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한해의 문을 여는 지금, 우리 ‘108산사순례’회원들은 어떤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도 3개월의 안거(安居)를 마친 뒤 나이 한 살을 더 잡숫는 것이 새해맞이였습니다. 이를 수세(受歲)라고도 하는데 대개 7월 보름이며 이것이 법랍(法臘)이 됩니다. 말하자면, 불가의 한 해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수행 뒤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그저 한 살을 더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세상은 ‘날마다’ 새로운 날의 시작일 뿐, 애초부터 끝이란 없습니다. 하루가 지나가면 늘 우리 앞에 도래하는 것은 바로 ‘오늘’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보면 분명 ‘날마다 좋은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닫힌 마음의 문(門)을 활짝 열어야
경인년(庚寅年)도 저물어가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 불자들은 한해를 뒤돌아보고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참회를 하고 새롭게 다가오는 신미년(辛未年) 한 해를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 것인가를 다짐해야 한다. 서양의 격언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말이 있다. 이 뜻은 ‘오늘을 잡아라’이다. 이렇듯 동서양이나 우리에게 ‘이 순간’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 내가 무엇을 듣고 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가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가 지금 쌓고 있는 업(業)이기 때문이다. 이를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과거는 이미 지나 갔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세상에 오직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
제52차 108산사순례 동해 두타산 삼화사(三和寺)로 가는 서울역 대합실, 회원들이 밤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밖 먼 민가의 불빛들이 짙은 어둠속에서 새록새록 아름답게 반짝인다. 더러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더러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겨울의 정취에 마음껏 젖어 있다. 오랜만에 기차로 산사순례를 떠나는 회원들의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밤기차는 밤새 달려 이른 새벽 정동진역에 닿았다. 동해바다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귓불에 스치자 얼얼하다 못해 화끈하다. 회원들은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방생법회에 참석했다. 저마다 손에 든 소원성취 연등 촛불을 모래사장위에 하나씩 놓자 어느새 ‘선묵혜자 스님 108산사기도회’ 문구가 어둠속에서 아름답게 시구처럼 펼쳐졌다. 한해를 보내고 새롭게 한해
‘보리(菩提)’는 불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지만 우리 불자들은 ‘보리’가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을 때가 많다. ‘보리’를 문헌적으로 보면, 불교에서 수행결과 얻어지는 깨달음 또는 그 지혜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도(修道)의 한 과정이라고 되어 있다. 불교에서 ‘보리’를 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지만, 그 또한 자신의 근기(根基)에 알맞은 길을 찾아 행하면 된다. 마치 가는 길은 다르지만 종착역이 매 한가지이듯이 말이다. 우리가 ‘산사순례’를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이 ‘보리’를 증득(證得)하기 위함에 있다. 왜냐하면 9년간에 걸친 ‘108산사순례’는 결코 쉽지 않는 하나의 수행 과정이며 이를 통해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08염주’를 모두 꿰는
요즘 세상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급변(急變)하고 있다. 사회와 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민심 또한 그렇다. 이런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럼, 무엇이 부처님의 마음일까? 우리는 이를 헤아려 바른 마음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부처님의 마음은 결코 먼데 있는 게 아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변하지 않는 마음, 한결같은 마음, 남을 돕고 사랑하고 따뜻하게 위로하는 마음이 곧 그것이다. 얼마 전, 연평도가 북한에게 포격을 당해 젊은 병사와 국민들이 희생되었다.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사람이 사람을 해칠 수는 없기에 병사들과 국민들의 죽음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찜질방을 떠도는 연평도 국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힘들다. 겪어보지 못한
중생들의 마음속에는 ‘가아(假我)’와 진아(眞我)’ 이 두 가지가 늘 함께 존재한다. ‘가아’란 거짓된 나이며 ‘진아’란 참된 나, 즉 ‘불성(佛性), 반야(般若)·생명·중도(中道)’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을 두고 마음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곧 ‘나’라는 존재의 주체이며 육신(肉身)을 이끈다. 108산사순례는 부처님께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남을 위한 보시를 하여 거짓된 나인 ‘가아’를 버리고 참된 나인 ‘진아’를 찾아 나의 육신을 바르게 이끄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108산사순례기도회’를 이끄는 목적이며 주된 원력(願力)이다. 인생은 한 생각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크게 좌우된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
108산사 제 51차 순례지 영주 부석사(浮石寺) 입구, 인공폭포수에서 떨어지는 물과 분수가 빚어내는 물안개가 청아한 가을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무지개를 그려내자, 회원들은 연신 사진을 찍으며 탄성을 자아내었다. 일주문을 거쳐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가 알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고 있는 노(老)보살님. 가을바람에 지천으로 날리는 붉은 단풍잎을 책자에 끼우며 추억에 젖고 있는 젊은 보살님. 부모님의 손을 잡고 순례에 나선 학생들은 도심에서 맡아 볼 수 없는 대자연의 냄새와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부석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써 세월의 연륜에 녹아, 편안함과 넉넉함이 함께 서려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국보 제18호인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은
불교의 핵심사상은 ‘마음’ 즉 심(心)이다. 청담 큰스님은 이러한 마음의 조화와 변화를 체계화시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셨다. 마음이란 무엇이며, 인생에서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큰스님은 체계적으로 확립하여 불교사상에 깊이 투영(投影)하고자 하셨다. 우리가 108산사순례를 나서는 이유 역시, 큰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신 그 심(心)를 찾기 위한 긴 장정(長征)이다. 이 마음속에 극락이 있으며, 이 마음속에 인욕이 있으며, 이 마음속에 나라사랑이 있으며, 이 마음속에 남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우리는 흔히 극락세계를 두고 내세세계(來世世界)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극락이란 곧 즐거운 마음이 있는 곳이다. 즉 자기의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극락을 만들기 때문에 산사순례는 우리가
은사이신 청담 스님은 평소 제자나 불자들에게 가슴을 찌르는 ‘마음법문’을 많이 하셨다. ‘마음법문’은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도(道)를 전하는 명저(名著)이며 선불교에서 최고의 문자라고 극찬을 받고 있는『신심명』을 지은 승찬 스님에게 법을 전한 혜가 스님의 전언이기도 하다. 당시 문둥병에 걸린 승찬 스님은 늦은 나이인 마흔이 지나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혜가 스님을 친견하고 이렇게 말씀하셨다.“스님, 자비로써 저의 죄를 참(懺)해 주십시오.”혜가 스님이 말씀하셨다.“그 죄를 가져오너라. 그대를 위해 참해 주리라”승찬 스님은 오장육부까지 혜가 스님에게 다 바치고 싶어 했지만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이렇게 대답하셨다.“죄를 찾아도 불가득(不可得)이옵니다. 찾을 수 없습니다.”“죄를 참해 다 마쳤으니 이제는 불법승(
가을, 초입(初入)인가 했더니 어느 새 도선사 산문(山門)에도 낙엽이 비 오듯 휘날린다. 스님 네들의 염불소리와 목탁소리, 그리고 불자들의 지극한 기도소리가 어울려 산가(山家)의 가을도 더욱 깊어지는 것 같다. 108산사순례를 시작한 지도 벌써 4년, 내년 2월이면 꼭 절반을 회향한다. 그 많은 인원들이 전국을 순례하면서도 단 한 건의 사건, 사고도 없이 원만 회향할 수 있었던 것도 은사이신 청담스님과 불보살님의 가피 때문이다. 지난 24일, 서울 장충체육관 ‘108산사순례’ 4주년 법회와 ‘G20 정상회의 성공개최를 기원하는 영산재’를 6천여 명의 회원들과 사부대중이 함께 봉행했다. 이 자리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 도선사 부조실 현성 스님 등이 법문을 해주셨으며
속리산 절경(絶景)을 품은 물소리 바람소리가 귓가에 서걱이는 오후. ‘108산사순례’ 오십 번째 불연(佛緣)을 맺은 법주사 순례 첫날, 일원상(一圓相) 무지개가 서쪽 하늘에 장엄하게 피어났다. 스님의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산사에 울리는 동안 회원들은 108배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법회가 끝나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하늘에 칠색 창연한 무지개 펼쳐졌던 것이다. 지극한 회원들의 불심(佛心)이 향불을 사루듯 부처님마저 감동했는가 보다. 법주사는 우리나라 팔경(八景)의 하나인 속리산이 품고 있는 손꼽히는 대찰이다. 절이 산을 품고 있는지 산이 절을 품고 있는지 모를 만큼, 속리산과 법주사는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산세가 아름답고 많은 문화재가 있어 유산의 보고로 알려져 있으며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인간에게는 평생 풀지 못하는 네 가지의 의혹이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태어나기 전의 전생을 모르며 또한 죽는 날을 모르고 죽은 뒤에 어디를 가는지를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존재라고 할지라도 이 네 가지의 의혹을 영원히 풀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천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는 이러한 존재의 미혹함을 스스로 깨달아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종교인데 이것이 바로 성불이다. 우리가 한 달에 한번 씩 ‘산사순례’를 통해 참회하고 기도를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잃어버린 진정한 나’를 찾고 인간이 가진 네 가지 의혹을 풀기 위한 하나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막연하게 남이 가니까 나도 간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순례를 나선다면 이제 부터라도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산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다. 대승불교의 최상의 경전인 『법화경』제 16장 ‘여래의 수명’편에 보면 진리의 절대적인 측면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설해져 있는데 이와 같이 부처님은 열반을 하신지 무려 2천 5백 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 곁에 여전히 머무르며 병든 이와 어리석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그 마음을 치유하고 계신다. “모든 천신과 사람들 아수라들은 여래가 석가족의 궁전에서 나와 멀지 않은 도량에서 6년이란 고행 끝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비유컨대, 참으로 내가 성불을 이룬 것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백 천만 억겁 나유타겁 (셀 수 없는 시간) 이전이다” 부처님은 이미 숫자로도 알 수 없고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세계 이전에 성불을 하셨으며 그 인연으로 인해 또 다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은사(隱士)의 집에 가을이 깊었네새로운 시는 낙엽에다 쓰고저녁 찬에는 울타리 꽃을 줍네나뭇잎 떨어지자 산봉우리는 여의고이끼가 깊어 외로운 길이 머네도서를 책상위에 쌓아 두고는눈감고 아침노을을 마주 대하네 한 여름의 폭염이 누그러지고 새삼 시 한 편이 그리워지는 가을저녁, 매월당 김시습의 시를 읽으면 그가 보낸 세월의 무상함과 절절한 인간의 고뇌를 엿보는 것 같아 마음이 시리다. 그가 입신양면의 출세를 버리고 은사의 길인 출가를 감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부도에 서린 세월의 이끼가 짙고 깊듯 그의 외로운 삶이 이 속에 담겨 있다. 지난 9월 49차 108산사순례는 부여 무량사였다. 이곳은 매월당 김시습이 삭발염의를 하고 출가를 하여 말년을 거처(居處)로 삼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조선 초기
‘육신은 멸해도 법신(法身)은 멸하지 않는다.’나의 은사이신 청담스님께서 남기신 열반송이며 유훈이다. 청담스님께서 열반하신지 벌써 서른아홉 해가 지나고 산승이 출가한지도 마흔다섯 해가 지났다. 바쁜 와중에도 맑은 난(蘭)잎에 흘러내리는 아침이슬처럼,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지는 날이면 청담스님께서 남기신 주옥같은 말씀들이 지금도 아련하게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그럼, 청담스님이 말씀하신 그 법신이란 무엇인가. “인연이란 말은 묘한 뜻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언제든지 무엇을 해도 친한 사람하고만 같이 가려고 한다. 사람이 수 천 명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구경하다가도 헤어져 나갈 때는 친한 사람끼리만 짝지어 나간다. 죽어 가는 길도 자기가 친한 길로 인연 지은 곳으로 따라간다.” 음미해 보면, 실로 공감할 수밖에 없
세상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자고나면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어둔 뉴스가 날마다 쏟아지고, 좋지 않은 일로 바깥세상은 시끄럽다. 사람의 진면목은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만이 나타난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보는 것조차 매우 힘들다. 이러한 때, 바쁜 삶의 속도를 늦추고 한 번 쯤 산사(山寺)에 가서 부처님의 그윽한 미소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부처님의 미소 속에는 가섭과 달마, 혜능과 원효, 보조와 태고, 그리고 나아가 성철 스님과 나의 은사이신 청담 스님 등 역대조사의 미소가 들어있다. 선사들도 부처님의 미소를 알고 막혔던 가슴이 터졌으며 달라이라마와 뛰어난 석학들도 부처님의 미소로서 깨우친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힘든 시대일지라도 부처님의 미소는 변하지 않으며
지난 주 48번째 ‘108산사순례’ 불연(佛緣)을 맺은 곳은 팔공산 ‘파계사’이다. 절의 좌우로 흐르는 아홉 갈래 계곡의 물이 ‘모을 파(把) 시내 계(溪)’ 즉, 한곳으로 모여지는 데서 유래된 사명(寺名)이다. 『조선사찰사료』에 따르면 애장왕 5년 (604)에 심지 스님이 창건했고 그 후 계관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가 숙종20년(1695) 현응 스님이 크게 불사를 일으킨 곳으로 조선왕실과 인연이 깊은 계율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현응 스님은 숙종의 청에 따라 세자 잉태를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렸는데 이듬해 영조대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어의가 발견되었는데 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준다. 지금도 진동루(鎭洞樓) 앞에는 250여년 된 영조의 느티
한국의 33관음성지를 모두 방문한 일본인 순례객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 뉴스를 통해 들었다. 이 ‘한국 33관음성지순례 프로젝트’는 한·일 양국의 공통된 문화컨텐츠인 불교를 통해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템플스테이 등의 한국의 독특한 문화관광콘텐츠를 제공하는 사찰순례상품으로 문화관광부와 대한불교조계종이 공동으로 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모든 것도 ‘산사순례’가 동기가 된 것임이 분명하다. 일본인들에게 성지순례는 옛날부터 행해왔던 독특한 관습이 있었는데 토속적인 신도(神道)신앙과 더불어 일본인들의 심층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과거 야마토 왜, 나라, 헤이안 시대의 불교는 일본인들의 정신 그 자체였다. 때문에 일본의 순례는 홍법대사(弘法大師)가 성지순례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
소음과 먼지, 탁한 공기가 흐르는 도심을 떠나 산사로 가는 마음은 언제나 즐겁다. 봄·여름·가을·겨울, 산사의 꽃과 나무들은 순리대로 어김없이 새롭게 잎을 피우고 진다. 그러는 동안 ‘108산사순례’도 절반에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남편과 자식, 자신에 대한 기원(祈願)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젠 이와 함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범국민 나눔 운동’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쉼 없이 쏟아지는 말의 홍수, 날마다 양산되는 뉴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고 산다. 뿐만 아니라 욕망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속에서 날마다 시름하고 있다. 이러한 때, 도심을 떠나 모든 시름과 근심을 던져버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순례를 나서는 일은 탐진치(貪瞋癡) 번뇌 망상을 지우는 여행이며 마음의 쉼터를 찾는 일이다
‘108산사순례 기도회가’ 47번째로 순례한 동학사의 ‘실상선원’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스님께서 ‘문필봉’을 바라보며 무비공(無鼻孔)인 ‘콧구멍 없는 소’인 태평가로 오도를 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 승가대학 4학년 이상의 학인들과 석사과정에 있는 학림(學林) 스님들에게만 개방하는 곳으로 철저하게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나는 이 특별한 곳에서 산사순례 회원들에게 3일간 염주보시를 하였는데 매우 의미 깊은 순례 길이었다.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문득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몰록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일 없는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