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예불 후 새벽 사찰의 업무를 부지런히 보고 출근시간에 맞춰 복지관에 들어서면 직원들의 미소가 담긴 합장 인사와 어린이들의 재잘거림, 에어로빅실의 음악소리와 노인대학의 민요노래, 의료서비스 수혜 차 오신 지역 어르신들의 반가운 덕담 등으로 복지관은 온통 복지인연의 활기가 가득하다. 전 직원이 함께 간단한 불전의식에 이어 업무회의를 갖고 70여 종의 유·무료 프로그램의 기안과 진행과정 결과보고서, 각종일지·수입 지출서·공문서 등을 살펴 결재하고 난 후 지역 단체장이나 후원자, 봉사자 등을 만나 협조와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나면 서녘으로 지는 해를 보며 다시 사찰로 퇴근을 하게 된다. 벌써 5년 차에 접어든 바쁜 나날에 다소 소진되는 감도 없지 않지만 복지관 운영이 불일증휘 법륜상전(佛日增輝 法輪
어떤 방식의 통일이건 모든 게 좋은 것일까? 일찌기 냉전체제의 적막을 뚫고 천둥번개처럼 내리쳤던 '74 남북공동성명'(1972)의 충격과 감격 앞에서 장준하는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고 부르짖었다.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 앞에 갈라진 민족, 둘로 나누어진 자기를 다시 하나로 통일하는 이상의 명제는 없다고 선언했다. 통일지상주의는 여기서 싹텄다. 그런데 이 통일지상주의는 어떤 통일을, 통일조국이 어떤 모습의 사회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관심이 없었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고, 독일통일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을 때 우리도 금새 통일이 될 것 같은 열망에 들떴다. 체제경쟁은 끝났다. 이제 우리는 북한 동포들을 음습한 독재체제로부터 빵과 자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자유민주
요즈음 변화하는 사태를 반영하는 말에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가 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어 공부시키고 결혼시킨 서울 아들네 집에 올라가 한 일주일 지내다 보니 자신의 존재가 별반 대접받는 자리에 있지 못함을 느꼈다. 그 집에서 가장 큰 소리 하고 위세가 있는 1번 자리는 며느리였다. 손녀가 2번, 아들은 3번이었다. 그리고 그 집 강아지가 4번, 파출부가 5번 그리고 자기 자리는 6번임을 알았던 것이다. 개에 대한 두가지 입장 그래서 다시 시골에 내려가서 살리라하고 서울역에 와서 아들에게 전화해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상대적인 입장이 담겨져 있다. 부모 자식간의 문제, 남녀 차별 등이다. 강아지의 자리 또한 두드러진다.
계미년 새해가 밝았다. 국가적으로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고 의욕적인 개혁정치를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종단에서는 정대 스님이 총무원장직을 그만두고 동국대학 재단이사장을 맡게 되어 후임 총무원장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을 예정이다. 종단의 최고직에는 종정이 있지만 종정은 종단의 대표자로서 상징적 존재이고 실무적으로는 모든 업무를 총무원장이 수행하기 때문에 훌륭한 총무원장을 선출하는 것은 불교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첫째, 각 당의 후보는 상호 정책을 제시하고 국가를 이끌고 나갈 방안을 제시하였다. 둘째, 상대방 후보에 대한 비방이 어느 때보다 적었다. 셋째, 방송에서 토론이 당선에 영향을 주었다. 넷째, 젊은 세대의 역할이 매우
복제인간에 대한 불교계의 침묵 진리 탐구하는 자의 태도 아니다 요즘 이슈가 뭐야? 데스크가 편집회의를 시작하며 던지는 단골대사이다. 북핵문제라는 답변도 있었고 차기 조계종총무원장 선거요, 라는 대답도 나왔었다. 그리고 몇 주 째 인간복제문제가 그 몇 안 되는 답변 속에 계속 포함돼 있다. 인간복제에 대한 불교계의 공식적인 입장은 언제 나오나? 가톨릭이랑 기독교계는 진작에 입장표명을 하고 있잖아. 불교학계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데요, 종단에서도 그렇구요. 불교학자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학회가 한두 군데도 아니면서, 불자들이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정답은 아니라도 나름대로 불교철학-교리를 바탕으로 한 답안을 제시해야 되는 것 아냐, 저러고 있다가 또 엉뚱한 소리만 나오
올해도 각 언론에서는 어김없이 대입 수험생들이 수능고사를 치르는 모습을 보도하면서 아울러 수험생들에 대한 어머니의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는 사진을 함께 실었다. 금년에도 수험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진이 실리겠지라고 어렴풋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락없이 작년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똑같은 사진을 게재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대부분 여성불자일까? 타종교에도 열성적인 신앙의 형태를 자주 보이는데도 말이다. 지극한 모성애는 어떠한 형극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보이고 이는 종교적 신념으로까지 번지게 마련이다. 어떠한 종교를 갖든 자신의 보편적 의지는 어떤 신념에 찬 목적의식이 일어나면 냉철하면서도 열정적인 욕망의 힘을 입어 무분별한 특수한 의지로 변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교리를
'삼귀의(三歸依)'란 무엇인가.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삼보는 불보(佛寶) 즉 깨달음을 이룩한 부처님, 법보(法寶)는 부처님이 설하신 교법, 승보(僧寶)는 교법대로 수행하는 자이다. 우리가 삼귀의문을 봉독하는 것은 부처님에 귀의하고, 부처님 법에 귀의하고, 교법대로 수행하는 자에게 귀의한다는 것이다. 그럼 왜 삼보에 귀의하는가. 부처님은 최상·무상의 인격 완성자이기 때문에 귀의하고, 교법은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진실이기 때문에 귀의하고, 불교교단은 평등화합의 이상사회이기 때문에 귀의한다. 요사이 '귀의승(歸依僧)'을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귀의문은 스님·신도 모두가 같이 봉독하는 글이다. '스님들께 귀의하는 것'과 '불교교단에 귀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
사람들은 일단 자신이 선호하는 종교를 가지게 되면 상대방의 종교성향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특히 한국인의 절반이상이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국민의 종교성향은 대단한 것이다. 이 같은 종교에 대한 열정은 자신의 행복이 종교에 있다고 여겨지고 그 종교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문화가 되기까지 한다. 지난주, 우리국민은 온 나라가 법석되면서 16대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선거가 막바지에 이를 때 누구나 정치에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한마디씩 할 정도이고, 선거를 치른 후에는 '당선'의 뒷얘기에 귀를 모은다. 이런 와중에 역시 관심을 끄는 것은 대통령의 종교단체에 향한 공약에 대해서다. 대통령당선자의 불교계 선거공약이 어떻게 이행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
고려시대에는 수선결사가 있었고 백련결사가 있었다. 그리고 현대에는 봉암결사가 있었다. 우리 불교사에 있어서 이런 결사들을 서양기독교사에 비교해보면 당연히 종교개혁이 떠오른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독일에서부터 이다.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교황권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던 16세기 초엽의 독일은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과세권과 성직임명권을 둘러싼 교황청의 극심한 부패, 교리에는 눈이 먼 성직자들의 반신학적 행태.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상업 도시들은 무분별한 교황청의 간섭 아래 경제는 침체상태에 빠져들었다. 여기에 마르틴 루터가 있었다.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일하고 있던 루터는 1517년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의 항의문 발표, 세속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월성은
이제 한여름의 무더위는 지나갔지만 스님네는 여름철이면 절을 찾는 이들의 여러 가지 꼴불견을 보아야 한다. 양어깨가 드러난 옷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오는 여인이나, 반바지 차림에 색안경 쓴 남자들이다. 예전에는 바닷가 사찰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절에서도 볼 수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관람객과 실랑이를 심심찮게 해야 한다. 그리고 '스님이 왜 남이 옷 입은 것을 시비하세요?'라고 말한다. 인격과 예절을 생각하는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이 모습을 여름철이면 보아야 한다. 물론 그들 모두가 5계를 받은 재가불자는 아니다. 재가불자는 삼귀오계(三歸五戒)를 받은 뒤 다음에 한 가지를 더 다짐한다. '이와 같이 계를 받고 불자가 된 사람은 예참의(禮懺衣)인 법복을 마
해마다 되뇌는 다사다난이란 표현을 어느 해보다 더 실감으로 느낀다. 2002년은 한국인에게 그렇게 특별한 한해였다. 그중 압권은 말할 것도 없이 6월 한달 한국인들의 눈과 귀와 영혼을 사로잡은 월드컵 4강 신화 체험이다. 필자는 월드컵을 분수령으로 한국사회의 큰 흐름이 달라졌다고 본다. 유럽인들이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를 가르듯 한국은 월드컵 이전과 이후로 갈라 보아야 한다. 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라도 성공을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온 국민이 하나되어 5천년 역사에서 가장 행복한 꿈만 같은 체험을 나눈 6월을 거치며 한국과 한국인은 새롭게 태어났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생각이 달라졌고 눈높이가 바뀌었고 욕구가 달라졌다. 그 변화의 흐름은 세대교체라는 큰 물결을
3월 22일은 ‘물의 날’이다.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이 물을 마시는 것에도 그 동안 작지 않은 변화가 있어 왔다. 어릴 적 시골에 살 때는 우물물을 마셨다.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우물물은 언제나 차고 시원했다. 그러다 도시로 나와서는 수돗물을 마셨다. 약품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것이 처음에는 다소 역겨웠지만 보리차로 끓인 수돗물은 이내 적응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언제부턴가 물을 사먹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패트 병에 담긴 물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어릴 때를 돌이켜 보면 놀라운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놓고 물을 마시기도 어려운 것이 요즈음 우리네 삶이다. 이러다 언젠가는 공기마저 사먹어야 할 지 모른다. 이렇게 우리 삶의 공간인 환경이 커다란 위기에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