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를 설하는 대표적인 경전은 ‘과거현재인과경’이다. 이 경은 석가모니부처님이 과거세에 지은 원인과 현세에 받은 결과에 대해 제자들에게 설한 전기적(傳記的) 인과경이다. 4권으로 구성된 인과경은 과거 보광불(연등불) 재세 시에 선혜선인(善慧仙人)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기 위하여 지은 선업을 말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선혜선인은 “원수이거나 친한 사이이거나 한결같이 평등하게 대하면서, 보시로써 가난한 이들을 섭수하고, 지계로써 무너뜨림을 섭수하며, 인욕으로써 성냄을 섭수하고, 정진으로써 게으름을 섭수하며,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뜻
탁상시계, 낡았지만 잘 손질된 모자, 금이 간 자기 주전자, 흑백의 가족사진. 남루한 살림의 풍경이 보인다. 가족사진을 깨끗한 천에 싸서 가방에 넣는 손 위에 다른 손이 겹친다. 여자는 가방을 싸고 있는 남자의 곁에 서 있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떠나야 한다. 도시는 음험한 괴물의 그림자로 가득 차 있고, 그 도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먼저 낯선 나라에 자리를 만들고 아내와 아이를 불러야 한다. 대사 한 마디 없이 연필선으로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은 그들 가족의 불안과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남자가 기차를 타고 떠난 뒤
‘화엄경’의 두 번째 품(제6권)인 ‘여래현상품’은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보리도량에 모여 든 대중들의 문법에 광명을 놓아 모습을 나타내셔서 설법을 해주시는 품입니다.마음속으로 질문을 드린 청법대중들은 보살들을 포함한 일체 세간의 주인들입니다. 그들은 다 이미 해탈한 분들인데 다 같이 부처님과 보살세계에 대하여 40가지 질문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입과 치아사이[面門齒間] 그리고 양미간(兩眉間)으로 광명을 놓아 설법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여래현상의 경계는 십십무진(十十無盡)으로 장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그런데
한국불교의 수행풍토를 복구하기 위해 봉암사 결사를 추진하여 승가의 수행공동체 정신을 올곧게 실현하려고 애썼을 뿐더러, 절연이속(絶緣離俗)이라는 그 출가적 삶의 지향점을 발원하고 몸소 실천해 나갔던 사람이 성철(性徹) 스님이다. 그는 또한 미추와 신분, 선악과 빈부를 떠나 모든 사람들 누구에게나, 기고 나는 모든 생명들 그 어떤 존재에서나 간직되어 있는 불성, 본래 부처로서의 성품을 강조하고, 이 불성에 눈을 띄우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화두 참선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그것은 자기를 바로 보기 위한 몸짓이었다.“자기를 바로 봅시다./
제13 여법수지분 첫머리는 “세존이시여! 이 경(經)을 어떻게 이름 해야…”라며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는 말로 시작된다. 그런데 경전 안에 ‘이 경(經)…’이란 말이 나올 수 있는가? 심지어 부처님의 답변이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며…”라고 되어 있으니 분명 경전의 이름을 말한 것인데. 그러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경전이고 어느 부분이 경전을 객관적으로 언급한 내용인가? 과연 그렇게 나뉠 수 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의문은 불경(佛經)이 성립된 역사적인 배경이 성경이나 논어 등 여타 경전류의 성립배경과는 다르
명상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감정을 모두 없애려고 열심히 노력하거나 아니면 어떤 감정도 온전히 느낄 수 없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명상은 우리가 그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 필요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고,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감정을 더욱 정확하게 자각하고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감정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육체적 고통을 경험할 때 느끼는 빨라진 심장 박동, 거친 호흡, 울음 또는 떨림과 유사하게 흥분하거나 당황하거나 불안할 때 경험하는 증폭된 정신상태’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기에는 이런 거친 감정만 있는 것이 아
52장에서 ‘예불’과 ‘염불’수행으로 ‘정토왕생’한다는 것은 스스로 ‘진실한 자성’을 깨달아서 ‘청정’한 마음으로 ‘성불’하는 것이라고 설했다. 다시, “범어에 ‘아미타(Amitā)’는 ‘측량 할 수 없는 광명’ ‘셀 수 없는 수명’이라고 하며 온 세상과 과거‧현재‧미래에서 첫 번째 부처님 ‘명호’다. 과거 수행 당시에 ‘법장비구(Dharmākara)’다.‘세자재왕(Lokeśvararāja)불’의 시대에 ‘48원’을 하기를 “내가 ‘깨달음’을 이룰 때 ‘셀 수 없는(asāṃkh ya)세계’의 모든 천인들로부터 아주 작은 날짐승과 기
한 승이 조산에게 물었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조산이 말했다. “나 조산은 그런 상황과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면 세상에 출현한 이후에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그 상황은 나 조산과 다른 모습이더구나.”조산은 조산혜하(曹山慧霞, 中曹山和尙, 曹山了悟)로서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1)의 제자이다. 본 문답의 핵심은 조산은 부처님이 출세하기 이전과 다른 모습이라는 것과 부처님이 출세한 이후는 조산과 다르다는 답변을 이해하는 것이다. 곧 표현된 답변 그대로 그리고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최근 불교는 전국 각지에 사찰과 포교당을 지어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불교신도의 확산과 불교 부흥을 위한 수승한 움직임이고, 보다 많은 이들에게 불교를 알려주기 위한 자리이타의 실천행이다. 그러나 종종 사찰이 커지고 신도가 늘어남에 따라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다른 사찰보다 더 큰 사찰을 지으려 하고, 대도시에 사찰을 지어야만 좋은 불사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도 인원수가 사찰의 평가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점은 최근 불교가 지나치게 불사의 확산과 경제적인 면을 추구하면서 발생한 것들이다.
승가가 오염되는 이유가 스님들이 돈을 만져서라는 주장은 일견 맞기도 하고 일견 틀리기도 하다. 해결책으로 스님들은 수행에만 전념하고 사찰재정은 재가자가 관리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문제의 핵심을 꿰뚫지 못한 것이다. 스님들이 돈을 만져서 문제라면 늘 본받자고 하는 대만불교는 더 오염돼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인구는 우리나라 절반 밖에 안 되지만 승가나 스님들에게 보시되는 시주 금액은 훨씬 많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님들이 돈을 만져서 승가가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 계율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인과응보에 대한 철저한
세상에는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 혹은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과연 깨달았을까? 우리는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교는 맹목을 싫어한다. 맹목이란 사전적 정의를 보면, ‘이성을 잃어 적절한 분별이나 판단을 못함’, 혹은 ‘주관이나 원칙이 없이 덮어놓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무비판적으로 어떤 것을 추종하는 자세를 말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건전한 비판이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여기저기 맹목적 추종이나 비난만이 난무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기에 맹목적 삶의
기도하면 정말 이뤄질까? 기도를 많이 한 불자도, 초보불자도 확신이 잘 안서는 분이 많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니 믿음이 점점 엷어져 기도하는 불자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자본만능주의 시대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라 하더라도 일을 많이 해 생산능력이 좋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영역에 있는 아이디어·지식·지혜·운영능력·투자능력 등에 따라 재산의 양이 결정되는 사회이다.기도의 사전적 의미는 절대자에게 소원을 비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의 기도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 소
뿌연 매연이 눈을 따갑게 한다. 수많은 차들이 내 앞을 지나간다. 익산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은 원광대사거리에서 나는 지난주부터 피켓을 들었다. 아침 8시에서 9시 무렵, 대중의 출근길목인 이곳에서 직접 호소하기 위해서다. 저번 주는 ‘1.5℃를 기억하자’, 이번 주는 ‘기후 위기⇒인류 멸종’이다. 말 대신 행동으로 나서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기후 문제의 원인은 드러났다. 화석연료사용으로 인한 온실가스 현상이다. 한 마디로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 북극의 만년설과 빙하가 녹고, 호수에서 물고기가 떠오르며, 남태평양의 작은 나라가
현재 조계종 3대 숙원사업을 꼽는다면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10․27법난 피해에 대한 명예회복 사업과 신도시 거점사찰 건립, 불교문화재 수리・보존 센터 건립사업이 아닐까 싶다. 외형적으로 보면 모두 하드웨어지만, 그 안에 채워질 소프트웨어를 생각한다면 매우 중요한 일이다.10·27 법난은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자행한 일련의 사건이다. 그리고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중들의 신성한 기도처이며 수행처인 부처님 도량을 군화발로 짓밟은 만행은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불행한 기
코로나19 영향으로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많은 분들이 국내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름휴가뿐 아니라 당분간 해외 출국은 여러 사정상 쉽지 않은 상황이니 여행을 좋아하고 즐기는 분들에게는 국내밖에 선택지가 없을 것입니다. 외국의 낯선 풍물과 사람, 음식 등 우리와는 다른 문화를 접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답답한 상황일 것입니다.해외여행이 어려워지니 TV나 유튜브 등에서 외국 여행지를 감상하는 ‘랜선 투어(Line tour)’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직접 가볼 수 없으니 눈으로 대리만족이라도 즐기고 있다고 합니
중국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500년 넘게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에 철학적 사유 방식과 논증이 크게 발달해 사상의 개화기를 맞았다. 또 도교가 성행하며 수행(修行) 경험도 쌓았다. 불교가 전래되자마자 선교(禪敎) 양면에서 상당한 수준에 오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불교라는 고차원의 학문 혹은 종교를 섭취할 만한 토양이 잘 갖춰져 있었던 덕분이었다.하지만 세상일이 논리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오랜 전법 과정 동안 개인이나 승단 입장에서 큰 난관에 맞닥뜨리거나 도저히 해결해 낼 것 같지 않은 어려움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그때마다
동심의 어린이가 공원에 와서 소녀상 앞에 섰다. 동심은 공원에 소녀상이 왜 세워졌는가를 안다. 일본이 이웃 나라인 한국 국토를 빼앗고, 국권을 빼앗았다.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두고 한국 사람을 짓눌렀다. 그러다가 욕심을 더 내어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태평양전쟁이다. 그들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 했다.‘미영 격멸(米英擊滅)!’이라는 전쟁 구호를 내세웠다. 미국과 영국을 쳐서 없애자는 이 구호를 ‘베이에이 게끼메쯔’라 읽었다. “조선 사람을 짓눌러라. 짓누르면 나온다!” 소리치면서 총독부 하수인들이 집을 뒤졌다. 뒤져서 빼앗아
제137칙: 충심을 간직하여 자기 본분을 다하라. “충(忠)”, 이 글자의 함의는 일체 행위를 꿰뚫는다. 충심을 간직하면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가족과 화목하고 친구와 신의를 지키며, 고아를 불쌍히 여기고 난민을 구호하며, 인민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며,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충심이 있으면 속이지 않고 속이지 않으면 자기 본분을 다하며, 본분을 다하면 자기 본분에 속하는 일을 스스로 실행하기에 힘쓸 것이다. 겉으로 대충대충 하면서 실제로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눈속임은 결코 없을 것이다.
연상호 글, 최규식 그림의 ‘지옥’은 알레고리(allegory) 작품이다. 미학자 발터 벤야민은 알레고리를 설명하면서 “각각의 별들이 이어져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밤하늘에 하나의 점으로 빛나는 별들이 선으로 이어져 별자리가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알레고리 작품은 지시 언어가 아닌 비유 언어에 기초하고 있고, 보는 이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지는 특성이 있다.‘지옥’은 불특정 소수인 수취인에게 지옥에게 간다는 사실과 남은 시간을 알려주고, 그 고지된 시간에 수취인이 흉측한 괴물에 의해 살해된다는 설정으로 시
진리논쟁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늘날도 이 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과연 진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맛지마니까야 ‘짱끼의 경(Caṅkīsutta)’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부처님께서 오빠사다(Opāsada)라고 하는 꼬살라국의 한 바라문 마을을 방문하시자, 짱끼를 비롯한 바라문들이 부처님을 뵈러 모여들었다.짱끼를 중심으로 원로바라문들이 부처님하고 대화하고 있을 때, 16세의 젊은 바라문 까빠티까(kāpaṭika)가 궁금한 점이 많아 자꾸 끼어들었다. 그러자 부처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