신 미물(微物)처럼 보였을 것이다. 경주 동국대에 부임하면서 멀리 학교가 보이는 작은 아파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퇴임 후에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경주가 뽑혔다고 했던가? 사실 그랬다. 문화유적이 산재하기에 개발이 제한되어 돈벌이가 될 만한 것은 적다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경주는 사
억만장자가 금으로 가득 찬 가방을 소중히 들고 배에 올랐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거센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위기에 처했다. 승객과 선원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명선에 올라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억만장자는 바다에 뛰어드는 순간 생명을 잃었다. 그는 금이 든 가방을 몸에 묶고 뛰어내렸다. 우스개다. 하지만 19세기 영국의 날카로운 비평가 존 러스킨은 그 지점에서 날카롭게 묻는다. “억만장자가 금을 소유한 것인가, 금이 억만장자를 소유한 것인가?” 러스킨의 질문은 이 땅의 현실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가령 국내의 한 ‘유력 신문’은 지난 9월에 ‘신자유주의 특집’을 전면에 걸쳐 내보냈다. 주먹만 한 표제로 “작은 정부 큰 시장 지향… 결국 세상을 바꿨다”고 강
종교(불교)는 수행과 사회적 역할의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유지해야 한다. 수행이 자기 탐구와 청정성 유지에 필수적이라면, 사회적 역할은 종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사회성이 없는 종교는 종교로서의 의미가 없다. 불교나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 역시 사회성이 없으면 그것은 개인적인 가치일 뿐 무의미하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해야만 종교로서 가치가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바로 수행과 사회적 역할을 모두 갖춘 말이 아닌가? 그러나 오늘날 한국불교는 사회인식과 역사인식이 부족하다. 때문에 종교적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체계적인 수행도 없으면서 지나치게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고, 그나마도 공부하는 분들보다는 정치에 경도되어 있는 분들이 많다. 중생은 안중에 없고 온통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소식이었다. 한 탤런트가 자살을 하였다. 연예인의 세계는 마치 정글과 같다고 한다. 동료들과의 경쟁 속에서 일류로 등극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지위를 계속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한다. 융(Jung)이 말했던가? 사람의 외면과 내면은 정반대라고…. ‘화려함 이면의 외롭고 괴로움’이라는 그들의 애절한 삶을 더더욱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최진실의 충격을 수습하기도 전에 우리 사회에서 다시 지진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주식시장의 붕괴와 환율 폭등…. ‘투자’라는 미사여구에 현혹되어 평생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을 주식과 펀드로 쏟아 부었는데, 주가와 환율이 엮어내는 산술놀음의 요지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재산이 증발하고 있다. 10년 전, 경제위기 때 IMF 집행부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우
미국 월스트리트에 몰아친 ‘금융 허리케인’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적 금융기관들이 줄지어 파산하자, 미국은 7000억 달러를 ‘구제 금융’으로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유럽과 아시아의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실물 경제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래서일까. 더러는 경제가 어려워가는 상황에 불교가 지나치게 ‘종교 편향’만 물고 늘어진다고 눈 흘긴다. 심지어 종단 내부에서도 그런 목소리들이 솔솔 흘러나온다.과연 그러한가. 만일 지난 8월의 범불교도대회가 한낱 ‘종교 편향’의 문제만 제기했었다면 그렇게 많은 민주시민과 네티즌들의 지지를 받았을까? 아니다. 우리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듯이, 당시 범불교도대회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이번 대회는 종교화합과 국민통합을 위한 불교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