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메아리친다. 여기서 ‘복’은 기쁨, 즐거움, 행복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이 단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해서 쓰지는 않는다. 지난해의 우울함과 어두웠던 마음을 툭툭 털고 일어나 막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전해주기 딱 좋은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정말 특별한 한 해가 될 거란 확신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한데 그 덕담이 그대로 들어맞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되돌려 보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복이란 원래 좀체 다가오지 않는 것이니 상호 이를 복창함으로써 어떻게든 그것을 불러들이겠다는 자기암시의 몸짓이라고 할까. 아무튼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으니 이 말에 시비를 걸 수는 없을 것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 말이 유효할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과 기술의 빠른 발전과 국제사회관계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누군가 백 년이란 시간을 두고 ‘국가교육정책’을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육이 ‘백년지대계’라고 강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변(變)’과 함께 ‘불변(不變)’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둘은 상호 모순 같지만 그렇지 않다. 변화란 불변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이며, 불변이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그 항상성을 유지하게끔 하는 것이다. 새로운 정부의 교육정책 구상은 변화를 강조한다. 그 구체적 대안
“남에게 예속되는 것은 모두가 고통이니라. 스스로 자기의 주인 되는 것은 즐거우니라.” -우다나 우리는 시계에 의해 표시되는 시간의 흐름을 일정한 것으로 인식하고, 이 흐름에 비추어 어떤 것은 빨리 움직이고 어떤 것은 천천히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동일한 시간의 단위에 그 물체가 이동하는 거리가 보다 더 많다거나 보다 더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1년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임의로 시계 바늘을 빨리 돌린다고 1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년이란 지구가 자신의 궤도를 따라 태양을 한 바퀴 회전하는 것인데 시계를 빨리 돌린다고 지구의 공전이 빨리 진행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2008년. 우리는 한해를 보내고 또다시 새해를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 진흙탕 속에서 치른 것 같은 대통령 선거전을 마감한 국민들은 이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 관한 뉴스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2013년까지 향후 5년이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관심에서이다. 역대 대통령 당선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항상 기대 속에 싹 튼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한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뀐다. 실례는 예외 없이 역대 정권에서 실증되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당선자 시절과 집권 초기에는 국민들로부터 60~80%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지율은 마치 수학 공식처럼 집권 6개월도 지나지 않아 크게 떨어져 말기에는 10 ~ 20%로 마감한다. 왜 그럴까. 국민들이 잠시(5년) 빌려준 권력으로 자기 주변사람과 친인척들로 주요 국정을 주물렀기 때문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용과 뱀이 함께 어울려 사는 도량, 이것이 한국불교의 역동성을 간직한 도량의 참모습이다. 용이 되고자하는 뱀은 끊임없이 자신의 허물을 벗으면서 이무기로 변화하고 이무기는 인욕과 인고로 이윽고 용이 되는 것이다. 용은 뱀과 섞여서 몸을 숨기면서 용트림을 기다리며, 여의주를 득하여 품어 굴릴 줄 알아야 하고, 여의주를 갖춘 용은 승천하여 천지의 왕래에 그리고 용사의 왕래에 간격이 없어 자유자재하여야 한다. 그래서 용이 곧 뱀이고 뱀이 곧 용인 용사불이가 성립되고 따라서 용사상생은 당연한 귀결이 되는 것이다. 근대 한국불교에서 꺼져가던 선풍을 중흥시키고 제방의 여러 선원들을 설립하고 납자들을 지도하던 경허 스님, 오대산 상원사에서 올곧은 종풍을 정립하고 조계종 초대종정으로 추대 받은 한암 스님, 그리고 스승
손 혁 재 경기대 정치교육원장 선거를 치르고 나면 가장 많이 나오는 평가 가운데 ‘뜻밖의 결과’라는 표현이다. 5년 전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당내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꺾고 후보가 되었을 때도, 대통령선거에서 ‘이회창 대세론’을 꺾고 당선되었을 때도 언론들과 전문가들은 ‘뜻밖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뜻밖의 결과’라는 평가는 바른 표현이 아니다. 정확한 표현은 언론과 전문가들의 ‘예측이 틀렸다’가 되어야 한다. 왜 선거 때마다 번번이 전문가들의 예측, 언론의 전망이 틀릴까? 우리나라 선거가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정치가 안정되어 있지 않은데다 워낙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선거는 유형을 나누기가 쉽지 않고 선거 하나하나가 다 새로운 특징들
연말연시가 코앞인데 주위의 관심은 온통 선거에 솔려있어 으례 하는 이웃돕기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나라의 5년 아니 10년 이상의 장래가 걸려 있는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신망과 덕과 능력을 갖춘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특정한 사고에 빠져 있거나 자신만의 종교에 빠져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후보를 선택하면 중도적인 입장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기에 신중히 선택해야 국론분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연말연시에는 자신은 물론 이웃도 돌아봐야 한다. 어떤 일을 함에 시작할 때는 계획을 세우고 끝날 때엔 반성과 평가를 하듯, 한 해의 끝과 시작 은 이웃을 돌봄으로 자신을 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보살은 온갖 중생 중 구호를 못 받는 자나, 갈 곳이 없는
정말 그랬다. 수유리 사거리 교통표지판에서 화계사의 영문이름이 또렷이 보일 때 가슴이 두근거리며 마치 인생의 긴 방황 끝에 찾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듯 잔잔한 흥분과 함께 마음 속 깊은 안도의 기쁨과 과거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 뒤섞여 화계사로 향하였다. 화계사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이러하였다. 그들은 멀리 유럽이나 미주지역,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찾아오는 벽안(碧眼)의 수행자들이었다. 그들에게 화계사는 한국에 있는 하나의 불교사원이 아니라 전 세계의 유일한 정신적 고향이자 귀의처였다. 화계사는 서울에 있는 여느 사찰처럼 산자락 끝에 있는 작지도 크지도 않는 평범한 사찰이다. 수려한 계곡이 받드는 것도 아니고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것도 아니며 평화롭게 산책할 수 있는 정원이나 숲이 수 십 만평 펼
손 혁 재경기대 정치교육원장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종교계가 정치에 휩쓸리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만 나타나는 양상은 아니고 선거 때만 되면 종교계에 선거바람이 불어왔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 종교의 일부 성직자들이 도를 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현 단계에서 당선이 유력한 후보가 매우 독실한 그 종교의 신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종교의 일부 성직자들이 설교나 공식 자리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 성직자는 이번 대선에서 그 후보를 안 찍는 신도는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겠다고 농반진반으로 협박을 했다는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그 후보 자신도 봉헌 발언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일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성직자들도 있다. 지난
덕 진 스님울산 정토사 주지 한 차례 추위 이후론 입동이 지났는데도 따뜻한 날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통령 선거를 40여일 남겨두고 나온 이회창 씨의 출마 선언으로 요동치고 있다. 각 당이나 이해관계가 얽힌 진영은 더욱 분주해졌다. 이러한 때에 출가 수행자이자, 한 사람의 불자이기도 한 필자는 조용하지만 간절한 바람을 전 불자들에게 피력하고자 한다. 얼마 전 조선일보 사장이 총무원장 스님을 방문하고 그간의 보도에 대해 해명하고 다시는 왜곡보도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돌아갔다. 사필귀정이다. 그러나 그러한 보도의 빌미를 제공한 교계내부의 갈등이나 이를 해결하려는 잘못된 방법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대중공사를 벌여 참회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청아 스님대전 자광사 주지 작금의 한국불교는 총체적 난국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그 해법을 찾아야하는지 막막한 상태이다. 부끄러움도 아픔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 하는 가히 뇌사상태라 할 수 있겠다. 1600년의 한국불교를 현재의 이러한 상태로 만든 책임론보다 이러한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얼마나 자주 발생될지가 오히려 더욱 큰 걱정으로 다가 온다. 마치 부모나 스승의 임종을 지켜보는 심정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불법의 지혜가 이 땅에서 다시 꽃피어오도록 불자들은 모두 마음과 지혜를 모우고 아픔과 고통을 나누어 그 해법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먼저 이러한 총체적 난국을 냉철하게 진단하여야 한다. 바른 진단에 의하여 바른 치료가 도출될 수
손 혁 재경기대 정치교육원장 얼마전 속리산 법주사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주최하고 불교인권위원회가 주관한 불교인권학교가 열렸다. ‘자비, 생명 그리고 우리들의 인권’이라는 주제로 열린 불교인권학교는 불교와 인권, 지구화 시대 평화문제와 생존권, 학교에서의 종교자유 문제 등을 다루었고 다른 종교 인권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불교와 인권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 불교경전의 말씀 어디에서 인권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우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오히려 인권과 관련되지 않은 것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부처님 말씀이야말로 2500여년 전에 나온 뛰어난 인권선언이 아니겠는가? 인권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다.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