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은 최고귀족인 진골출신으로 25세에 벼슬길에 나오라는 왕명을 거부하고 출가하였다. 선덕여왕 7년(638) 당에 유학을 떠나서 장안과 종남산을 오가며 다양한 스승을 찾아보았다. 선덕여왕 12년(643) 대내외의 국가적 위기상황에 처한 본국의 소환 명령에 따라 귀국한 그는 새로 창건된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섭대승론’을 강의하고, 뒤에는 황룡사의 사주(寺主)가 되어 ‘보살계본’을 강의하면서 계율을 정비하였다. 마침내 대국통이 되어 전국의 교단을 통솔하면서 수계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나라 안 사람으로서 그에게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조계종 교구본사주지협의회(회장 정묵 스님)가 문화재구역입장료에 대한 종단의 분담금 이중부과 문제를 제기하며 관련 법령의 개정 등을 주문했다.교구본사주지협의회는 1월21일 남양주 봉선사 청풍루에서 제66차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회장 정묵 스님을 비롯해 교구본사 주지스님 25명 중 16명이 동참했다. 교구본사 주지스님들은 이날 문화재구역입장료에 대한 종단의 분담금 이중부과 문제가 제기됐다. 덕문 스님은 “문화재구역입장료 가운데 17%를 종단 분담금으로 징수하고, 또 나머지 83% 가운데 53%를 경상비에 포함시켜 분담금을 부과하고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始成正覺]’에서 시작하여 ‘불공덕 찬탄’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의 유통을 분부하는 유통분이 어디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유통분이 보이지 않아서 ‘화엄경’ 설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 불세계에 이르게 하는 보현행원의 발원내용을 ‘보현행원품’에서 10대원으로 담아 추가하게 된 것도 이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화엄경’의 첫 품은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으로서, 80권 가운데 처음 다섯 권에 해당합니다. 첫 품이라 함은 전체 39품의 전후 차례에 의한
신라 본국의 명령에 따라 자장이 급거 귀국한 선덕여왕 12년(643)은 내우외환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시기였다.대내적으로는 진평왕대(579〜632)의 54년이라는 오랜 통치기간을 통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어 딸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여왕(女王)’이라는 점에서 통치능력에 불신을 사게 되었다. 즉위 초기에는 종실의 대신 을제(乙祭)가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는 섭정을 담당하였고, 뒤이어 상대등 수품(水品)과 내성사신 용수(龍樹)가 국정과 궁중의 관리를 분담하였다. 그러나 여왕의 통치능력에 대한 불신은 해소되
3월 ‘부다가야 분황사 건립 기공법회’를 필두로 인도, 세종·위례 신도시, 계룡대, 화성 일대에서 백만원력 결집 불사를 본격적으로 가동한다는 소식이다. 사부대중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대작불사의 각 세부 사항을 들여다보면 크게 전법과 문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신도시에 들어서는 한국불교문화체험관은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한껏 높이기에 충분한 시설이다. 계획한대로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실, 공연장, 수장고를 갖추고 알찬 내용을 담는다면 불교문화에 농축된 한국의 전통미와 시대정신을 일반인들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조계종 36대 총무원 집행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백만원력결집 불사가 올해부터 본격 추진된다. 3월 인도 부다가야 한국사찰(분황사) 건립 기공식을 시작으로 계룡대 영외법당, 세종·위례신도시 포교당, 용주사 불교문화유산보존센터 건립을 위한 착공식이 줄이어 진행된다. 백만원력결집 불사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한국불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조계종 불사추진위원회(집행위원장 금곡 스님)에 따르면 백만원력결집 불사는 3월28일 인도 부다가야에서 ‘분황사 건립 기공법회’를 시작으로 본격화된다. 부다가야 한국사찰 건립
몇 년 전 이른바 ‘경허논쟁’이 심하게 불붙은 적이 있다. 학술회의장에서 발표된 한 연구자의 논문이 발단이 되어 유력한 불교계 잡지의 정간 사태까지 발생했던 사건이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이 일은 우리 불교계의 학술담론 필요성과 그 방향성에 대해 함께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원효 스님을 둘러싼 논쟁이 교계 한 신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학술 담론이 사라져버린 현실에서 논자는 이들 기사를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불교학의 발전 없이 불교의 발전을 기
“부처님 성도지인 인도 부다가야에 세워질 분황사를 찾는다면 불자로서 초발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백만원력결집위원회에서 발우저금통을 열던 날, 37년 인연을 맺어온 도반 설매(74)·연취(68) 보살의 원력도 빛났다. 부처님 성도지 인도 부다가야 내 한국사찰을 건립하는 데 50억원을 보시했다.여생을 부처님 가르침대로만 살자고 발원한 두 보살의 뜻은 정법이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40년 넘게 오계를 지키며 오신채를 먹지 않고 경봉, 구산 스님의 가르침대로 참선해온 설매 보살, 그와 도반 인연
한국불교 중흥을 염원하는 백만원력을 탁발해온 발우저금통이 사부대중의 원력을 쏟아냈다.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백만원력결집위원회(위원장 금곡 스님, 이하 백만원력결집위)는 12월2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 로비에서 ‘백만원력결집불사 발우저금통 여는 날’을 개최했다.백만원력결집위는 7개월 전 전국 사찰에 배포된 2000여개의 발우저금통을 열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비롯해 교육원장 진우, 포교원장 지홍 스님 그리고 부실장스님들과 일반직종무원들은 발우저금통을 열고 그 안에 담긴 불자들의 원력을 조심스럽게 꺼냈다.이날 부처님
국립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던 불사리(佛舍利) 82과가 불교계 품으로 돌아왔다.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관장 탄문 스님)은 11월12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불사리 이운 및 고불식’을 봉행했다. 이 자리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교육원장 진우, 포교원장 지홍, 송광사 주지 진화, 마곡사 주지 원경, 조계사 주지 지현 스님과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 등 사부대중 300여명이 동참했다.불교중앙박물관은 올해 국립박물관으로부터 총 82과의 불사리를 모셔왔다. 이날 조계사 대웅전에 모신 사리는 청양 도림사지 삼층석탑 사리 1과, 보령 성주
화쟁사상의 원류를 찾아 원효대사 발자취를 따라가는 테마 순례가 올해도 열린다.조계종 화쟁위원회(위원장 호성 스님)는 10월25~27일 경상북도 경주와 경산 일원에서 ‘화쟁의 원류를 찾아서-원효의 발자취 순례(원효순례 경주편)’를 실시한다. 앞서 경기지역 등에 이어 세 번째 순례다.원효순례 경주편은 첫 순례지역이던 경주지역을 다시 찾아 출생에서 입적까지 삶의 흔적을 돌아본다. ‘원효성사탄생비’가 있는 경산 제석사, 원효대사의 숙부가 지었다는 초막 혹은 생가터로 추정되는 초개사, 태종 무열왕 사신들과 마주친 월정교, 왕성한 저술활동을
28대 진덕여왕(647〜654)은 비담(毗曇)의 반란 중에 귀족세력들의 여왕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은 분위기에서 즉위하였다. 여왕에 대한 지지세력으로는 김춘추(603~661)와 김유신(595~673)이 대표적 인물인데, 이들은 중첩적인 혼인을 통하여 처남과 매부 사이이자, 장인과 사위 사이가 되는 특수한 관계였다. 이들은 진덕여왕 즉위 이후 귀족세력들의 완강한 견제를 받으면서도 정국을 주도하여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는 주역이 되었다. 김유신은 군사권을 장악하여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을 담당하였던 반면, 김춘추
자장율사가 창건한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인 정선 정암사(주지 천웅 스님)가 보물 제410호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위한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정암사 주지 천웅 스님은 10월2일 경내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수마노탑은 기단부터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국내 유일 모전석탑으로 분황사 모전석탑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 고려시대 탑”이라며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수마노탑이 국보로 승격돼 그 역사성과 문화재적 가치가 대외적으로 인정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정암사 적멸보궁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마노탑은 강원
‘경주는 한때 절이 별처럼 퍼져있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장관을 이루었다.’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서 경주의 옛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데서, 그 시절 신라가 불국토의 일면을 갖추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전해지는 많은 기록에서도 신라가 일정 정도 불국토에 근접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가 전해지고,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서야 비로소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신라는 어떻게 불국토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신라가 불국토라는 이상향에 근접한데는 자장율사와 선덕여왕
솔거(率去 혹은 率居)라는 신라의 화가가 황룡사 담벼락에 소나무를 그렸는데, 새들이 진짜 나무인줄 알고 날아와 앉으려고 했기 때문에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있고, 신라시대의 그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서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매우 소중한 기록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동양화는 사실적인 표현에 관심이 없었다고들 하지만, 미술이 사물과 자연을 그리는데 있어 어떻게 ‘닮음’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솔거의 그림이 얼마나 사실주의적인 그림이었는
조계종 직할교구 중앙종회의원 법원 스님이 중앙종회 부의장에 선출됐다.중앙종회는 9월20일 오전 216차 임시회를 속개하고 주경 스님 사직으로 공석이 된 중앙종회 부의장에 법원 스님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당초 중앙종회는 부의장 선출을 두고 각 종책모임별로 이견이 있었지만, 19일 종책모임별 합의를 통해 무량회 소속의 법원 스님을 만장일치로 선출하기로 뜻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법원 스님은 보광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96년 수계했다. 총무원 조사국장, 순천 선암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현재 성남 정토사 주지를 맡고 있다. 지난 16대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주체적 결단력, 불교사상에 대한 진지하고 치열한 통찰과 해석, 모든 형식과 격식을 거부하고 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맑은 샘물을 향한 역류하는 몸짓과 저잣거리의 사람들을 향한 자비로운 마음, 그러면서도 발원과 참회로 자신을 다스려 나갔던 인물이 원효대사이다.원효(元曉, 617~686)는 신라 진평왕 39년(617) 현재 경북 경산인 압량군 불지촌(佛地村)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외로움과 세상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껴 15세 청소년시절 황룡사로 출가한다. 이윽고 자신이 살던 집에 절을 짓고
조계종 총무원장과 원로의장을 역임하고 불국사 재건 및 법보신문을 창간한 영원한 수행자의 사표 성림당 월산 스님(1913~1997)의 생애를 조명하는 첫 학술세미나가 사부대중의 뜨거운 관심 속에 열렸다.불국사 월산문도회(대표 성타 스님)와 대각사상연구원(원장 보광 스님)은 9월1일 경주 불국사 불교문화회관에서 ‘월산 대종사의 생애와 삶’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월산 대종사의 업적을 심층적으로 조명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좌표 설정의 자리가 된 이날 세미나는 진행 내내 발제석과 청중석 모두 열기 속에서 전개됐다.준비된 좌석
황룡사 9층목탑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덕여왕 14년(645) 공사가 시작되어 다음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조성공사가 기획된 것은 그보다 2년 앞서 자장이 귀국한 때부터였다. 자장은 진골귀족의 출신으로 선덕여왕 7년(638) 당으로 유학을 떠나 5년 동안 당태종의 후원을 받으면서 주로 수도 장안(長安)과 근교의 종남산(終南山)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오대산에 갔다는 것은 뒤에 만들어진 설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선덕여왕 12년(643) 3월 16일 자장이 급거 귀국한 것은 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속고승전’ 자장전에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즉위 3년(634)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고, 분황사(芬皇寺)를 준공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영묘사(靈廟寺)를 준공함으로써 이른바 전불시대의 7가람터 가운데 2곳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돌이켜 보면 제24대 진흥왕 즉위 33년(572)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고, 2년 뒤인 즉위 35년(574) 3월에 황룡사의 장육존상을 조성하였다. 홍제라는 연호는 12년간 사용되다가 제26대 진평왕 즉위 6년(584) 2월에 건복(建福)으로 바꾸면서 장육존상을 봉안하는 금당(金堂)의 건물을 준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