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슈베르트는 자신의 가곡(Lied) 네 곡의 선율을 기악곡에 사용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탄탄한 구성미를 자랑하는 작품이 ‘방랑자 환상곡’ C장조 D.760이다. 1820년 무렵의 청년 슈베르트는 규모가 큰 관현악곡을 작곡하고자 했었다. 이 곡은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에서 느껴지는 깊고 웅장한 음색과 함께 교향곡적인 구조가 돋보인다. 또한 이 곡에는 청년 슈베르트의 원대한 꿈과 희망이 담겨있다. 실제로 슈베르트는 이 곡이 출판될 1823년에는 상당히 몸이 약해져 있었고 이후 항상 병고에 시달렸다. ‘방
‘푸른 눈의 수행자’라는 말이 있다. 불교가 ‘메이드 인 인디아’다 보니, 인도 문화권 승려들이 더 오리지널한 선지식이라는 의미다. 또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연세가 많으신 어른이 선지식이었다. 연륜에는 반복되는 많은 노하우가 축적되기 때문이다. ‘소학’에는 ‘조정에서는 관직 높은 사람이 위에 서고, 일할 때는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앞장서며, 사랑방에서는 나이 든 사람이 어른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상황에 따라서 존중 대상이 다르게 된다는 의미다.현대에 들어서면 선지식의 개념도 많이 달라진다. 변화가 빠르다 보니, 어른은 선지식보다는
Q. 지난 가을부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혹시 무슨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하다 보면 밤에는 잠도 설치고, 점점 밖에도 나가기 싫어집니다. 올해 일흔이 넘다보니 당연히 몸도 이전과 다를 수 있고, 오히려 아픈 것이 이상할 것 없는 나이가 된 것도 맞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픈 것도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나 때문에 자식들이나 남편이 힘들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지금도 남편과 둘이 지내고 있는데, 처음에는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위로해주고 옆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사다주며 챙겨
서양화가 봉제 전화황(鳳濟 全和凰, 1909~1996)은 평안남도 안주 출생으로 영변과 평양에서 중학교까지 다녔지만, 중퇴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를 출품해 입선한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후 그림을 접고 1936년 중국 심양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메이지 37년(1905년) 일본 쿄토에서 니시다 덴코(西田天香)가 창시한 불교종단 잇토엔(一燈園)의 심양 지부 사찰에 기거하며 독실한 신행 생활을 시작했다. 잇토엔은 참회, 무소유, 사회봉사 등을 주요 기치로 내건 일종의 생명주의 운동 불
네팔과 북인도 일부에는 티하르(Tihar)라고 불리는 총 5일간의 빛의 축제가 있다. 축제 두 번째 날 ‘개들을 위한 공양제(供養祭)’인 쿠쿠르 푸자(Kukur pūjā)를 지낸다. 이날 모든 개들에게 금잔화 목걸이를 걸어주고, 이마에 제3의 눈인 티카(tikka)를 백단향으로 그려 축복해주며, 충분한 사료와 간식을 제공하면서 인간과의 돈독한 우정을 찬미한다. 이 축제를 통해 인간은 개들과의 친밀감과 깊은 유대감을 기리고, 그들의 충성심과 봉사에 감사하고 축하하게 된다. 인도에서 이런 특별한 기념일 외에도 개가 신성한 존재로 숭배
이번 호에는 불교 ‘의례(儀禮)’와 관련해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종교에 있어 의례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불교 역시 교리나 수행이 내면의 무형적이라면, 의례는 그것이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원론적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내자증(內自證)’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본다면 부처님께서 중생제도를 위해 행하신 일체 교화 및 부처님 제자들의 수행과 교화들도 모두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의례라고 할 수 있다.훗날 경률론 3장의 형태로 남겨진 일체의 가르침, 이것을 우리는 ‘남길 유[遺]’ 자와 ‘가르칠 교[敎
사랑을 자비와 등치할 수 있는 개념으로 보지 않고, 자비의 자심(慈心)에 국한시켜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제프리 홉킨스는 저서 ‘자비명상’(2001)에서 “사랑은 자비와 짝을 이룬다. 사랑이 ‘이 사람이 행복해지고 행복의 조건을 갖춘다면 매우 좋은 일이다’라고 느끼는 것이라면, 자비는 ‘이 사람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매우 좋은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라 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구별하였다.사랑을 여락(與樂)의 자심으로, 자비를 발고(拔苦)의 비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각은 자심과 비심을 포괄하는
음력 12월8일은 성도재일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루신 깨달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세상을 생각하면 성도재일은 부처님오신날 이상의 큰 행사로, 전 세계인이 함께 기념해야할 축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3월경 연재에는 부처님 깨달음의 문명사적 의의에 대해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이르시게 되는 수행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고의 속박을 벗어나 완전한 해탈을 이루고자 결심하신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사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당시 사문들
설법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도를 깨쳤든지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교학이나 정진력을 갖추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사람은 물론 축생과 무정물들까지 설법한다고 가르친다. 세상에 설법 안하는 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설법을 개도, 돼지도, 새도, 나무도, 돌멩이도 한다니 선뜻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축생들이야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니까 설법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소리를 못 내는 바위나 나무토막도 설법을 한다는 말은 상식 밖의 일로 들리기 십상이다.세상의 과학, 철학, 종교, 문학에서도 찾기 어려운 이야기가 불교에는
假使頂戴經塵劫 身爲床座徧三千 若不傳法度衆生 畢竟無能報恩者가사정대경진겁 신위상좌변삼천 약불전법도중생 필경무능보은자(설령 경전을 받들어 수지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겁을 지나더라도 / 이 몸이 침상이 되어 삼천세계에 두루 하더라도 / 만약 법을 전하지 아니하여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다면 / 마침내 부처님의 은혜를 갚지 못하는 무능한 자가 될 것이다.)구미 보천사 대웅전 주련에는 명(明)나라 임제종의 여근(如巹 1425~?) 스님이 속집한 ‘치문경훈’ 권 제4 가운데 ‘화상삼보'편에 나오는 게송이 새겨져 있다. 흔히 전법게(傳法偈)라고
앙산용 화상이 설법하였다. “한마디로 모든 산하에 대하여 설파해버렸다.” 그러자 곧장 승이 물었다. “그 한마디란 무엇입니까.” 앙산이 부젓가락을 화로에다 꽂았다가 다시 거두어 본래자리에 두었다.앙산용은 앙산의 남탑광용(南塔光涌, 850~938)으로 그 법계는 위산영우–앙산혜적–남탑광용이다. 본문답은 능전(能詮)과 소전(所詮)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능전이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주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어떤 개념을 지니고 있는 언어문자가 이에 해당한다. 소전이란 능전의 언설에 의하여 지목되는 대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답에서 궁극적인
오늘날 역사적으로 존재하셨던 고따마 붓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다면 사람들은 어떤 질문들을 할까. 사람마다 궁금한 점들이 다를 터이지만, 아마 그 내용들은 초기경전에서 그 옛날 인도 사람들이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질문의 내용을 보면 수행과 관련된 질문이 많기는 하지만 신통력과 관련된 내용도 적지 않다. 그리고 전생이나 내생에 대한 내용도 심심치 않게 본다. 질문의 내용들은 다 제각각이지만, 그 질문을 통해서 사람들은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질문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