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들은 누구나 자식들이 공부 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만중생의 어버이이신 부처님께서는 어떠실까? 부모의 마음에 진배없다. 팔만대장경을 남기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부처님 역시 그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할 때 한없이 기뻐하시며 자식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신다. 부처님께서도 마찬가지시리라! 그 누구든 예외 없이 열심히 정진하는 모든 수행자들을 지성으로 보살피신다. ‘천비장엄보호지 천안광명변관조(千臂莊嚴普護持 千眼光明?觀照)’라는 천수경의 일절처럼 천개의 팔로 장엄하신 부처님, 관세음보살님께서 가호하시고 보살펴주시며 천개의 눈으로 빛나시는 관세음보살님께서 두루 앞길을 비쳐주시며 살펴주신다는 것이다. 그뿐이랴! 화엄경 약찬게 라든가
우주는 무한한 가피로 가득 차 있다. 온통 가피인데 따로 무엇을 가피라 할 것인가? 온 세상은 축복과 경이로움으로 널려있다. 고통조차 가피인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의 인생은 진실로 완벽하다. 불완전 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만 어리석은 자의 견해일 뿐 모두가 인과이고 필연이다. 부처님의 뜻이고 가피다.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피하려 하지 말라. 자신의 유일한 심판자는 자신이 아닌가?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에게 부처님께 얼마나 진실한지 알 수 있다. 모든 苦와 樂은 스스로 초래한 것일 뿐 그 누구도 원망할 일이 아니다. 모두가 부처님의 따사로운 배려일 뿐이다. 날씨가 화창하다면 화창한대로 좋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다. 건강해도 좋고 병이 들어도 좋다. 병이 든 자가 뭐 좋을 게 있느냐고 묻는 사람은
기도의 가피를 성취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처님 세계에는 시간과 공간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시간과 공간은 나와 남이 존재하는 현실의 세계에서나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내가 있기에 남이 있고 그 사이에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시간이다. 나와 남이 없는 세계에 무슨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겠는가? 부처와 내가 따로 없는, 하나된 세계에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없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요,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이요, 일념만년(一念萬年)이다. 부처님과 하나가 되기만 하면 된다. 시간의 길고 짧음은 절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항상 지극한 정성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성을 다해야 해!”, “지성을
부처님께서는 평생에 걸쳐 쉼없이 가르침을 베푸셨다. 끊임없이 법을 설하신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모두를 끝없이 공부시키려 하신 때문이다. 열반 법문인 법등명 자등명의 가르침의 의미를 반추해 보라! 끝없이 법의 등불을 밝히라는 것 아닌가? 공부하라는 것 아닌가? 부처님께서는 법을 연마해 지혜가 자랄수록 더 큰 행복을 이룰 수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하셨다. 대장경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법의 연마와 수행은 긍정적 상념을 키우고 부정적 생각을 차단하는 지름길이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진정한 내면의 변화, 행복이 찾아든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우등상이 주어지듯 진정한 수행자에게는 부처님의 위대한 선물인 탁월한 가피가 주어진다. 가피의 길은 정성스러운 공부를 통해 가능하다. 수행을 통해 가능하다. 고집
우리는 본래 부처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중생들이 부처와 똑같은 지혜와 덕상을 지니고 있다 하셨다. 모두 나의 외동아들이라고까지 하셨다. 법화경에 집 나온 아들, 궁자의 비유도 등장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부처님께서는 “나란 없다”, “나를 버리는 길이 부처”라고 가르치셨다. 수행이란 “나를 잊는 것”, “부처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 부처님을 저버린 무명 중생들에 대한 가르침이 불교의 근간을 이루지 않는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왔기에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 같은 존재들이 중생인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 불안은 모두가 부처님을 등졌기에 초래되는 것들이다. 부처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 그 길은 두려움과 불안 공포를 떠나는 길이다. 부처님과 하나 되면
내일을 모르는 게 인생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하지 않는가! 그러니 사는 게 답답할 수밖에…. 어디 가서 물어볼 데도 마땅치 않다. 점쟁이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랜 직업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당 판수를 찾는다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가? 지은 업장이 두터우니 답답하기는 매 마찬가지. 혹 떼려다 혹 붙이는 예가 대부분이다. “네 남편이 죽네, 사네”하면서 거액의 굿을 하라든지 액땜을 하라든지 하면 약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막대한 금품을 요구해도 속수무책이다. 절에 다니는 사람, 부처님 믿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부처님을, 관세음보살을 안 찾고 엄한 곳을 헤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점쟁이 무당 판수들이 하나같이 부처님,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장사를 하지 않는가? 어떤 종교학자는 불교의 한 축을 지
우리의 몸과 마음은 사랑의 산물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부부간의 사랑이 그러하고 우리 몸의 모든 세포들 역시 그러하다. 수백조 개나 되는 세포들이 일사불란한 사랑의 시스템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은 존재할 수가 없다. 오장육부를 보라! 간ㆍ심ㆍ비ㆍ폐ㆍ신장 등이 각자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내면서 사랑과 지혜 속에 살아간다. 모든 장기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이 몸은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가 없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몸은 사랑의 현현물(顯現物)이다. 기도의 현현체이다. 서로 미워해보라!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에는 따사로움이 흐르지만 미움 가운데에는 냉기가 흐른다. 실제로 상대방을 증오하는 마음이 들 때 피가 얼어붙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가? 사랑이 식으면 싸늘해진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가? 화
드브로이(L.D Broigle 1892~1987)란 학자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스승으로 지칭된다. 드브로이는 전자파의 발견자로도 이름 높다. 1929년 노벨상도 받았다. 그의 이론은 브로이파(Broiglian Wave) 또는 물질파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주장은 ‘모든 물질은 파동을 갖는다’는 것이다. 전자가 전자파를 내듯 일체만물이 파동을 낸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일체만유가 소리 없는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예를 들면 오장육부가 모두 파동을 내고 모든 신체의 세포들이 파동을 낸다는 얘기다. 파동은 합성이 되는 것이어서 신체의 모든 파동을 합성한다면 그 사람 특유의 주파수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모양이 다르고 목소리가 다르고 일체가 다르듯이 각각 특유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과 수행을 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법당에 나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있는 것일까? 흔히 기도를 시작한 사람들,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들 가운데 갖가지 마장에 시달린다는 얘기들을 듣는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정말 마장이 많은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그럴 수 있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평범한 생활을 하면 서서히 마장이 나타나겠지만 수행을 하면 마장이 급속히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흡사 병을 치료할 때 병이 낫기 전 명현현상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정진하면 업장이라는 것이 부서져 나가면서 고통이 가중되는 원리와 비슷하다. 가만히 두면 서서히 무너지겠지만 열심히 의도적으로 부수려 한다
깨달음이 중요하기는 하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얘기들 한다. 보리도를 구하는 것이 먼저이고 중생구제는 그 다음인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부처님을 모시고 살다보면 고통스런 중생들이 밀려들게 마련이다. 지치고 곤고롭고 슬픈 그들은 누군가의 자애로운 손길이 자신들을 어루만져주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관세음을 천수(千手)보살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도 참선들이 중요하다고 난리들이니까 고통중생들은 교회로 성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상을 돌아보라.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는 중생들이 많은가? 병고에 시달리고 고통스럽고 아픈 중생들이 많은가? 절이 절 구실을 못하고 중이 중 구실을 못하니 불자들은 참으로 마음 의지할 데가 없다. 그래도 기가 막힌 일은 병원이 버리고 의사도 버린 병고중생들이 부처님 전에
내 마음이 나를 지켜보고 있듯이 부처님께서 항상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부처님은 무소불능(無所不能)이요 무소부재(無所不在)이시라 나의 말과 생각과 행위의 인과를 분명히 아신다. 씨앗 속에 열매가 들어있는 것처럼 결과는 원인 속에 들어있다. 말 한마디 던지는 순간 그 과보는 결정된다. 미래는 지금 여기 이 순간과 하나다. 사람들은 미래가 비둘기나 무지개를 타고 오는 것으로 착각한다. 미래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의 말이 씨가 되고 생각과 행동이 씨가 되어 그대로 미래를 만든다. 미래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이다.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다. 진정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장엄해야한다. 이 순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아름답게 숭고하게 장엄할 것인가. 일념즉시무량겁(
법화경의 가르침대로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면 마음이 곧 우주다.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아귀를 만들고 축생을 만들고 천인을 만든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 마음을 잘 닦아 깨달음을 이루는 사람은 그 힘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부처님께서 무량겁의 고행 난행을 거친 끝에 부처가 되어 우주를 두루 통하는 것도 모두 마음의 위신력에 의해서다. 청정한 마음이면 청정한 행위를 하게 되고 악한 마음이면 악한 행위를 하게 된다. 마음이 청정하면 자신의 우주가 청정하며 마음이 혼탁하면 자신의 주변이 더러워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마음을 으뜸으로 삼는 것이니 온갖 것이 모두 마음에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도 마음이 사는 것이다. 마음이 곧 운명이다. 마음이 우주와 두루 통해있기에 나의
수백조개의 세포가 모여 한 몸을 이룬다. 고립된 세포는 죽음을 의미한다. 부처님 말씀대로 우주 만물은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제망중중의 시스템이다. 우주는 하나요, 하나의 생명체다. 모든 생명체를 하나로 화합하여 만들어 내는 대자연의 합창은 장엄하다. 만유의 생명체들은 상호정보를 교환하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화엄에 보면 여래는 티끌 속에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해탈력으로 몸을 나투신다고 하셨다. 진정 원자, 전자 수준에서부터 세포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이 여래의 해탈력이 함께 하신다. 예일대의 유전공학자 H.S.Burr는 “세포들이 스스로 분열할 시기를 알고 생체가 성장을 멈추는 시기를 안다는 것, 그리고 각각의 형상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저장하는 점 등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했다. 말이
화엄에 보면 “허공은 부처님의 몸”이라 가르친다. 허공은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무한한 눈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무한한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 말 없는 허공이 무한한 생명의 바다라는 것이다. 허공이 부처님의 몸이시라면 죽어계시겠는가? 허공이 살아있는 세계이고 무한한 눈과 귀를 가지고 계시다면 우주의 모든 정보는 허공에 기록된다고 할 수 있다. 반야경의 가르침대로 허공은 ‘무한한 정보의 바다’이기도 하다. 허공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천수천안의 의미도 같은 맥락이다. 흔히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것도 일맥상통 하는 얘기다. 허공이 부처님 몸이시라는데 부처님께서 무엇을 모르시겠는가? 어찌 중생들의 간절한 염원을 알아차리지 못하시겠
관음경에 보면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원하는 사람을 보내 그의 원하는 바를 성취케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른바 32응신(應身)이 바로 그것이다. 진정 간절히 기도드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원하는 귀인이 나타나 그의 일을 달성케 하는가? 기도 얘기를 하다 보니 너무 신비주의로 흐르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 기도를 열심히 온몸과 마음을 던져 해 본 사람들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위신력이 기도 속에 있음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가?” 내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분명 선몽을 받고 법당 지을 땅을 샀다. 그런데 허가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날 수가 없는 땅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집 드나들 듯 구청과 시청을 드
미국에 유학간 아들이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 부모들은 영문을 몰라 애가 탔다. 백방으로 소식을 알고자했으나 알도리가 없었다. 그저 부처님 전에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 자식의 안녕을 빌 수밖에…. 일주일쯤 뒤 연락이 되었다. 너무 몸이 아파 길에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것이다.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데 “엄마가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는 모양을 꿈속에서 선명히 보았다”는 것이다. 진실로 기도의 위신력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것일까? 미국의 유명한 의학전문지 「메디컬 저널(Medical Journal)」에 실린 연구결과를 보면 기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우게 된다. 버드(R.C Byrd)는 10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병원 밖에서 올린 기도의 효과를 측정했다. 기도의 대상이 된 환자들에게
성불(成佛), 열반의 세계를 불교의 이상향으로 부른다.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가 불자들의 인사이고 ‘열반에 드셨다’는 표현을 스님들께 자주 쓴다. 성불을 위해, 열반에 들기 위해 수행을 하지만 성불이나 열반은 어떤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세계는 아니다. 본래부터 존재하는 세계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의 회귀, 바람직하지 못한 현실에서 바람직한 이상으로의 이행이라면 성불과 열반은 영원의 자리여야만 한다. 붓다가 인간세계를 고(苦)라고 했을 때는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 고가 아니라 모종의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를 제거할 경우 열반을 성취할 수가 있다 한 것이다. 성불이나 열반은 바람직하지 않은 원인을 제거한 수행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자리인 것이다.
포교를 하려고 중이된 것은 아니었다. 도망 다니다 몸이 너무 아파 스며든 강남땅이었다. 중 되기 전 수십 년 다른 종교를 믿었다. 부처님 인연 따라 도망자의 삶 가운데 중이 되고 보니 불교의 현실이 안쓰러웠다. 단 하루도 불교신자였던 적이 없었다. 타종교인의 눈으로 불교를 바라보게 되었다. 출가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접어두자. 강남땅에 들어와 불교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스님들이 신도들에게 부처님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랍고 또 의아스러웠다. 기독교를 보라. 가톨릭을 보라. 매일 매주 가르치지 않는가? 가르쳐야 불교 산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매일 가르쳤다. 기하급수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간절히 부처님 전에 기도를 올렸다. 얼마나 간절했는지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예불을 올릴 때 항상 지송하는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이다.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기에 예불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을까? 계를 잘 지키면 계의 향기가 구름처럼 우주법계로 퍼져나가 시방에 계신 무량한 부처님께 공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법당에 香을 피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능엄에서는 염불을 통해 향광장엄(香光莊嚴)을 하게 된다고도 한다. 사람마다 그들의 살아온 날들의 이력에 합당한 향기가 있다. “인생 마흔이 되면 네 얼굴에 책임을 져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얘기다. 직업에 따른 분위기가 있듯이 각자에게는 특유의 체취가 있다. 각자의 분위기나 체취는 상대방에게 말을 떠난 정보를 던져준다. 경제학에서 ‘그 나라 국민의 질이 그 나라 상품의 질을 결정짓는다’ 하는 것
구 소련 하바로프스크 생체장(生場)연구소의 치앙칸첸이 원격 무선 정보 전달 장치로 1991년 세계특허를 받은 생체장이론을 살펴보자. 이 이론을 통해 가피의 참된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모든 생명체는 적외선 경계대역에 해당하는 초고주파의 파동이 있는데 이 파동을 통해 생체내부나 다른 생명체간의 상호교류를 도모할 수 있다. 치앙칸젠이 만든 생체장이론 원격 무선 정보 전달 장치는 송신부, 제어장치, 송신시스템, 수신부로 구성돼있다. 송신부에 오리를 넣고 수신부에 달걀을 넣어둔 후 달걀에 오리의 생체자기장을 전사(轉寫) 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부화된 병아리들 중 (500개를 부화시켜 480마리의 병아리가 나왔다) 80%가 머리모양이 오리를 닮았고 70%가 오리의 목을 가졌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