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화연구보존회 회원들의 모습 1990년 창설된 삼광사 차문화 연구보존회는 한국불교의 차 문화를 세계의 문화로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는 부산 불자차인들의 모임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정신적인 공허감에 처해있는 현대인에게 마음을 맑히고 정신을 깨어있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된 천태종 삼광사(주지 도원 스님) 차문화연구보존회(회장 박만옥)는 한국불교의 차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진력하고 있다. 차문화연구보존회 회원들은 특히 규범과 절제가 있는 다도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주목적으로 정기적인 차회를 열고 있으며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는 헌다, 다도시연회, 정기법회를 열며 차를 통한 포교에 앞장서고 있다. 또 전문가 양성을 목적으로 올해 4월 삼광다도대학을 개강해 차를 통해 다선일여(茶禪
붓다가 도리천에서 어머니 마야레비와 천신들을 교화한 후 다시 내려온 곳이라 전해지는 상카시아의 언덕배기에 조그만 힌두사원이 단출하게 서있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때는 공식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다. 그러나 불교전래를 반드시 북방전래로만 한정지을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사료에 의하면,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372년보다 훨씬 이전이다. 특히 불교 남래설(南來說)은, 아직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있다. 남래설은 가락국 김수로왕과 결혼한 천축국(인도) 공주 허황옥의 이야기로 일반에도 제법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16살의 야유타국(야오디야) 공주 허황옥은 하늘이 내린 가락
* 죽음수용은 삶의 포기? :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허무하니까 삶에 소홀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죽음을 수용하자는 것은 결코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삶을 보다 의미있게 영위함으로써 죽음을 한층 편안하게 맞이하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현이다. 죽음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살게 된다. 따라서 죽음수용은 결코 삶의 포기일 수 없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므로, 죽음수용은 삶의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수용이다. * 생명경시풍조? : 자기 생명을 자기 소유로 생각해 자살하거나, 자녀 생명까지도 자기 것으로 착각해 동반자살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 자주 벌어지고 있다. 자기 생명이든 자녀의 생명이든 자기 소유로 생각해 함부로 해서는
죽음 사유하면 ‘이순간’소중히 느껴져 죽음만큼 오해를 자주 받는 현상도 없을 것이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지니고서 죽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은 삶과 둘이 아니므로, 죽음을 이치에 맞게 이해하지 못하면,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 보다 시급한 일이 있을까. 인간답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이다.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 10여 가지가 있다. 죽음에 무관심? :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가까운 사람의 부음에 수시로 직면하게 되지만, 죽음을 자기 자신의 문제, 자기 자신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로 심사숙고하
영명선사 일갈 생생 중추절 휴가 때에는 하루 10만여명이 영은사를 참배한다. 대웅보전. 영명연수 선사가 세운 육화탑 영은사 비래봉 암벽에는 330여개의 조각상이 있다. 정자사에 모신 영명연수선사 진영. 순례단은 정자사에서 영명 선사의 ‘지계’정신을 다시한번 되새겼다. 영은사 5백나한전. 중국 7대고도의 하나인 절강성의 성도(城都) 항주는 산과 강, 호수가 한데 어울린 예쁜 도시다. 13세기 무렵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폴로는 항주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칭송했을 만큼 도시는 단아한 멋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손꼽히는 ‘서호’는 자연과 인간이 빚은 예술품이라 할 만큼 화려한 자태를 머금고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도시에서 태어나
60여 제자에게 전도를 부촉하다 사슴에 관한 전설(본지 776호 참조)이 남아있는 사르나트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왕을 뜻하는 사란가나타(sarangatha)가 줄어든 말이다. 붓다가 초전법륜을 설한 이곳에는 아직도 사슴들이 자유롭게 뛰놀고 있다. 바라나시 산 비단을 파는 인도의 여인네가 한국에서 온 순례객들에게 현란한 전통춤을 선보이고 있다.|아쇼카왕의 석주 기둥. 원래 이 석주의 꼭대기에 있던 사자 조각의 주두는 현재 사르나트 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다메크 사원터에는 기둥만 남아있다. 사르나트의 첫 인상은 포근함, 그리고 따뜻함이다. 마치 부드러운 솜이불에 싸여 있는 느낌이다. 딱딱한 벽돌조차 손가락으로 찍어 누르기만 하면 구멍이 파일 듯이 부드러워 보인다. 마치 잃어버렸던 소성(塑性)
안락사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의료현장에서는 소극적 안락사의 경우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소극적 안락사에 찬성하는 비율이 70%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 5월 10일 전국의 성인 10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갤럽의 여론 조사에서 ‘회생이 불가능한 불치병 환자가 생명연장을 위한 치료를 그만두고 빨리 죽을 수 있도록 퇴원시켜달라고 요구할 경우, 의사가 퇴원시킬 수 있도록 법적으로 허용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76.5%가 찬성해 반대 23.3%에 비해 훨씬 많았다. 지난해 4월의 71.6%보다 약간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이 지난 6월29일 보라매병원 사건에 대해 유죄확정판결을 내렸으므로, 퇴원하고자 하는 환자 가족과, 이를 저지하는 병원과 의사 사이의
안락사 문제와 관련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한의사협회는 2001년 11월과 2002년 5월에 을 발표한 바 있다. 윤리지침은 ‘임종환자의 자율적 결정이나 가족 등 환자 대리인의 판단에 의해 연명치료의 중단이나 퇴원을 문서로 요구하는 경우 의사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환자 본인의 뜻이 아니라 가족의 요구에 의해 임종을 앞둔 환자의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는 행위라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져 의사를 표시할 수 없는 경우 가족이나 보호자가 가족 내 갈등이나 과도한 진료비, 재산상속 등 때문에 환자를 희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의사협회 산하 대한 의학회가 회복이 불가능한 임종환자에게 연명치료를 중단시킬 것을 목적으로 의료윤리기준과 지침을 만들
예전에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얼마 전부터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 증가하게 되었다. 의료기계에 둘러쌓인 채 여러 가지 튜브를 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대, 60대에 자연사했을 사람들이 암, 당뇨병, 뇌졸중, 치매 등의 병을 지닌 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머지않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작별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심장마사지 등 응급조치를 취하기 위해 가족들은 병실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라 할지라도, 오직 육체적 연명만을 생각하는 의료 관계자가 응급실에서 ABC 조치(Air-Way: 기도 확보, Breathing: 산소인공호흡, Circulation: 혈액순환)를 취하면 몇 년간 생명을 붙들어 놓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97년 보라매 병원 사건으로 인해 안락사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97년 12월4일 오후 술에 취해 화장실에 가다 넘어져 머리를 다친 김씨가 서울시립 보라매병원에서 응급 뇌수술을 받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인 이씨는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고 계속 치료를 해도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퇴원을 요구했다. 의사 양씨는 극구 만류했지만, 부인의 주장을 꺾지 못했고, 사망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은 뒤 퇴원시켰다. 김씨를 구급차를 이용해 환자를 집으로 옮겨 인공호흡장치를 제거하자 5분쯤 뒤 환자는 호흡곤란으로 죽었다. 검찰은 98년 1월 의사 양씨 등에 대해 “의학적 판단에 따라 치료해야 할 중환자를 보호자의 퇴원
안락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계기는 1975년 4월 미국에서 일어난 카렌양 사건이었다. 여성 카렌양이 친구 집의 파티에 갔다가 칵테일에 정신안정제를 타서 마신 뒤 회복불능의 혼수상태에 빠졌다. 부모는 딸이 식물인간 상태로 계속 살아가기보다,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내고 평안하게 죽기를 원했다. 신부와 상담한 뒤, 아버지가 담당의사에게 의견을 제시했으나 의사는 이를 거부했다. 1976년 3월 뉴저지주 최고 재판소는 부모의 희망을 받아들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해 9월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냈지만 그는 혼자 힘으로 계속 호흡을 유지하면서 9년여 동안이나 식물인간 상태로 살다가, 1985년 6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카렌양 사건 이후 안락사 문제와 관련된 사건이 세계 각국에서 잇달아 보도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는 지수로 널리 쓰이는 지표가 IQ, 지능지수이다. 지능지수 이외에 감성지수(EQ), 도덕지수(MQ), 창의력지수(CQ)가 있다. 몇 년 전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폴 스톨츠 교수는 역경지수(AQ:Adversity Quotient)를 만들어냈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부딪치는 어려운 역경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가 최고 경영자의 중요한 자질로 꼽히자 AQ가 주목받게 된 것이다. AQ는 어려울 때 더 필요하고 빛을 발하는 덕목이다. 역경지수는 무모한 배짱이나 근거없는 깡다구와는 다르다. 냉철한 현실인식과 합리적 판단(IQ), 역경에 맞써 흔들리지 않는 감정적 균형감과 인내(EQ), 자기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책임감과 윤리의식(MQ), 역경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능력(CQ)이 모두
‘잘 산다’는 곧 ‘잘 죽는다’ 삶과 죽음 둘이 아니다 잘 죽는다, 잘 산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단어가 바로 ‘Well-Being’이다. 웰빙은 바로 ‘잘 사는 것’ 혹은 행복을 뜻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일까. 웰빙은 잘 죽는 것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웰빙을 단지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만 국한시켜도 될까. 우리의 삶에는 사회적 출세라든가 경제적 재산 등 세속적 성취가 중요시된다. 하지만 세속적으로 아무리 성공했다 해도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길을 편안히 떠나는 데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세속적인 가치는 삶에만 통용되는 제한된 가
서양에서 생사학을 창시한 미국의 정신과 의사 퀴블러로스 박사는 지난 8월 24일 미국 애리조나주 스콧데일 자택에서 임종했다. 평소에 “죽음은 휴가를 떠나는 것과 같다”고 말했던 그의 마지막 유언 역시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였다. 그에 따르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의 문제일 뿐이라고 한다. 필자도 죽음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로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실체로서 인정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여러 인연이 모여 형성된 연기적 존재이듯이, 죽음도 마찬가지로 인연법의 소산일 따름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이다. 이 책은 죽음 이후의 상황에 대한 안내서이다. 어떤 사람이 죽어갈 때 또는 죽은 이후에 스
55세의 말기 위암 환자 박씨는 전혀 아픈 곳이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았고 그런 상태가 한 달 이상 계속되기에 병원에 갔더니 여러 가지 검사 끝에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하기 위해 막상 열어 보았으나 위 주변의 림프 결절에까지 전이되어 수술도 하지 못하고 그냥 덮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 항암 치료를 두 차례 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어서 퇴원한 뒤 가정 호스피스에 의뢰되었다. 통증이 심해서 호스피스에 가입한 초기에는 통증 조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조용한 성품이어서 호스피스 봉사자가 집을 방문할 경우 부인이 주로 병세를 말했다. 부인이 외출하고 없을 적에만 그는 수줍은 표정으로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특별한 종교가 없었던 그는 유교의 가르침을 따
몇 년 전 티베트의 종살 켄체 린포체(20세기 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잠양 켄체 린포체의 환생자)가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은 어느 여성을 만난 일이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여성을 향해 린포체는 한 사람의 의식이 육체를 떠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순간에서부터 그가 다시 생명을 얻을 때까지 사이에 걸쳐있는 ‘생성의 바르도‘ 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신이 죽은 이후, 모든 것이 살아있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진행될 것이다. 당신이 지금 그런 것처럼 똑같은 의식을 지니게 된다. 바로 지금 당신이 행하듯이 모든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의식이 육신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지속되는 것인지 물었다. 린포체의 답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신의 의식만 지속되는 게 아니라, 죽
“예전부터 자살에 관해 나는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한두 번쯤 자살을 생각해본 적도 있다. 다른 사람과 관계가 없는 독립된 존재였다면, 아마 자살을 했을 것이다. 허무주의자의 자살,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허무, 이 세상에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여대생 김양) 허무하니까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김양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문학 작품이나 영화 속 주인공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대목을 보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굳이 애써 살려고 할 필요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게 아닌지, 자기 멋대로 자살해도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에 직면한다는
우리가 죽음과 관련해 분명하게 아는 사실은 4가지이다. 첫째 사람의 평등, 누구나 죽는다. 둘째 시간의 평등, 우리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셋째 장소의 평등, 우리는 어디서든지 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 이와 같이 인간은 4가지 이유로 죽음 앞에서 평등한 존재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와 같이 4가지로 똑같은 조건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사람마다 죽어 가는 마지막 모습이 똑같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어 가는 사람이 어떤 심리상태를 거치면서 죽어 가는지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큐블러로스 박사는 죽어 가는 사람이 겪게 되는 심리적 반응은 5가지 과정이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바 있다. 죽어 가는 환자 2백 명을 직접 면접해 조사
죽음을 한 마디로 규정지울 수 있을까. 죽음을 간단하게 규정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죽음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 보더라도 사후세계를 간단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체험하고 다시 삶의 세계로 되돌아온 사람은 단지 자기가 겪은 체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죽은 이후 겪는 경험도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또한 사후세계에는 다양한 종교가 개입될 수밖에 없으므로, 문제는 더 한층 복잡해진다. 죽음 대신 삶에로 초점을 옮겨보면, 우리는 지금 살고 있으니까 삶에 대해 무언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 어느 누가 혹은
대학에서 10여 년간 죽음을 주제로 강좌를 개설해 20대 대학생들에게 죽음준비교육을 가르치고 있다. 강좌 명칭을 보고 우연히 수강 신청한 학생들의 첫 반응은 20대가 왜 죽음 준비를 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은 나이에 관계없이 찾아오고, 죽음 준비란 곧 삶의 준비를 뜻한다는 설명에 한 학기 동안 열심히 수업에 임한다. 필자가 강단에서 철학을 15년 정도 가르쳐 보았지만, 철학이나 불교 강의 보다 죽음과 관련된 강좌에 학생들은 훨씬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이번 1학기에는 전국의 대학생 60명을 상대로 직접 강의실에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인터넷을 통해서만 강의를 했는데, 죽음 준비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이전과는 적지 않게 바뀌었다. (대구대 유아교육과 4 서성민) “죽음과 만났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