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스트리트에 몰아친 ‘금융 허리케인’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적 금융기관들이 줄지어 파산하자, 미국은 7000억 달러를 ‘구제 금융’으로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유럽과 아시아의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실물 경제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래서일까. 더러는 경제가 어려워가는 상황에 불교가 지나치게 ‘종교 편향’만 물고 늘어진다고 눈 흘긴다. 심지어 종단 내부에서도 그런 목소리들이 솔솔 흘러나온다.과연 그러한가. 만일 지난 8월의 범불교도대회가 한낱 ‘종교 편향’의 문제만 제기했었다면 그렇게 많은 민주시민과 네티즌들의 지지를 받았을까? 아니다. 우리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듯이, 당시 범불교도대회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이번 대회는 종교화합과 국민통합을 위한 불교인의
이 땅에 불교가 들어와 정착한 지도 어언 1630여년이 흘렀다. 불교는 한 때 국교로서 정치, 사회와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으며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으면서 민족의 정신문화 창달에도 깊이 기여를 해 왔다. 불교정신과 불교문화가 우리 겨레의 숨결에 깃들 수 있었던 것은 불교의 주체인 스님과 신도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승가의 일과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스님들의 생활태도는 격세지감을 넘어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옛 스님들은 불사나 사생활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급자족(自給自足)하는 정신으로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요즈음의 스님들은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쉽게 구입하여 쓰는 풍조가 만연되었다. 사소한 일상 생활용품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가을에 독서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신 여기저기서 학술발표회가 연례행사처럼 많이 열린다. 학술세미나는 (불교)학계의 학문적 수준과 연구성과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학계가 성숙되어 있을수록 발표와 질문, 토론 등이 매우 진지하게 진행된다. 분위기도 예의와 격조가 있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인격이다. 비록 청중으로라도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고 나면 마음이 흐뭇하고 분발심이 생긴다.그러나 때론 정반대로 진행되는 세미나도 있다. 발표한 내용이 논제와 어긋난다든가, 초점과 알맹이가 없는 경우, 주장하는 바가 정연하지 못한 경우엔 부실하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특히 연구소나 단체의 경우 발표자 및 토론자에게 지불되는 연구비 등 많은 재정을 들여
이 시대의 불교인들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가 있다. 불자들을 조직화하는 일이다. 이는 ‘자등명, 법등명’하라는 부처님의 유훈에는 어긋나는 일일지 몰라도 조직화 된 셈족의 종교(Semitic Religion)의 공격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정당방위의 방편이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태교와 같은 셈족의 종교는 ‘순수한 종교’라기 보다는 ‘종교의 이름을 내건 사회조직’이다. 독단적 이념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다. 전철이나 거리에서 ‘예수 지옥, 불신 천국’을 외치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6.25 즈음하여 붉은 완장을 찼던 공산당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했던 나치스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조직에 대한 이들의 충성심은 결코 종교심이 아니다. 척박한 땅에
마침내 ‘성시화 운동’이 갈 데까지 가고 있다. 울산에서 40년 넘도록 열려온 전통 축제인 ‘처용문화제’가 과녁이다. 울산시의 성시화 운동 본부를 비롯해 기독교연합회, 교회협의회, 문화연대 4개 단체가 시당국에 처용문화제 지원 중단을 요구했다. “무당인 처용을 믿고 따르는 특정 종교활동을 지원”한다는 게 이들의 ‘명분’이다.신라 향가 ‘처용가’는 울산 개운포의 처용암에서 헌강왕과 처용이 만난 설화를 밑절미로 한 노래다. 1967년부터 열린 축제를 두고, 처용이 무당이라며 특정 종교 활동이라고 강변하는 저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국적도 없고 문화를 바라보는 눈도 더없이 천박하지 않은가. 문제는 군사정권 시대에도 논란이 없던 처용 문화제가 왜 지금 갑자기 불거졌는가에 있다. 충분히 짐작할 일이다. 이명박 정
원효 스님의 『금강삼매경론』 말씀 중에 “무리지지리(無理之至理) 불연지대연(不然之大然)”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이치가 없는 것이 지극한 이치요, 그렇지 않은 것이 참으로 그렇다”는 뜻이지요. 이 말씀은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보라는 말씀이고, 우리 사는 세상의 매사를 뒤집어서 생각해 보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리하여 대(大) 긍정의 통시적인 지혜의 삶을 이루라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면 여름에 우박이 떨어지고 폭우와 폭풍 그리고, 극심한 가뭄과 지진 등등, 이러한 자연의 이상 기후현상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당장은 고통과 불행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의 균형을 잡기 위한 몸부림이며 자정운동일 뿐입니다. 그 혜택은 결국 돌고 돌아서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사회의
9월 9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최근 논란이 된 종교편향 문제와 관련해 “불교계가 마음이 상하게 된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더불어 “경찰청장은 불교 지도자를 찾아 사과하고 앞으로 이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을 전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잊지 않았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에 대하여 그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문제의 발단은 모두 청와대와 정부, 그리고 일부 목사들의 망언에서 비롯되었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공직자로서 공인으로서 언행을 극히 조심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왜 정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종교문제를 거론하느냐이다. 부처님 말씀에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고 했다. “입은 화를 자초하는 출입구”라는 것이다
얼마 전 TV에서 본 장면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취재하는 이스라엘의 한 작은 언론사를 운영하는 기자들에 대한 얘기였다. 서너 명의 기자들이, 중무장을 한 이스라엘 병사들이 지키는 초소에 도착하였다. 지척에 있는 곳인데 초병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시간을 끄는 바람에 기자들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도착하였다. 항상 그랬다고 했다. 그리곤 그 전날 있었던 이스라엘 공군기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취재를 시작했다. 몇 명이 죽었는지, 누가 죽었는지, 어디를 다쳤는지, 어떤 일을 하다가 다쳤는지, 지금의 심경이 어떤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울먹이며 그 모든 물음에 대답을 했다. 취재에 무척 협조적이었다. 그 기자들이 자신들의 처절한 고통을 널리 알리기 위해 취재를 하
이명박 대통령이 ‘불심 달래기’에 나섰단다. 사뭇 생색까지 낸다. 청와대 참모들에게 “공직자들은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종교 문제와 관련해서 국민의 화합을 해치는 언동이나 업무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단다.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말을 기자들에게 자세히 전했다. 대통령이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다고 판단했음직하다.하지만 어떤가. 대변인이 전한 대통령의 다음 말은 진실이 무엇인가를 또렷하게 증언한다. 대통령은 앞서 소개한 말에 이어 “이 같은 원칙은 내가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던 것이며 앞으로도 철저히 지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단다. 어떤가. 새빨간 거짓말 아닌가. 대통령 자신이 서울시장 시절에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 운운하지 않았던가. 청계천 준공식 때도 “하나님이 해주신 거라 먼저 목사님 모시고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흥미로운 여론 조사 결과를 발표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돈’이라고 합니다. 건강과 가족, 사랑, 수행 등 이런 것들보다 물질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 어떻게든 돈만 벌면 ‘성공한 삶’이라는 것이 정답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즈음 전국 베스트 가요는 기실 ‘돈타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자고로 우리는 못살아도 양심과 체면을 차릴 줄 알았던 민족입니다. 자식에게 돈보다는 정직한 삶을 살 수 있는 배움을 주었고, 콩 한쪽도 나눠 먹고 남의 신세를 겁내하며 행여 은혜를 입으면 각골난망하여 갚을 줄 알았던 우리였습니다. ‘짓는 대로 받는다’는 인과
국토해양부 대중교통이용정보시스템 ‘알고가’에서 고의적으로 사찰정보를 누락시킨 데 이어 총무원장 스님 차량에 대한 경찰의 검문사건이 터진 이후 정말 오랜만에 보기 드물게 우리 불자들의 일치된 단결심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런 단결심은 예전에 없던 일이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말이 있을 때도, 10·27법난 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금년 들어 정치, 사회, 교육 곳곳에서 노골적인 하나님 찬양과 종교편향으로 인하여 사실 우리 불자들의 마음은 상할 대로 상해 있는 상태다. 지나친 종교편향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지적은 대통령의 종교 신앙 여부를 떠나서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다. 이로 인하여 조계사에는 연일 불교폄하와 종교편향에 대한 항의집회가 열리고, 8월 9일에는 봉은사에서도 열렸다. 또
현재 정부의 요직에 오른 이웃종교인들에게 묻고 싶다. 중동을 포함하여 서구의 역사를 피로 물들인 종교분쟁의 역사를 아는가?11세기 말부터 근 2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명 높은 ‘십자군 전쟁’. 독일 인구 가운데 무려 3/4을 줄어들게 했다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30년 전쟁’.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에서 절정을 이룬 기독교도들의 유태인 학살.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 간의 처절한 종교분쟁.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살상을 할 경우 형법에 의거한 처벌을 받기에 유럽에서와 같이 타종교인에 대한 대규모 살육을 자행하지는 못했겠지만, 8.15 광복 이후 ‘우리민족을 해방시켜 준 은혜의 나라’인 미국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위력을 배경 삼아 우리의 전통종교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