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2005년 겨울은 아찔했다. 2005년 겨울 교통사고염불 공덕에 가피 입어세수 다할 때까지 염불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염불봉사를 나가던 찰나였다. 겨울이었고, 새벽이었고, 순식간이었다. 새벽길 나서다 봉고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내 몸은 저 멀리 튕겨져 나갔고, 차는 그대로 도망쳤다. 멀어져가는 의식을 부여잡고 번호판을 외웠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발목이 골절되고 머리는 여섯 바늘을 꿰맸다. 성난 들소처럼 달려온 차와 부딪쳤는데, 죽지 않고 그만하니 다행이었다. 가피였다. 신장님이 지켜주신 덕분이다. 하지만 그
스님 2명씩 5일 동안 집에 와서 염불을 해줬다. 불교어산작법학교 등서원왕생 염불 교육 수료안치실 시신 옆서 봉사할머니가 운명하고 5일장을 치를 때였다. 부모님이 생전에 다녔던 서울 도선사 스님들이었다. 49재도 도선사에서 지냈다. 저녁참으로 나온 비빔밥이 이제까지 먹은 비빔밥 중 제일 맛있었던 기억으로 남았다. 그만큼 부처님과 난 어렸을 때부터 깊은 연결고리로 묶여 있었다. 서울 화계사로 재적사찰을 옮긴 이유는 단순했다. 어디든 부처님 도량이었지만, ‘도선사 가는 길이 멀고 힘드니 화계사를 다니거라’는 아버지 유언 때문이었다. 당
대개 군법회는 도심에서 떨어진 부대 안 군법당에서 봉행된다. 부대 밖에서 먹던 음식이나 간식을 잊지 못하는 장병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인지 군법회는 간식에 따라 인원수가 크게 좌우되는 측면이 있다. 간식 경비 걱정이 되는 이유다.간식 등 각종 비용 걱정주위 불자 도움으로 해결부처님 제자 인연에 감사처음 1년 동안은 포교사와 법우들의 십시일반으로 유지했다. 서로 조금씩이라도 보태니 간식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마저 어렵게 되곤 했는데, 간식비가 떨어질 무렵이면 어디선가 지인이나 법우들이 등장했다.
절에 지극정성으로 다니셨던 할머니 영향이었다. 절에 다녔어도 예수재 몰라뒤늦게 공부해 포교사 품수부부포교사로 군법회 운영일찌감치 어릴 때부터 사찰 법당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일 때에 ‘반야심경’과 예불문을 달달 외웠다. 그랬으니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지내온 세월이 40년이 넘은 것 같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자연스럽다는 뜻의 법(法)자처럼, 부처님 가르침[佛法]은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면면히 흐르고 있다. 할머니 손잡고 법당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부처님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왔다.
봄가을 유난히 등산객이나 내방객 발길이 잦다. 아무래도 오랜 역사 속 풍파를 견뎌온 강화 전등사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하기 때문이리라. 전각·불화·설화 소개에 친절차수·합장·삼배 예절도 알려초심 잊지 않고 쉼없이 정진진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돼, 여러 차례 큰불이 나고 증축을 거쳐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 지어진 모습이 오늘의 강화 전등사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불, 약사전의 약사여래불, 명부전의 아미타불과 지장보살님 그리고 시왕, 31존상, 삼성각, 불화와 탱화, 설화, 문화, 건축물 등이 고스란히 남은 도량이 전등사다.
유년시절이 아련하다. 1996년 초파일에 불교 인연포교사 의무 되새기며 기도천년고찰 전등사 해설 매진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이른 새벽에 길은 정화수 떠놓고 매일 기도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 처음 부처님을 모신 작은 암자를 가본 것 같다. 불연을 더듬어 올라가다보니 날짜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곧 부처님오신날의 환희가 전국 각지 도량을 물들일 텐데, 운명처럼 내 불연의 싹이 튼 시점도 1996년 4월8일 부처님오신날이었다. 친구 따라 절에 갔던 게 인연이 됐다. 서울 조계사 불교대학을 졸업한 지인이 삼보에 귀의해서
수용자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걸까. 1999년 포교사고시에 합격한 뒤부터 광주교도소에서 교정교화활동을 하고 있다. 삼중 스님 책에 소개된 수많은 사례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스님처럼 다른 사람이 돌보지 않고 꺼려하는 곳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싶었다. 사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이라면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다는 나름 이유도 있었다. 상을 내지 않는 부처님 제자로 살고 싶었다. 나누고 베풀면서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 돌려받겠지’ 하는 마음이 일어날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전법현장이 교도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좋은 종교와 스승은 혼자만 갖지 말고 같이 만납시다.”야간 불교대학 다니며 공부포교사로서 가족 전법 발원소년원·군부대서 법회 지원이 말 한마디가 지금 나를 있게 했다. 아내는 보살이었다. 내가 불자이자 포교사의 길을 걷게 된 이유가 아내였다. 아내는 큰아들 돌 전부터 절에 다녔다. 신심이 깊었다. 아들을 업은 채로 절을 했다. 왜 저렇게 부처님을 찾아가는지 그땐 몰랐다. 그때 꺼낸 말 한 마디가 “혼자만 알지 말고 같이 만나자” 였다. 절과 부처님에게 성큼 다가갔던 계기는 큰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였다. 원효사나 증심사
어렸을 때, 집 근처에 유명한 교회가 있었다. 부처님처럼 살고 싶단 열망뜨거운 초발심에 병원 포교첫 마음 새기고자 늘 기도부활절에 받았던 예쁜 달걀이 기억난다. 중학교 시절, 매주 경건회에 참여하고 시편을 외우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아이의 그림을 보며 나도 저런 모습이고 싶다는 간절함도 있었다. 딸 4명 중에 3명이 사찰학생회인 화랑단 활동을 했는데 맏이인 나만 유독 교회를 나갔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철이 들 무렵부터 매년 초파일마다 직접 절에 가서 등을 달도록 했다. 그 말에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엄마의 권위가 있었다. 그
“오늘 아침에 가셨는데요.”언니 둘 먼저 보낸 어머니병 잦던 자식 업고 병원행병원 포교하며 마음 헤아려완화병동 간호사의 말을 뒤로하고 병원문을 나서는 마음이 허전하고 아프다. 요즘 회자되는 “뭣이 중헌디…” 라는 말이 헛헛하게 새어나온다. ‘어제 왔어야 했는데….’ 가고 옴에 끄달리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지만 그래도 가고 옴은 화려하게 마지막을 불태우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아름답고도 허망하다.남편 고통을 생각하면 얼른 보내야 하겠지만, 이렇게라도 곁에 있는 것이 좋아서 잡게 된다고, 그래서 남편에게 죄
두 번째 문수보살님도 질문으로 다가왔다. 휴가를 내고 매주 봉사활동명상지도자 자격도 취득해대학 불교동아리 활성 발원‘자비와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요?’ 질문의 숨은 의도는 불교가 좋으냐 아니면 이웃종교가 좋으냐 하는 것이다. 자비가 사랑보다 더 좋다는 것을 말해야한다는 부담감이 확 밀려왔다. 상대를 깎아내리는 네거티브전략은 당장 좋아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효과가 반감된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사랑과 자비는 크게는 같다고 할 수도 있지만 굳이 구별해야한다면 사랑은 조건부이고 자비는 무조건이다. 사랑은 나를 사랑했을
새벽 5시. 조용히 일어나 불단에 촛불을 밝히자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따뜻한 빛이 관세음보살상 주위를 감싼다. 다기에 청수를 담아 올리면서 마음속으로 발원한다. 조계산 송광사로 마음출가이후 13년 간 새벽 108배충국 성불사 장병들 전법‘아금 청정수 변위감로다.’ 향연(香煙)이 허공을 향해 가늘게 흔들리며 춤추듯 승천을 시작하고 나는 좌복에 이마를 조아리며 일 배에 일 배를 더해간다. 조계산 송광사로 마음의 출가를 하던 날부터 시작한 108배는 13년의 시간을 지나다 보니 이제는 습(習)이 되었다. 처음 108배를 시작했을 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