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라고 하면 사람들이 갖는 선입견 중의 하나가 산속에 은둔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과연 불교는 산속에 은둔하는 종교일까? 조선조 500년에 걸친 숭유억불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불교가 수행의 가르침이다 보니 세속을 멀리하는 모습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실제 경전을 보면 숲속에서 수행하는 수행자의 이야기나, 욕망의 대상으로부터의 떠남을 설하시는 많은 경전들이 있다. 그래서 이를 통해 불교를 탈속적인 종교라고 흔히들 생각하기 쉽다. 탈속이란 글자 그대로 세상을 떠난 것을 의미할까?그러나 우리가 또한 경계해야 할 것 중의
‘금강경’ 제9 일상무상분에 성문승(聲聞僧)을 수행계위에 따라 넷으로 분류하고 각각을 다시 향(向)과 과(果)로 나눈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언급되어 있는데, 둘씩 짝을 지어 넷이 되기 때문에 사쌍(四雙)이라 하고 통틀어 여덟 계위이기 때문에 팔배(八輩)라고 한다. 특정한 순간에 어디로 향하도록 방향을 틀게 된 것을 향(向)이라 하는데 그 마음은 오직 한 번만 일어나며, 방향이 정해져 나아가다 얻은 결과를 과(果)라 하는데 그 마음은 반복해서 일어난다. 향(向)은 범어로 마르가(mārga, 道, 길)이므로 도(道)라고도 일컫는다.우선
인류가 진화하는 동안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반응하는 일이었다. 기분 좋고, 배부르게 먹고, 편안하게 쉬는 것 등 즐거움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습격을 피하거나 공격하는 것 등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생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반응이었다. 생존에 위협을 느꼈을 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위기 반응이 바로 ‘투쟁-도피(fight or flight)’ 반응이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은 비상사태가 되면서 팽팽한 긴장 상태인 ‘투쟁-도피’ 반응
31장 본문에서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 성문‧연각)’이다. ‘번뇌’가 ‘생하지 않는 것’을 ‘대열반(大涅槃)’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 내용은 ‘대반열반경’에서 “‘번뇌’를 ‘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지 않는다. ‘번뇌’가 ‘생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한 것이다. 초기경전 ‘잡아함경’에서는 “‘열반’이란 탐·진·치 등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 상태이고, ‘8정도(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념‧정정진‧정정)’를 행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해서 ‘4법인(일체개고·제행무상·제법무아
조주가 승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일찍이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 승이 말했다. “없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차나 마시게.” 또 다른 승에게 물었다. “일찍이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 승이 말했다. “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차나 마시게.”삶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일상의 모습 그대로였다. 차를 마시는 것 그 자체야말로 조사선의 가풍에 가장 철저한 행위이고 인간의 꾸밈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은 신참이건 구참이건 누구를 막론하고 차를 권하였다. 그러나 차를 입에
얼마 전 다시 강원도 고성에 큰 산불이 발생해 수많은 재산피해와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안타까운 뉴스를 접했다. 한순간의 방심이 불러온 산불이라는 재난은 수십 수백 년을 가꾸어온 자연을 훼손시키고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준다. 게다가 산불의 원인이 쓰레기 불법 소각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소식에 한 사람으로서 자연에게 너무나 창피하고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재앙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이뿐만 아니라 지난해 4월 강원도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은 인근 5개 시, 군에 특별재난지역이 선포될 정
아는 스님의 부탁으로 삼귀의·오계에 관한 글을 사찰 단체밴드에 올린 적이 있다. 수계법회를 앞둔 신도들이 열정적으로 읽어주었고 솔직한 댓글로 필자를 분발시키기도 했었다. 그때 어떤 분이 “계를 지킨다는 것이 어렵고 의무감으로 생각되면서 부담스럽습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이것은 삼귀의와 오계 수행지도를 할 때 자주 듣는 이야기이기도 하다.계율이라는 단어는 일단 듣기만 해도 속박 혹은 구속의 기분이 들고, 잘 지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 생기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속박은 자유를 구속한다. 남녀 간의 애정도, 부모 자식 간의 사
라브랑시가 위치한 중국령 내의 입지와 전각 위에 얹힌 지붕이 마음에 걸렸다. 법당을 장엄하느라 기와를 얹었을 테지만, 그 모양이 중국적이라 의례에도 중국적 영향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티베트 임시정부가 있는 다람살라 맥그로간즈의 남걀사원을 방문해 의례와 ‘참’에 대해 조사했다. 산골짝 협소한 공간의 남걀사원은 도량의 규모와 의물이 갖춰지지 않아 참을 할 형편이 못됐고, 근년에는 참을 지도해 주던 노스님마저 입적해 설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히말라야를 넘어 라다크로 향하게 됐다. 라다크로 가는
초기불교에서 강조되고 있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brahamā-vihāra)’은 ‘범천과 같은 거주처’, ‘신과 같은 삶’ 또는 ‘신성한 거주처’ 등으로 번역되는데, 대단히 훌륭한 마음상태, 고결한 마음상태, 거룩한 마음상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브라흐마-위하라(brahamā-vihāra)의 원래 의미는 ‘범천의 주처’라는 뜻이지만 ‘압빠마나(appamāṇa, 無量)’ 또는 ‘압빠만냐(appamañña, 無量)’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장아함경 제23 구라단두경에서는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범행(四梵行)’
신라 ‘중고(中古)’ 시기는 23대 법흥왕대부터 28대 진덕여왕대까지 5세대 6인의 국왕이 재위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 ‘중고’ 시기를 새로 연 인물은 법흥왕의 아버지인 22대 지증왕이었다. 지증왕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즉위년조에, “성은 김씨,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혹은 지도로(智度路), 또는 지철로(智哲老)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왕력조와 지철로왕조에는 지증왕의 이름을 지철로・지도로・지대로, ‘영일 냉수리비’에서는 지도로(至都盧)로 표기되는 등 약간의 글자 차이를 보여줄 뿐이고, 동일인물이다. 지증왕의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진다 싶더니 조금씩 해이해진 틈을 타 또다시 우리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간 환자 발생이 없다고 하니 괜찮아졌으려니 생각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이 느슨해져 이런 사태가 또 발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평소 ‘나 하나쯤 안 한다고 뭐 어찌 되겠어’라는 생각이 많은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번 이태원 사건으로 다시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혼잡한 출퇴근길엔 이제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으면 탑승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조치를 한다고 합니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 발휘되어야 할 것입니다. 평소
최근 모 TV방송에 ‘꼰대인턴’이라는 제목의 코믹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둘이 모여 복합어가 되기에는 서로가 낯선 ‘꼰대’와 ‘인턴’의 조합에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니 ‘갑을체인지 복수극’이다.한때 잘 나가던 시절, 부하 직원들에게 갑질을 일삼는 꼰대 끝판왕이었던 A는 다니던 직장에서 밀려난 후 시니어 인턴으로 겨우 재취업에 성공한다. 그런데 그를 부하직원으로 맞이한 새 직장의 상사인 B부장은 A가 자행한 꼰대 갑질의 희생물이 되어 갖은 수모와 설움을 당했던 바로 그 인물! 상사와 부하직원의 위치가 뒤바뀐 상황, 이제 어떤 일이 펼
가끔 인간의 지성에 경이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해석이 정반대이거나 분분함을 볼 때가 그렇다. 각자의 입장과 소양의 차이가 존재하는 한 똑같은 견해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없는 이유도 동일하다. 보다 객관적이려고 노력은 하지만 ‘완전한 객관’은 관념에서나 존재할 이상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옳을 수 없으며 너는 항상 나쁠 수 없다.우리가 객관적이고 옳은 논리를 주장하기보다 차라리 “나의 말에는 나의 욕구와 나의 한계가 명백히 반영되어 있다.” “나의 생각에는 분명히 편견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국비구니회장상을 받게 돼 더욱 뜻깊습니다. 비구니스님이 계신 사찰에서 뛰어놀며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됐거든요.” 수기 ‘아버지를 향한 회향’으로 전국비구니회장상을 수상한 이란희(자비화)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원망이나 미움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드렸다”며 “불교를 공부하면서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이란희 불자는 어릴 적 활동적이고 친구도 많았지만, 20대가 되면서 남들과 비교하며 움츠러들었다. 힘
흔히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속인들은 일제강점기 이래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개신교 장로였던 이승만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5‧16군사 쿠데타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권의 탄압은 더욱 거칠어져서 생존 자체가 힘들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몸부림으로 정부의 반공 이념 굳히기에 편승해 ‘대한승공경신연합회’를 조직하여 정부의 인정을 받으려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단체에 대한 법인 등록 허가는 1997년에서야 이루어졌고 그것도 ‘종교단체’가 아니라 ‘일반사회단체’에 머물고 말았다. 결국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지 못한
자주 걷는 편이다. 가는 길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충무로와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는 코스다. 중간중간 안행(雁行)을 하듯 줄지어 늘어선 오색연등을 곁눈질하면서 걷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압권은 전통연등축제가 열리고 있는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형형색색의 연등들이 저마다 독창적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진지하기도 하고 익살스럽기도 하다. 겉모습은 우락부락한 사천왕상이지만 속마음은 천진난만한 동자승을 닮았다. 어느 순간 옹기종기 짝지어 앉아 있던 젊은 연인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진다. 밤
호법선신들은 세간에서 책임지고 맡아 관장하는 분야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명명된 것으로 보입니다. ‘맡는다’는 말은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자연계를 주관하는 기세간 세주들입니다. 호법선신들의 신령스러운 역할과 이미지는 상수대중들의 명호를 통해서도 헤아려 볼 수 있겠습니다. ‘화엄경’ 제4권에서는 변상도에서도 보이듯이 주화신(主火神)·주수신(主水神)·주해신(主海神)·주하신(主河神)·주가신(主稼神)·주약신(主藥神)·주림신(主林神)·주산신(主山神)·주지신(主地神)·주성신(主城神)·도량신(道場神)
‘Self(자아), Spirit(혼), and Person(인격체)’ 이 세 개념은 구분하기가 까다롭다. 그러나 붓다의 무아론을 옳게 이해하려면 이 세 개념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논의해 보아야 한다.‘self’의 번역어로는 보통 ‘자아(自我)’가 쓰이는데, 우리 일상에서나 불교계에서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다. 실은 self는 힌두교의 아뜨만이나 서양종교의 영혼(soul)과 동일하고, 또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참나에 해당된다. 붓다의 무아론은 그런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자아란 나
28장은 “‘미혹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은 단지 ‘무명’을 도울 뿐이다”이다. 규봉종밀(780~841)의 ‘원각경약소’ 내용이다. ‘미혹한 마음’이란 ‘법원주림’에서 “술은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데 왜 다시 술을 마시는가?”라고 한 것과 같이, 근원을 잃고 자신과 타인의 과실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당대(618~907)의 ‘돈황변문집’에서 “잘 살펴서 모든 ‘미혹’을 깨쳐라”고 했다. ‘수행(修道)’에 대해서 인광법사(印光, 1861∼1940)는 ‘목적을 향해서 몸과 마음이 변화된 상태’라고 했다.‘싯다르타’의 ‘고행’은 인도의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1862~ 1918)의 작품은 시적이거나 회화적인 느낌의 제목이 붙은 경우가 많다. 확실한 주제의 논의를 회피하고 잠재의식과 내면의 느낌, 인간의 심리상태에 중점을 둔 상징주의 문학은 모호하고 희미한 분위기의 드뷔시 음악과 잘 맞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사실적 표현을 기피하고 즉각적이고 주관적인 인상을 표현했던 화풍 역시 드뷔시의 음악적 성격과 유사했다. 드뷔시 음악은 상징주의 문학이 주는 암시성과 인상주의 미술이 가진 빛과 색채를 모두 담고 있었다. 드뷔시의 초기 작품들은 ‘아라베스크(Arabesq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