忍受井枯魚少水 寧容象逼鼠侵藤인수정고어소수 영용상핍서침등覩玆脆境早修行 勤念彌陀生極樂도자취경조수행 근념미타생극락(물고기가 옹달샘 물이 말라 적어지면 어찌 견딜 것이며/ 설령 코끼리는 등나무를 흔들고 쥐들은 갉아먹는데/ 이런 위태한 지경을 보고 가벼이 여기지 말고 조급히 수행하라./ 부지런히 아미타불 염불하여 극락왕생하리라.)이 주련의 일부는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 제2권 불자필람(佛子必覽)과 ‘석문의범(釋門儀範)’ ‘칠중수계의궤(七衆受戒儀軌)’ ‘화엄대례문(華嚴大禮文)’ 등을 통해 서둘러 수행할 것을 경책하는 문구로 자주 거
수대(隋代, 581~618)에 건설된 막고굴 423굴은 서벽 감실에 미륵불을 주존상으로 모시고 있다. 그 위로 이어진 천장부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형식의 전당이 그려졌다. 전당 안에는 양쪽으로 난 창을 통해 대중들이 운집해 있는 것이 보이고, 중앙에는 각자의 대좌에 마주 앉은 두 인물이 눈에 띈다. 이처럼 건축물 안에 두 인물이 마주 앉은 구도가 낯설지는 않다. 바로 ‘법화경’의 견보탑품을 도상화한 석가·다보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의 예에서 비슷한 구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11회 참조).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매자작시의 이하령중생 득입무상혜 속성취불신(每自作是意 以何令衆生 得入無上慧 速成就佛身)’이라, 부처님께서 하시는 불사는 오직 어떻게 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지혜에 들게 해 부처님 몸을 빨리 이룰 수 있게 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이며, ‘소작불사 미증잠폐(所作佛事 未曾暫廢)’라, 부처님께서는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의 불사를 잠시도 그만 둔 적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이하령중생 득입무상혜 속성취불신’의 ‘매자작시의’ 이외에 일체의 모든 생각은 본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니, 참으로 본래 있는 법을 그대
방편업은 민법·형법 등 세속의 법전을 읽으며 살아가는 변호사이지만, 본업은 부처님의 일대사인연이 온전히 담긴 진실법인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를 생각 생각마다 놓지 않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고 있는 염불불자다. 초등학생시절 내가 왜 이 지구라는 별에 왔는지,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은 성장할수록 깊어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능공부에 매진하다가 갑자기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싶어 무작정 휴학하겠다고 부모님께 통보한 적이 있다. 당연
“부처님의 따뜻한 품 안에서 부산교구 종도 여러분과 일불승(一佛乘)이 되어서 불교 부흥과 법화종단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10월6일 부산 사상구 광명사에서 봉행된 ‘대한불교법화종 부산교구 종무원장 이·취임식’에서 전임 종무원장 상백 스님에 이어 신임 종무원장으로 취임한 광명사 주지 법경 스님이 활동의 포부를 밝혔다. 법경 스님은 “소의경전 ‘법화경’을 봉대하며 큰스님을 잘 모시고 종도 간에 화합하며 불교 중흥과 홍포 그리고 포교 활동에 주력하며 법화종 부산교구 발전에 미력하나마 힘이 될 수 있길 바란다”며 “무거운 소임을
淸淨善根普回向 利益群迷恒不捨청정선근보회향 이익군미항불사悉令一切諸衆生 得成無上照世燈실령일체제중생 득성무상조세등(훌륭한 선근으로 널리 회향해/ 언제나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이롭게 하고/ 모든 중생에게/ 세상 비추는 가장 높은 등불 이루게 하네.)佛智廣大同虛空 悉了世閒諸妄想불지광대동허공 실료세한제망상(부처님 지혜 넓고 커서 허공과 같아/ 세간의 헛된 생각 모두 알도다.)80권 ‘화엄경’ 권제24 십회향품에 실린 게송과 이어서 나오는 두 구절은 ‘화엄경’ 권제80 입법계품에 실린 게송을 인용했다. 이 주련은 밀양 표충사 대광전, 김천 직지
속리산(俗離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상고암(上庫庵‧930m)에 30대 초반의 행자가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주석하고 있던 성중 스님과 은사 인연을 맺은 후 굴 법당에 들어가서는 매일매일 지장기도를 올렸다. “내 시봉 그만해도 좋으니 큰 절로 내려가라”는 은사 스님의 당부에도 암자를 떠나지 않다가 3년여의 정진 끝에서야 법주사로 가 행자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보림(寶林) 스님이다.고향은 남해 용문사에서 가까운 남면 죽전(竹田)이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던 할아버지는 집안일 돕던 사람이 결혼하면 작은 땅이라도 떼어 주었을 정도
지난회에서 논의했듯 석가여래의 반열반은 남겨진 육신마저 태워버리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을 통해서 오히려 법신을 드러낸다. 이후 성당(705~781) 시기에 조성된 막고굴 148굴에서는 332굴의 경우처럼 주실의 중심에 자리했던 탑주를 세우지 않았다. 이로써 상대적으로 열반굴 내에서 탑이 갖는 의미가 감소하고 주존인 와불상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와불의 뒷벽에는 세존의 열반 후 입관에서 사리탑 봉안에 이르는 과정이 여전히, 오히려 더욱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점은 사리탑이 여전히 열반의 교의를 설명하는 주요 소재임을 보여준다. 9
千年石上古人從 萬丈巖前一點空천년석상고인종 만장암전일점공明月照時常皎潔 不勞尋討問西東명월조시상교결 불로심토문서동(천년의 반석 위에는 옛사람의 발자취/ 만 길의 바위 앞은 한 점의 허공이네./ 밝은 달이 비출 때면 늘 맑고 깨끗하거늘/ 괜히 동서(東西)를 물어서 찾느라고 수고롭지 않다네.)당대 고승으로 알려진 ‘한산시(寒山詩)’의 시문이다. 한산자(寒山子)는 중국불교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은자(隱者)로, 천태산에 머물며 나무와 바위에 새긴 시를 국청사(國淸寺) 스님이 편집했다고 전해지는 시집이다. 한산시에는 한산자의 시 300여수뿐 아니라
11세기 고려의 전형적인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고 문벌귀족세력이 등장하는 것에 상응하여 불교계에서 교종 계통의 화엄종과 법상종이 주류적인 종파로 대두하면서 (초조)대장경의 완간에 이은 불전 간행의 보완사업으로서 의천(1055~1101)에 의해 경·율·론 삼장의 주석서인 장소를 모은 교장을 간행하였다.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동아시아 불교사의 업적을 집대성하는 의의를 갖는 불사였다. 그 간행 예정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1090)에는 원효의 저술 44부 87권(또는 83권)의 목록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의천은 경주의 분황사를 찾아
안산 도심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달하는 보문선원이 개원 23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자리에 모인 사부대중은 보문선원이 앞으로도 지역주민들을 행복의 길로 이끄는 도량이 되길 기원했다.안산 보문선원(회주 보림 스님)은 10월3일 보문선원 법당에서 ‘보문선원 개원 23주년 기념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기념법회에는 보문선원을 개원한 회주 보림 스님을 비롯해 덕주사 주지 정진, 보문선원 주지 정암, 김포 연운사 부주지 원지 스님이 자리했다. 또 불교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구담 스님과 보문선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강의하며 인연 맺
사유와 명상의 종교인 불교에서도 체험·영험담은 무수히 편찬돼 왔다. 가장 중요한 고대 역사서인 ‘삼국유사’에도 신비로운 체험들이 숱하게 실려 있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불교사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다.경전과 논서가 있음에도 이러한 문헌들이 편찬·유통됐던 것은 왜일까? 특별한 존재인 불보살이 아닌 나와 같은 사람들 진솔한 얘기가 더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일 것이다. 2014년 처음 발간된 조계종 신행수기 모음집은 옛 불교전통을 잇는 생생한 현대판 불교 체험·영험담이다. 신행수기 당선작이 불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는 것
돈황석굴 열반경변도는 북주 시대 조성된 428굴의 열반경변이 출현한 이후, 수대(隋代)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동일한 도상 형식을 유지하였다. 마치 이불병좌상이 ‘법화경’의 교의를 대표하듯, 오른쪽으로 돌아누우신 와불상(臥佛像)은 ‘열반경’을 대표하는 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일관된 형식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당대(唐代) 측천무후 집권시기(698년)에 조성된 막고굴 332굴이다. 332굴 주실은 중앙에 4면 기둥을 둔 중심주식 석굴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돈황석굴 초기에 유행하였다가 감실에 불상을 조성하는 불전굴(佛殿窟)
오늘날 인류는 재난에 대비한 다양한 방재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지진, 홍수, 태풍, 가뭄, 전쟁, 전염병 등 재난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는 한다. 지금도 그러한데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은 재난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했을까. 이런저런 자구책을 마련했겠지만 불교국가였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인왕호국경(仁王護國經)’에 의지해 재난 극복을 기원하고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인왕호국경’이 오늘날 불자들에게 낯설 수 있으나 장구한 한국불교사에서 ‘인왕호국경’은 ‘법화경’ ‘금광명경’
‘누구나 가슴 속에/ 별 하나 만듭니다// 장미꽃 심어 놓고/ 나팔꽃 트럼펫이// 화단에/ 목화씨 몇 알/ 정성들여 심어봅니다//… 물레를/ 잣던 둘레길/ 무명옷이 그리워// 실 뽑아 한 올 한 올/ 마음을 열어가며// 사랑의 방방곡곡/ 원앙침 수놓으면// 찬란히/ 목화별 뜨는/ 밟아가는 산책 길’(홍정희 시 ‘목화별 산책’)대개의 사람이 화려한 장미꽃이나 개성 강한 나팔꽃을 좋아하지만, 시인은 어머니 품처럼 따듯한 온기를 전하는 목화를 선호한다. 사랑하는 꽃을 별로 승화시킨 시인은 오늘도 내일도 ‘찬란히 목화별 뜨는 산책길’을 밟
전법활동으로 평생 대중 곁에 머물렀던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를 기리는 법석이 봉행됐다.무진장불교문화연구원(원장 진관 스님)은 8월31일 오후 12시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 열반 9주기 추모다례재’를 봉행하고 생전 스님의 가르침과 뜻을 되새겼다. 자리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성우, 무진장불교문화연구원 이사장 법산, 무진장불교연구원장 진관, 무진장불교연구원 회원 범상, 묘법연화사 주지 남륜 스님 등 사부대중이 참석했다. 법산 스님의 헌향으로 시작된 다례재는 추모사, 종사영반, 대중 스님들의 헌향, 헌다, 문도대
부처님께서 라즈기르(왕사성)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 술 취한 코끼리가 부처님을 향해 돌진한 적이 있었다. 데바닷다가 마가다국의 왕인 아자타샤트루왕의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그렇게 한 것이다. 인도에는 코끼리를 전투에 많이 사용하여 코끼리 군대를 만들곤 하였는데, 코끼리들을 이용하여 전쟁을 치를 때에는 코끼리들에게 술을 먹여 싸움터에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 데바닷다가 부처님을 시해하기 위하여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그때 부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앞을 아난존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가로막았다. 그러나 술 취한 코끼리는 부처님 앞에
貞筠柚箭 潤璧懷山정균유전 윤벽회산華藻雲浮 沈思泉湧화조운부 심사천용澤雨無偏 心田受潤 택우무변 심전수윤(바르기를 대나무 살대처럼 하면/ 산이 옥(玉)을 품은 것과 같다./ 곰곰이 생각하면 지혜가 샘솟듯 하여/ 갖가지 망상은 뜬구름처럼 여길 뿐이다./ 연못에 내리는 비가 치우침이 없듯이/ 마음 밭 적심도 이처럼 받아들여라.)주련은 8언 3연으로 이뤄졌다. 글씨는 미루어 짐작하건대 통도사에서 수행하셨던 구하천보 스님의 묵적으로 보인다. 삼청각은 승방(僧房)이다. 여기에 걸린 주련은 온전한 시문이 아니라 구절을 인용하였으며 옮김에 있어서 순
우리는 영취산의 법화회에 어떠한 신분으로 참여하는 것일까? 돈황 막고굴 61굴의 법화경변도를 보면 중심축을 따라서 배치된 허공회(견보탑품), 영취회(서품), 열반도(방편품), 화택유(비유품)의 주역은 분명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그러나 화면의 곳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법회에 참석한 사부대중이며, 그중에서도 경전에서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무수히 등장하는 보살들이다. 특히 보살들이 중앙 영취회의 외연을 타고 올라 상단 허공회를 주관하시는 석가-다보 여래를 마주하며 문답을 나누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구도는 법화회의 또 다른 주역을 명확히 드
신도님들의 신심이 더 좋을까요? 스님들의 신심이 더 좋을까요? 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전국 신도 상위 10%와 스님 전체의 신심을 비교한다면 해볼 만할까요? 스님들의 신심은 어떤 불자보다 더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신심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발보리심이 근본이지만 올바른 견해와 사유를 비롯한 팔정도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면 사성제·삼법인·12연기·사무량심·37조도품·18불공법 등 가르침을 늘 사유하여야 합니다. 더불어 부처님의 세상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믿음도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