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칙 : 신원행 셋은 생사를 끝마치고 벗어나는 묘법이다. 어리석음은 지식이 조금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선악의 경계 인연은 모두 과거 숙세 업장이 초래하여 현생의 행위로 감득하는 줄 모르고 인과응보가 없고 전생과 내생 등이 없다는 허튼소리 함을 가리킨다.일체중생은 지혜의 눈이 없어 단멸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상주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단멸에 집착하는 자들은 사람은 부모의 기를 받아서 태어나고, 태어나기 전에는 본래 아무것도 없으며, 죽고 난 뒤에는 육신이 썩어 소멸하고 영혼도 흩어지거늘 어찌 전생과 내생이
‘신과 함께’ 3부작 중 2부에는 이승편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승세계가 아닌 이승세계의 신들이 등장한다. 저승차사들이 폐지를 수거해 살아가는 할아버지(김천규)를 데려가려고 하자 성주신들이 맞선다는 게 주된 서사이다. 할아버지는 초등학생인 어린 손자(김동현)를 돌보고 있는 까닭에 독자들로부터 절로 동정심을 유발한다.김천규 할아버지를 낡은 집에서 데려가려는 것은 저승차사들만이 아니다. 철거용역들은 집을 비우지 않는 할아버지를 협박하고 집안의 살림살이를 내던지기 일쑤이지만, 경찰은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 집을 뺏기고 고아가
사찰 신중단에 모셔져 있는 신중탱화에는 39류의 화엄성중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거나 적은 수의 성중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새로운 존상이 많이 추가되어 104위 또는 그 이상의 신중이 모셔졌습니다. 그래서 신중도의 구성을 보면 경우에 따라 주존의 배치가 약간씩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39위 신중도는 대자재천이 주존으로 표현되고, 범천과 제석천에 비중이 두어져 있습니다.(천은 종종 천왕과 통용됩니다. 즉 여기서 대자재천은 대자재천왕이고 범천은 범천왕이며 제석천은 제석천왕을 말합니다.) 때로는 동진보살이라고 불리는 위
대중이 불사리 친견을 소망하는 것은 부처님의 큰 덕을 찬탄하고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한편으론 ‘대비경’ 등 경전에 부처님이 아난에게 하신 말씀으로 “내가 입멸한 뒤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내 사리를 공경히 공양한다면 그 선근(善根)으로 말미암아 열반의 세계에 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나오니, 이를 통해 불사리를 친견함으로써 극락왕생의 길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는 믿음도 컸을 것이다.불사리를 진심으로 예경하면 현세에 감응을 얻는다는 믿음도 사리신앙 확산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불사리의 영험과 감응은 전설이나 설화보
우리는 흔히 사람에게는 귀천이 없다고 한다.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것과 실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붓다의 마지막 여정을 그린 경전이 ‘디가니까야’에 실려 있는 ‘대반열반경’이다. 붓다의 열반을 향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왓지국의 수도 웨살리 지역에 있는 암바빨리(Ambapāli) 원림(園林)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다. 암바빨리는 기녀였는데 인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일설에는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금강경’의 구마라집 스님 한역본에 ‘수지독송 위타인설’ 유형의 문구가 제8 의법출생분을 시작으로 마지막 32분에까지 13차례 등장한다. 해당 문장의 내용은 “최소한 ‘금강경’의 4구 게송만이라도 잘 받아 지녀 독송하였다가 다른 이를 위해 설해줄 수 있다면 그 공덕은 엄청날 것”이라는 의미다. 얼마만큼 엄청나냐면 태양계의 10억 배에 해당하는 삼천대천세계를 일곱 가지 보석으로 가득 채워놓고 여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마다 맘껏 공양을 올려서 몽땅 써버렸을 때의 공덕보다 더 크다 하였으니 중국인의 과장은 산수라면 인도인의 과장은 수학
삶이란 즐겁고 신나고 경이로운 순간들과 스트레스가 심하고 피곤하거나 절망적이며 충격적인 순간이 마치 씨줄과 날줄로 엮이듯 이루어진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대인들은 대체적으로 지나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WHO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13명 중 1명꼴로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불안은 현재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과거 또는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여러분도 불안한 마음이 들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시작하는 걸 한 번 쯤 겪어보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 때
이전은 ‘참선자’가 ‘호흡’ 사이에 ‘생사’가 있음을 명심하고 ‘마장’을 점검해서 ‘화두’와 하나가 되어 정진해야 한다고 설했다. 23장은 “‘말을 배우는 사람들이 말할 때는 깨친 듯해도 경계를 대하면 도리어 미혹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상위(相違, dvanda)’하다는 것이다”이다. 즉, ‘바른 참선’의 척도는 ‘언행’에 있다. ‘경덕전등록’에서 서룡(瑞龍幼璋, 841~927)은 “신통하고 괴이한 것으로 ‘나의 일(선법)’을 간섭 말라. 만일 말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자기를 살펴서 잘못을 알지 못하면 바로 허공 속에서 꽃을
한 승이 장사에게 물었다. “본래인도 성불을 하는 것입니까.” 장사가 말했다. “그대는 대당의 천자께서 띠를 베고 풀을 벤다고 말하는 건가.”장사경잠(長沙景岑)은 선기가 매우 준엄하여 대충(大蟲:호랑이)이라는 의미로 잠대충(岑大蟲)이라 불렸다. 본 문답은 대오철저(大悟徹底)와 성불(成佛)에 관한 문제를 주제로 한 문답이다. 본래인은 본래성불로서 달마조사로부터 전승된 소위 조사선(祖師禪)의 가풍을 가장 잘 드러낸 개념이다. 조사선은 본래성불 사상을 바탕으로 그것을 일상의 생활에서 구현하는 선풍으로, 중생에 대해서도 더 이상 중생이 아
불교는 중도의 가르침을 설하는 종교로서 어느 한 쪽의 사상만을 고집하는 것을 부정한다. 특히 자신이나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편향된 이야기를 하거나 행동을 하는 것은 불교에서 가장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그렇기에 현재도 불교의 대사회적 운동이나 발언이 다른 종교에 비해 적어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작용하는 것이다.종교라는 특성상 정치적 행동이나 발언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집단과 반대되는 이들에게 의도치 않은 괴로움과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 또한 국가나 사회와 관계를 맺고 지내다 보면 그 안에 속하지 못한 이들에
율장은 승단과 출가자의 수행과 생활 방식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가에 따라 효용가치가 드러난다. 어떤 이가 율장은 재가자의 필수과목이라고 주장한 글을 읽고 답답한 마음으로 며칠 지냈는데 한 스님으로부터 이런 주장에 대한 견해를 묻는 문자를 받았다. 부처님께서 제정한 계율의 종류와 재가불자에 대한 계율교육을 간략히 살피고, 재가자의 율장열람에 대한 상좌부불교와 북방불교의 차이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부처님께서는 출가오중(出家五衆)을 위해서 비구계, 비구니계, 식차마나육법, 사미 및 사미니 십계를
빨리어 삽뿌리사(sappurisa)는 착한 사람(善人), 바른 사람(正士) 등으로 번역되고 그 반대말인 아삽뿌리사(asappurisa)는 나쁜 사람(不善人), 바르지 못한 사람(不正士) 등으로 번역된다.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쭐라뿐나마 숫따(Cūḷapuṇṇa ma-sutta)’(MN110)에서 붓다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했다.“비구들이여! 나쁜 사람은 바르지 못한 성품을 가졌고(非法具足), 나쁜 사람과 교제하고, 나쁜
초하루 불공이나 사시불공 등 기도를 집전하다 보면 가장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 축원할 때다. 기도 올린 모든 분들을 다 축원해 드리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 법회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가버리는 분들이 많이 생긴다. 독송이나 정근은 같이 따라 하지만 축원할 때에는 각자 알아서 그 시간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축원은 기도 시간을 지루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줄이기도 쉽지 않다.이런 현상에서 벗어나려면 불자들이 축원의 의미와 기도의 마음가짐을 넓고 크게 가지도록 이해시켜야 한다. 기도할 때 축원이란 누군가의 인생이
코로나19 이후 한국의 종교는 어떻게 될까. 전문가들은 쇠퇴를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사태를 막는 종교의 역할에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이지 않게 국가나 지자체의 방역방침에 협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천지 사건에 대해 기성종교는 연대책임을 짊어져야 할 판이다. 자신의 사회적 책무를 등한히 함으로써 신천지의 탄생을 도왔다. 또한 의료가 중심이 된 전쟁터에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대중들은 과학이 더 안전을 강화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이 사태의 근본원인인 자본주의나 그것의 세계화인 신자유주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봉축 황룡사9층탑 앞을 지나갔다. 저녁 시간 불을 밝힌 초파일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여느 해와 같은 감동적 풍경이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유례없이 봉축행사가 윤 4월8일로 미루어졌고, 전 지역에 걸쳐 행사도 대폭 줄이는 모양새이다. 황룡사9층탑은 선덕여왕을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더 나아가서는 주변 9개국을 조복시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표출되어 세워진 것이다. 그러한 상징성을 가진 황룡사9층탑을 지나면서 문득 ‘세계일화’를 떠올렸다. 내가 출가한 곳은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이다. 그 치열했던 행자시
금산사 미륵대불의 입찰을 두고 일섭 스님과 김복진이 경쟁한 것을 과연 전통미술과 서양미술의 대결 구도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시의 경쟁을 이해하기 위해 두 분이 제출한 포트폴리오 성격의 모형 불상을 살펴보자. 금산사는 불상 제작자 선정을 위해 높이 1m의 모형불상 제출을 의뢰했고, 이에 따라 각각 만들어진 두 분의 미륵입상이 현재 제주 정광원과 공주 신원사 소림원에 소장되어 있다. 덕분에 미륵대불 제작에 앞서 두 분이 어떻게 이 불사(佛事)에 접근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일섭 스님의 작품이야 전통적인 화승의 입장에서 조성된
무형문화재 58호인 줄타기 명인이 한 다리로 줄을 딛고 앉았다 일어서는 ‘외홍잡이’의 재주를 부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졸이게 한다. 소리꾼과 악사 10여명은 산대에 올라가 잡가 중 서서 부르는 ‘선소리’를 하고, 양주별산대의 탈춤 ‘애사당 법고놀이’로 흥을 돋운다. 이어 인형극 꼭두각시놀이, 민요와 풍물굿이 이어지자 신이 난 관람객들이 공연장으로 내려와 모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며 신명 나는 축제를 즐긴다. 2004년 9월, 우리나라 고유의 놀이인 ‘산대희’가 220년 만에 재현됐을 때의 모습이다.조선시대 서울의 애오개와 사직골
1952년 여름, 뉴욕의 한 공연장 무대에서 피아니스트가 걸어 나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유명 작곡가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펼쳤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전혀 누르지 않고 뚜껑을 열고 닫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청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는 계속해서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4분 33초가 흐른 뒤 피아니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미국의 현대 작곡가 존 케이지의 ‘4분 33
대만 국립 고궁박물관에는 장개석이 대륙을 떠나오면서 가져온 문화재가 즐비하다. 그중에서 청동솥이 많은데, 하나같이 솥발이 셋인 정(鼎)이다. 중국은 새 왕조를 개창하거나 새 천자가 즉위하면 처음으로 하는 일이 청동정(靑銅鼎)의 주조였다. 청동정은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상징이었다. 새로움으로 채우겠다는 의지표명의 통치행위가 청동정의 주조였던 것이다.그렇기에 정신(鼎新)은 혁신(革新)과 동의어가 된다. ‘주역’ 제49괘는 혁괘(革卦)이고, 제50괘는 정괘(鼎卦)이다. ‘주역’ 십익(十翼)의 하나인 잡괘전에 따르면 혁괘가 낡은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바꾸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갖고 있었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확 뒤집었다.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에 있지 못하던 우리에게, 현재야말로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임을 상기시켜준 것이다. 과거가 궁금하다면 지금의 나를 보라. 지금의 내가 과거의 결과다. 미래가 궁금하다면 지금의 나를 보라.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 미래를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고 하려고 하는가에 집중해야 한다. 그 안에 과거와 미래가 모두 들어있다.그렇게 생각하면 작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