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이스켄데룬. 입구를 겨우 가린 구멍 난 천막들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처량하게 펄럭였다. 척박한 모래언덕에 겨우 고정된 텐트 안에는 먼지 수북한 옷가지와 페트병 등 살림살이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빨래할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요. 냄새나고 더러워도 어쩔 수 없이 그냥 입어야 해요.” 무너지는 건물에서 목숨만 겨우 건진 유젤 할머니는 텐트에서 병마와 싸우는 남편을 간호하며 삶을 이어왔다. 그러나 남편은 한낮 무더운 열기와 새벽 추위 속에 점점 쇠약해졌고 결국 병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날이 점점
돌이켜보면 모두 불보살님 가피였다. 43일간 1167km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도 그랬다. 처음 동참의사를 밝혔을 때 주변에선 만류했다. 젊은 사람도 견뎌내기 힘든 험한 길을 왜 굳이 가느냐는 거였다.서울 전등선원 회주 동명(東明) 스님은 그 순례가 고난의 여정임을 잘 알았다. 칠순을 넘긴 지 몇 해가 지났지만 걷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문제는 속병이었다. 인도에서 물과 음식으로 고생한 얘기를 숱하게 들어온 터였다. 가뜩이나 장도 좋지 않아 덜컥 병이라도 걸리면 어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순례대중에 큰 폐를 끼치기
코로나19의 어둔 터널에서 벗어나 올해는 봉축다운 봉축을 할 수 있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했습니다. 올해 봉축 표어는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는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 부처님 세상, 정토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일 것입니다.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고 걸음걸음에는 연꽃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아기부처님은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하늘 위 땅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니, 삼계의 모든 고통을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신생아에 불과한 부처님이 실제로 이러했느냐 묻는
명훈 가피력1)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팔만사천의 큰 법보를 깊이 찬탄하며 진정한 불자되어 이 세상의 은혜를 갚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발원하나이다. 2) 불보살님들의 큰 원력과 자비하신 마음으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삼보귀의3)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절합니다. 4)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절합니다. 5) 부처님법과 율에 따라 실천·수행하시는 청정한 스님들께 기쁜 마음으로 절합니다. 반성과 참회6) 내가 보고 들은 것만 옳다고 고집하며 지내온 죄를 참회하며 절합니다. 7) 점잖지 못한 행동으로 상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참회하고 발원합니다.부처님, 저는 오랫동안 제가 가진 장애만 가장 힘든 줄 알고 많은 방황을 하며 어리석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부처님은 위대하신 분이고 저는 한낱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분별심 내며 발심을 미뤄 온 숱한 날들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장애인이라는 신세 한탄만 하고 살며 바늘구멍 하나 꽂을 자리 남겨두지 않은 옹졸한 마음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저는 스스로 장애인이란 자기연민에 빠져 보시를 하지 않으
삶이란 고통과 비탄의 진창에서 뒹구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영원한 열반에 이르신지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히 우리는 숨 막히는 슬픔에 몸부림치며 고통의 바다에서 유영한다.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어머니는 난소암 진단을 받으셨다. 구속된 내가 소식을 듣고 극심한 불안에 떨까봐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으나 결국 동생과의 전화 통화로 알게 되었다. 통화를 마치고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으로 운동장을 걸었다. 내 마음은 절박하고 숨 막히게 고통스러운데 명징한 봄빛이 쏟아지는 하늘은 너무나 파랗다는 것이 슬펐다. 정기법회
코로나19 팬데믹도 3년이 지나니 종지부를 찍는 것 같다. 움츠렸던 마음을 펼치듯 어린 새순이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 혹한 시련 속에서도 때가 되니 봄꽃들이 생명의 순간을 맞이한다. 인연의 고리는 연기되듯 한 철을 보답하고 홀연히 떠난다. 어느덧 봉사단체에서 포교사로 활동한 지 몇 해가 흐르고 있다.매달 넷째 주 금요일은 특별한 날이다. 스마트폰 알람 메시지에 마음이 설렌다. 신천둔치 걷기 명상이다. 저녁 6시50분, 어스름 하루해가 저물 즈음이면 약속된 장소에 600여명이나 되는 대구 지역단 포교사님들이 단복을 입고 집결한다. 참
이 날 아침도 나는 불보살님의 명호 아래 작은 향 하나를 사르며 ‘천수경’을 독송 후 일과를 시작했다. 2014년 4월3일, 남편은 퇴근 후 골프 연습실서 운동을 마치고 여느 날과 같이 저녁 식사 후 취침에 들었다.새벽 5시경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왼쪽팔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단다. 소파에 누워 기운을 못 차렸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CT부터 찍어보자 한다. 판독을 하더니 뇌출혈 증세가 보인다며 서둘러 119를 불러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보냈다. 몇 가지 검사를 한 다음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긴장이 감돌았다. 하늘이
부처님께 물어보고 따질 것이 참 많다. 그래서 부처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에 목말라 외로울 때는 염불하고, 괴로울 때는 기도한다. 부처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으로 아들의 죽음에 미쳐버린 끼사고따미를 깨달음으로 이끌었고, 99명을 죽인 무자비한 살인마인 앙굴리말라도 깨달음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깨달음은커녕 간절한 기도 하나 들어주지 않는 것일까. 부처님 보시기에 나의 믿음과 수행,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너무 작은 것일까. 도대체 대자대비는 무엇이며, 중생구제의 뜻은 무엇일까.대대로 부처님을 믿고
삼사순례를 가는 사찰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 되었다. 앙상한 가지로 매서운 겨울을 이겨낸 나무 끝자락에도 초록빛 새 생명이 싹트며 따스한 봄의 향기 속에 활기를 찾고 있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습 하나하나에도 위없이 높고 깊은 부처님의 법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해보며 마음 한켠에 묻어두었던 2013년 4월의 봄을 떠올려 본다.당시 나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평일에는 출근을 하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나만의 소확행(小確幸)이 있다면 일주일에 4
아들이 대학생, 딸이 수능을 앞두었던 때,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외도의 광풍이 몰아치니, 딛고 있는 땅은 그대로 싱크홀(sinkhole)이었다. 땅이 꺼지면서, 몸은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배신감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남편을 가정으로 돌아오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필요로 하는 자식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눈이 멀어 요지부동이었다. 나를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졌고, 삶의 지향점은 상실됐다.식욕이 달아나면서 물 한 모금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게 됐다. 깊은 우울이 나를 덮쳤다. 죽으
첫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가부장적 문화의 사회에서 젊은 나이에 4명의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에게는 가혹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정이라고는 알지 못한 채, 막내다 보니 어머니의 아픔이나 힘듦도 모른 채 철없이 살았다. 생계에 바쁜 어머니도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자주 가시던 절에 데리고 갔다. 오색의 등이 만개한 봄꽃과 어우러져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어린 나는 부처님을 향해 어머니를 따라 조그마한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했다. 어머니의 절하시는 모습은 비장하리만치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