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삼덕론은 후기대승불교인 밀교에 이르며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삼덕론으로 표현된다. 대일여래는 진리본체인 법신 비로자나불을 지칭한다.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 온 인도의 밀교고승 선무외의 중국인 제자 일행은 스승의 ‘대일경’ 강론을 정리하고 해설을 덧붙인 ‘대일경소’를 찬술하였는데, 그 제1권에서 제암변명(除暗遍明)과 능성중무(能成衆務)와 광무생멸(光無生滅)의 삼덕론을 개진하고 있다.태양이 떠오르면 모든 어둠을 없애고 광명을 두루 비추듯이 대일여래는 밝디밝은 지혜의 덕성을 보이며, 태양은 광합성의 작용으로 식물을 살리고 나아가 동물
우리 모두는 선량하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차가 없더라도 빨간 불에서 기다리고, 인터넷에서 부당한 폭력을 당한 이의 기사를 보면 분개하는 댓글을 남기고 공유하며, 수입의 얼마라도 기부하고, TV의 인간 다큐멘터리를 보며 눈물짓는다. 악업을 짓지 않으려 경계하고 선업을 쌓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다른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려 애쓴다. 그런 나를 누구도 “차별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소수자, 인권, 차별에 관해 가르치고 연구하는 저자는 우리를 정확히 지목해 “차별주의자”라고 부른다. 앞에 ‘선량한’이라는 수식
지난 회 끝에서 1939년 제작에 착수한 김복진의 대작 법주사 대불이 1940년 그의 요절로 중단되자 그의 제자 윤효중 등이 작업을 이어갔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법주사 미륵대불은 1964년에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1940년대에는 거의 완성된 모습으로 조성이 되어 있었다. 1964년의 작업은 시멘트로 만들어진 불상의 얼굴이 검게 변하고, 새의 분비물들이 덮여있어 새 시멘트로 얼굴을 보완하고 보개를 씌우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이때 원래의 얼굴보다 더 살이 붙은 풍만한 얼굴로 변형되었다. 1940년대 어느 시점에 대불이 사실상 완
“서라벌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이는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처용랑망해사에 따르면 신라 49대 왕인 헌강왕이 환궁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을 정도였다. 이를 이상히 여겨 신하(日官)에게 물으니 답하길,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라 하였다. 이에 왕은 근처에 망해사를 세우도록 하였고, 왕명이 내려지자 구름이
동자승들이 퇴장하고 본격적인 ‘참’ 의식으로 접어들었다. 네 사람의 나승이 컁링으로 신호를 하자 동물 탈을 쓴 두 사람의 무승(舞僧)이 대경당 앞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호법 영웅들인데 중국식으로는 ‘화우(华吾)’라고 한다. 화우는 두 명씩 짝을 지어 컁링과 법고의 타주에 맞추어 한 계단 한 계단을 느리고 무거운 스텝으로 내려왔다. 마당에 나와서 춤을 추는데 둥첸의 소리와 같이 절제되고 중후한 동작은 춤이라기보다 호법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몸짓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렸다. 똑같은 동작으로 두 명씩 짝을 지어 청·적·녹·황(갈색에 가
26장은 “옛 덕 높으신 스님이, ‘단지 너의 ‘눈 바른 것’이 귀하지 너의 ‘행리처’는 귀하지 않다’”고 한 내용이다.서산은 “옛날 앙산(仰山慧寂, 803∼887)이 위산(潙山靈祐, 771∼853)의 질문에 답하기를, ‘‘열반경’40권은 모두 마군의 말이다’고 한 것이 앙산의 바른 눈이다. 앙산이 또 행리처를 묻자 위산이 답하기를, ‘오직 그대의 눈 바른 것이 귀하다’고 한 등의 까닭은 먼저 바른 눈을 연 후에 행리처(行履處)를 설한 것이니, 만일 수행하고 싶으면 먼저 돈오(頓悟)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고 평하였다. ‘위산영우어록
지금까지 46회에 걸쳐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라는 주제로 신라 ‘중고(中古)’ 시기 불교의 수용과정과 사회적 역할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았다. 이제 내용을 종합하면서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불교가 담당했던 역할, 특히 왕권의 신성화와 정통성 확립에 기여했던 불교의 역할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신라는 3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선진국이던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해 3국통일을 달성하였고, 이어 3국의 문화를 종합하여 고대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리고 건국한지 992년 만에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나, 다음 시대를
근대 한국선의 중흥과 경허선사는 오버랩 된다. 서산대사의 등장으로 한국 선이 부흥의 조짐을 보였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선원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곳곳에 염불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선리를 참구하는 수행자도 매우 드물었다. 말세적 분위기와 더불어 험하고 힘든 세상에서 선을 공부하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여긴 것이다. 경허는 굳은 원력으로 이러한 풍토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 결과 경상, 전라 주요 지역에서 선원이 개설되었다. 그의 제자로서 만공, 혜월, 수월, 한암 스님 등은 근현대 선의 대종장들이었다. 1920~30년대 선학원 운동으로
경기도 안산에 살고 있는 연화심(가명) 보살에게 필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현재 40대인 연화심 보살은 평소에 매일 관세음보살을 염불하고 있다. 호기심에 ‘하루 염불을 얼마나 하십니까?’하고 물었다.“아침에 만 번, 저녁에 만 번, 하루 2만번 정도 관세음보살님을 부릅니다.”“보통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관세음보살 만 번 염불하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깜짝 놀라서 다시 물었다.“그 정도면 염불을 상당히 빨리 하십니다.”연화심 보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제가 염불을 하다보니까 자꾸 잡념 망상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왕으로서 첫 번째 재가신자가 된 사람은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Bimbisāra)이다.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후 37년간 승가의 외호자로서 큰 역할을 했으며 부처님을 깊이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은 물론 여러가지 좋은 제안을 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포살제도를 부처님께 제안한 사람도 빔비사라왕이었다. 그러나 신심 깊고 정의로운 왕이었던 빔비사라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에게 폐위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된다. 빔비사라왕의 비극적인 죽음은 부처님에게도 큰 아픔이었다. 아자따
‘금강경’의 제8 의법출생분 말미에 “만약 어떤 이가 이 경에서 네 구절로 된 게송[四句偈頌]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에게 일러준다면 그 공덕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채워놓고 여래께 공양 올리는 것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금강경’에서 ‘사구게송'을 언급한 것은 제8분을 비롯하여 제11분 등 총 6차례이다. 경문에서 ‘사구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受持乃至四句偈等)'라고 하였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설해져 ‘금강경’ 같은 경문이 성립되면 당연히 그 경문 전체를 수지독송(受持讀誦)하고 위타인설(爲他人說)해야 그 공덕이 엄청날
마음챙김 명상하면, 우리는 보통 생각을 비워내어 텅 비게 하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비우려 해도 생각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마음챙김 명상은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을 깊이 이해하게 하고, 생각 및 감정과 더 조화로운 관계를 맺게 도와주는 것이다.수련하다 보면 가끔은 생각이 좀 줄어든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는 떠오르는 생각과 덜 다투기 때문이다. 흔히 마음챙김 명상하면 평범한 생활과는 거리가 있고 다른 의식상태를 추구하거나, 정신이나 육체의 초월적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심지어 일상적인 현실에서
도오가 운암과 함께 남전을 방문하자, 남전이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도오가 말했다. “종지(宗智)입니다.” “지혜[智]로도 이를 수 없는데 어째 종(宗)이라 했는가.” “그렇게 짐작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짐작으로 말했다면 내 머리에 뿔이 날 것이다.” 사흘 뒤에 도오가 운암과 함께 후원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남전이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고 또 물었다. “종지두타여, 어제 내가 지혜로도 이를 수 없는데 어째 종이라 했는지를 물었을 때, 그대가 짐작으로 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면 짐작으로 말하면 내 머리에 뿔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근거 없이 비방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자신들의 공약을 내세워 국민들을 설득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과거의 일까지 드러내며 헐뜯기 바쁘고 때로는 사실이 아닌 일을 마치 정말 있었던 것처럼 말하여 사람들을 선동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를 비방하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경험할 수 있기도 하다. 회사나 주변의 사람들과 관계를 갖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른 누군가의 뒷이야기를 하거나 소문으로만 들은 것을 마치 자신이 보고 들
2017년에 우리나라는 윤5월이 있었고 대만은 윤6월이 있었다. 그때 각 선방에서는 안거기간을 어떻게 하는지 의견이 분분했던 기억이 난다. 대만은 그해 4개월간 안거를 했다. 올해도 윤4월이 있다. 바이러스 재난으로 변동이 생겼지만 정상적으로 한다면 하안거 중간에 윤달이 든 경우다. 부처님 당시에도 윤달이 있었다. 다만 우리처럼 몇 년에 한 번씩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국왕이 필요할 때 윤달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그러니까 코살라국은 윤달이 있고, 사위국은 윤달이 없을 수 있다. 율장에는 안거기간 중에 윤달이 포함된 경우 어떻게
‘부처님오신날’을 맞을 때마다 참으로 많은 감회가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만났기에 나라는 존재가 그래도 이 만큼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큰 감사의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 거기에는 언제나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함께한다. 그 귀한 가르침을 받고도 제대로 실천 못하는 자신에 대해, 그래서 그 가르침을 사회적으로 회향해 이 세상을 불국토로 가꾸어 가지 못하는 나와 우리 불자들에 대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위 없는 진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 위 없는 가르침이 왜 세상의
고3을 시작으로 등교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파행을 거두고 정상의 과정으로 돌아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번 기회에 파행과 역행을 거듭하는 교육이 제자리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현재 우리 교육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의 부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로, 교육의 중심과 주체가 뒤바뀌어 있다. 부모와 선생이 이끌고 아이와 학생은 따라가고 끌려가는 형상이다. 무엇을 배우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문제에조차도 부모와 선생의 생각이
요즘 TV를 보면 반려동물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한두 개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여러 방송국에서 경쟁적으로 개나 고양이가 주인공인 프로그램을 많이 방영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봐도 동물병원이나 애견분양소 등이 눈에 띄게 많아졌습니다. ‘반려인 능력시험’도 있다고 하니 반려동물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가족이 분명합니다.반려동물 중에서 가장 가까운 동물은 역시 개입니다. 인간이 개와 함께한 세월이 2만년이라 하니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우리나라도 개 모습이 고구려
수십 명의 군인이 한적한 시골길에서 행군하고 있다. 일렬종대로 ‘1자’를 그리면서 질서 정연히 걷는다. 그런데 여기서 ‘1자’는 어떻게 생겨났고 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행군하는 군인들 옆 길가에는 개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수많은 개미가 ‘S자’ 형태로 움직이며 먹을거리를 운반하고 있다. 이 ‘S자’는 또 어찌 그리 생긴 것일까? 군인 한 명이 고개를 들어 짙푸른 가을 하늘을 보니 철새들이 ‘V자’를 그리며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날아다니는 새들에 의해 ‘V자’가 어떻게 생겨났을까?일부 철학자들은 군인과 개미, 그
탑은 탑파의 준말이며, 부처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이루어진 불교 예술품이다. 부처님은 쿠시나가라 사라나무 숲에서 열반하셨다. 다비를 마치고 여덟 나라에서 사리를 똑같이 나누어 탑을 쌓고 사리를 모신 것이 탑의 시작이다.부처님이 열반하신 100년 뒤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 왕이 부처님 법을 널리 펴기 위해 8만4천의 절과 8만4천의 탑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탑은 나무를 재료로 한 목탑, 벽돌 모양인 전(塼)으로 쌓은 전탑, 돌이나 바위를 재료로 한 석탑으로 구분이 된다. 국보 2호인 원각사10층석탑은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