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처님의 도는 원융무애하여 이것과 저것이 없으며, 친근함과 소원함도 없으며, 귀하고 천함도 없으며, 현명하고 어리석음도 없다. 사성(四姓)의 어느 계급에 속한 사람도 도에 들어오면 동일하고 평등하다. 그러니 어찌 금이나 옥 때문에 모든 흙이나 돌을 버릴 수 있겠는가? 영리한 자는 쉽게 통달하고 아둔한 자는 많이 막힐 뿐이다.”(신규탁 번역)1910년 용성 선사는 위 내용이 담긴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쓴다. 귀원정종이란 근원으로 돌아가는 바른 종교로 풀이할 수 있겠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전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주로
보살들의 해탈문과 게찬은 ‘화엄경’ 제5권에서 보입니다. 보살대중 가운데 먼저 보현보살의 해탈경계가 펼쳐집니다. 보현보살이 부사의한 해탈문 방편바다와 여래공덕바다에 들어가서 해탈문을 성취하고 불세계를 찬탄합니다. 지금까지 세주들은 각기 하나의 해탈문을 성취하였는데 보현보살은 10개의 해탈문을 성취하였습니다. 즉 일체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고 중생들을 조복하여 생사에서 끝까지 벗어나게 하는 해탈문 내지 일체 보살의 수행하는 법과 차제문을 나타내 보여 일체지의 광대한 방편에 들어가는 해탈문 등입니다.보현보살이 열 개의 해탈문을
인생은 결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때로는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고 때로는 힘들고 괴로운 일도 있다. “삶은 불만족의 연속이다”라는 경전의 말씀이 있다.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부른다. 한문으로 ‘인토(忍土)’라고 번역한다. ‘참고 견뎌야 하는 세상’이란 뜻이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뜻하지 않은 삶의 난관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내가 지은 인연의 흐름’이라고 본다. 그리고 내가 지은 업보의 숙제와 빚을 끊임없이 닦아 나가야 한다.중생이 살아가며 등에 짊어진 업보의
출가 수행자의 삶을 우리는 위대한 포기라는 말로도 설명한다. 세속적 권력, 부, 인간관계, 가치 등을 모두 포기하는 삶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포기를 누구의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기에 ‘위대한 포기’인 것이다.단순히 출가가 아니라 ‘출가 수행자’라고 하는 말에서 그 비장함과 엄중함을 느끼게 된다. 비구는 빨리어 ‘빅쿠(bhikkhu)’를 음사한 말로 ‘걸식 수행자’란 의미가 된다.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위로는 해탈을 구하고, 뭇 사람들의 복전이 되는 존재가 바로 비구인 것이다. 소나 꼴리윗사
제9 일상무상분 말미에서 수보리는, 아라한이 되었어도 아라한이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은 상(相)에 집착하는 것이기에 그 어떤 아라한도 자신은 아라한이 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고 부처님께 말씀드린다. 그리고는 그 실례로서, 여래께서 수보리 자신을 무쟁삼매를 성취한 자들 가운데 으뜸이라 말씀하셨는데 정작 자신은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기에 여래의 말씀이 참될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우리나라 말로 옮겨놓고 보니 수보리 자신이 자신의 일을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상(相)을 가진 것이 되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심장병 전문의 존 자마라 박사팀이 관상동맥 질환이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명상이 이들의 심혈관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를 했다. 놀랍게도 8개월간 명상을 한 환자들은 러닝머신 테스트를 할 때 흉통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이 대조군에 비해 12%나 더 높은 강도에서 시작됐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러닝머신 테스트를 하는 동안 명상 그룹은 심장이 받는 스트레스를 암시하는 심전도 변화가 시작되는 시간이 18%나 지연된 반면, 대조군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명상과 심혈관 건강에 관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동맥벽의 두께 변화도 발
34장은 “‘허깨비(幻)’인줄 알면 ‘방편’을 짓지 않는다. ‘허깨비’를 떠난 것이 ‘깨달음’으로 ‘점차’도 없다”이다.‘원각경’에서 “‘허깨비’같은 ‘삼매방편’으로 깨닫게 한다”고 한 내용이다. ‘허깨비’란 ‘무상’해서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금강경’에서 “모든 법은 ‘꿈’ ‘환’ ‘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고 한 것이다. ‘즉리(卽離)’란 일과 이치가 둘이 아닌 것이 ‘즉(卽)’이고, 다른 것이 ‘떠남(離)’이다. ‘근원, ○’을 깨달으면 ‘해탈’이고 ‘부처’이니 ‘돈오돈수(頓悟頓修)’다. ‘방편(方便)’이
대수화상이 한 승을 데리고 길을 가다 거북이를 보았다. 승이 물었다. “일체중생은 살집 속에 뼈가 들어있는데, 이 거북이는 어째서 뼈대 속에 살이 들어있는 겁니까.” 대수가 짚신을 벗어서 거북이 등에 올려놓았다. 그 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대수법진(大隨法眞, 834~919)은 속성이 왕(王)씨로서 사천성 출신이다. 장경대안(長慶大安)의 법을 이었고, 촉주(蜀主)로부터 신조대사(神照大師)라는 호를 받았는데, 왕노사(王老師)라고도 불렸다. 선법의 가르침을 흔히 격외도리(格外道理)라고 한다. 그것은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중생
코로나19 이후 우리의 일상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형태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어느 곳에 가든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을 피하게 되었고 어디를 가더라도 반드시 마스크와 소독제를 챙기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불필요한 외출은 국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삼가는 사회적 풍토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회현상과 더불어 새롭게 생겨난 것이 영상매체를 통한 일상의 소통과 교육이다. 코로나19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외출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존재들이기에 그러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면
“저는 계는 잘 지키지 못하면서 좀 크게 변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이것은 약간 뒤바뀐 생각이 아닐까요? 계를 잘 지키면서 공부하다보면 저절로 때가 오련만 결과에 대한 욕심이 앞서는 중생심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질문 속에 답까지 다 들어 있지만 조금만 보태보자. 불교에 입문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삼귀의 오계를 받는 것이다. 불교를 공부한다고 스스로 말해도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그저 불학(佛學), 즉 불교를 학문으로 공부할 뿐이지 부처님을 닮으려고 그분의 행을 따라 배우는 학불(學佛) 불자라고 할 수는 없다.부
발심하자마자 바로 출가한 행자는 불교 공부 하는 수요일이 제일 즐겁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일과 속에서 수요일만 기다린다고 하니, 대견하고 기특합니다.연기법과 ‘모든 것이 변한다’는 주제의 강의를 듣고, 사는 것이 참으로 허무한 것이 아닌가 하며 묻습니다. “어제 강의 들은 신도님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삶이 억울할 것 같습니다. 결혼이나 자녀, 사랑의 약속들 모두 변하고 덧없는 것이니 허무할 것 같습니다.”저는 웃으면서 “그래서 다음 시간 강의를 꼭 들어야 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한 시간 동안
“나는 누구인가.” 불자라면 누구나 들어 보았을만한 물음이다. 일상에서는 묻지 않을 질문이지만, 불자는 이 물음이 가지는듯한 어떤 심오한 깊이를 헤아리려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현대분석철학은 원칙적으로 답변이 불가능한 것 같은 심오한 질문은 실은 개념적 혼동이나 논리적 오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예외가 아니다.나는 누구인가.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Who am I?”인데, 미국인에게 이 질문을 하면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까? 기억상실
코로나19는 지금도 심각하지만, 미래를 예측불가능하게 한다는 불안심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문명의 한계, 그중에서도 종교는 자신의 존재감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하고 있다. 실제 자본주의가 폭주하는 동안 종교는 손을 쓰지 못했다. 지난 200~300년 동안 인간의 욕망과 함께 무질서도 크게 확산됐다. 1·2차 세계대전 같은 대규모 전쟁, 빈익빈 부익부 증대, 지구환경의 악화, 사회적 증오와 갈등 등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행복의 감정 또한 물질적 풍요에 반비례하고 있다. 필자도 참여한 원불교환경연대10주년 기념포럼에서 홍기빈 칼폴라니
막막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은사 홍윤식(洪潤植) 교수님의 병환을 듣고 찾아갔지만, 병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부고를 접하고 말았다. 급히 달려가니 예전의 적막감은 어디로 가고 장례식장은 많은 조문객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 접촉이 강조되는 요즈음이다. 특히나 병원, 장례식장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고 꺼리는 일들이 일상화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장례식장은 고인의 마지막을 추모하는 이들로 가득한 것이다. 아! 홍교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도 정을 많이 뿌리고 다니셨구나!
방역당국과 의료진들의 활약으로 그동안 잠잠해지던 코로나19가 아쉽게도 클럽이나 노래방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계속 실천해야하는 마당에 밀접시설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방문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연락처를 제대로 남겨놓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니 더욱 걱정이 됩니다. 연휴를 맞아 클럽을 방문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창 혈기 왕성한 시기에 몇 달 동안 학교도 가지 못하고 집에만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을지 짐작됩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의 젊은이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재일동포의 삶을 다룬 일본영화 ‘박치기’의 주제곡으로 한국에 알려진 후, 양희은, 적우, 임형주 등이 불러 유명해진 북한노래 ‘임진강’의 후렴 가사이다. 1958년에 발표된 이곡은 북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의외로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는 ‘제2의 아리랑’이라고도 불릴 만큼 애창되고 있는 곡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남과 북을 흐르는 임진강과 분단선을 오가며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를 소재
우리나라 속담에는 개미가 많이 등장한다.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을 칭찬할 때에 ‘개미처럼 부지런한 사람’이라 한다. 부지런히 일해서 크게 이루는 일을 ‘개미 금탑 쌓기’라 한다. 개미에게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점이 많다. 개미는 부지런하다. 이것을 사람이 배워야 한다. 사람은 개미로부터 협동을 배워야 하고, 질서 지키기를 본받아야 한다.이러한 개미는 지구촌 어디에나 떼를 지어 살고 있다. 그 종류는 5천 종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만 100여종이 살고 있다. 개미의 일가족은 수천이다. 일개미·수캐미·여왕개미의 계급이 있다. 개미
제117칙 : 사욕을 품지 않으면 순수한 앎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성인께서는 천하가 영원히 태평하고, 인민이 언제나 안락하길 원하여 특별히 대학(大學)을 지어 방법을 열어 보이셨다. 장구를 열어 말씀하시길,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다.” 비록 명덕은 사람마다 각자 구비하고 있지만, 망념을 극복하고 반성 관찰하는 방법이 없어 명덕은 환과 망, 사욕에 가려져 현현할 수 없고 수용을 얻지 못한다. 명덕을 드러내는 방법은 망념을 극복함에 있다. 망념을 극복하는 공부의 순서는 수신(修身),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
네이버 웹툰에 연재 중인 d몬 작가의 ‘데이빗’은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작게 태어난 까닭에 어미의 젖도 물지 못했던 데이빗은 농장주의 아들인 조지의 생일선물로 안겨지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다. 데이빗은 놀랍게도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의사 전달만 했지만, 나중에는 조지와 자유롭게 소통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데이빗은 돼지인가? 사람인가?”라는 화두를 갖게 된다. 말(言)은 인간의 전유
고려가 우리 역사에서 불교가 가장 성했던 시기이기는 했어도 사리신앙에 관한 한은 정보의 밀도가 그다지 높지 않고 빈 칸이 많아 아쉽다. 역사 자료의 많고 적음과 역사의 이해도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료의 부족이 정밀한 연구에 걸림돌이 되기는 한다. 그래도 몇몇 장면들을 통해 고려시대 불사리 봉안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건 다행이다. 특히 고려 왕실에서 불사리 봉안에 유난히 비중을 두었던 모습이 눈에 띤다. 고려가 건국한지 30년이 지난 948년, 정종(定宗)이 궁궐을 나와 지금의 개성시 독암동 탄현문(炭峴門)을 지나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