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인근에 ‘황실 불교음악을 연주하는 사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합천에서 해인사 찾듯 “지후아스(智化寺)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니 그때가 1999년 무렵이다. 관리인이며 안내원 모두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2016년 베이징에서 불교음악 세미나가 열려 지후아스를 비롯해 하베이(河北雄县音乐会), 시안(西安古樂), 징두(京都北韻禪樂社) 등의 연주를 보며 지후아스 찾기에 헛걸음하였던 옛 일이 떠올랐다. 그사이 인터넷 지도라는 것이 생겨 검색해 보니 자금성 건너편에 지후아스가 떴다. 즉시 택시를 타고 일대를 몇 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산업화 사회에서 타인 지향적인 유형의 사람들이 늘어나고 예전에 누릴 수 없었던 다양한 대중과 함께하면서도 끊임없이 내적 공허감을 갖는 고독한 인간의 심리에 관해 이야기했다. 참 낯설었지만, 가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허전함을 달래며 독백처럼 중얼거리던 일이 생각난다.정보화시대가 펼쳐졌다. 한 세대가 산업화시대를 거쳐 정보화시대까지 단숨에 달려와 버린 대한민국은 외적 성장이 주는 달콤한 풍요에 너무 취해 있는 듯도 하다. 외적인 성장과 번영에 비해 우리들의
국무총리가 종교·체육·유흥시설 등 다중이용시설의 운영을 잠정적으로 중단해줄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집단감염의 근거지가 되는 시설에 대해서 폐쇄나 차단이라는 강력한 법적인 조치나 명령을 내리는 대신 강력한 권고의 방식으로 자제해줄 것을 당부함과 동시에 이를 무시하고 집단감염의 사회적 폐해를 낳는 경우에는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현 정부의 코로나유행병에 대한 대응과 조치를 보면 통째로 공항을 폐쇄하거나 특정지역을 격리하는 등 과격한 대처방식이 아니라, 철저한 대응을 못한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유연
매년 이맘때면 남쪽의 매화와 산수유 등 여러 꽃소식으로 곧 봄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뉴스가 한창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사찰 한 켠에 고고히 서있는 매화나무들은 가람의 청정함과 어우러져 그 자태가 더욱 아름답습니다. 선암사의 홍매, 송광사 백매, 화엄사 흑매 등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었고 무사히 겨울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들뜨게 하였습니다. 오랜 추위를 견뎌낸 고담스러운 줄기와 수묵화 같은 가지의 휘어짐, 가지에 서로 거리를 두고 옹기종기 앉아있는 희고 붉은 꽃 등을 직접 눈으로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은 감
붓다와 그의 가르침조차 상(相)을 가지고 접근하면 안 된다는 엄격한 비판정신을 견지해 온 불가의 전통에서 ‘불자다움’을 논하고 말로 정의해 보려는 시도는 조심스럽다. 그래도 아직 불법을 못 만난 분들을 위해 우리 불자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소개하는 이야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겠다. 나는 불자답게 사는 삶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삶이라고 믿고, 불자다움이 가장 사람다움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불자다움을 논하기에 앞서 두 철학자의 견해를 빌어 ‘사람다움’이 무엇인가를 논의해 보겠다.고대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논리학과 생물학을
인류의 역사는 인공지능시대(AI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이 시대를 제4차산업혁명 시대라고도 한다. 제1차 산업혁명은 18세기 증기기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제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전기가 기계의 동력으로 쓰이면서 이루어졌다. 제3차산업혁명은 20세기의 중반부터 오늘까지 있는 일이다. 인터넷이 이끄는 컴퓨터가 모든 생산기계를 자동화시킨 시대이다. 인류는 컴퓨터로 글쓰기, 컴퓨터로 글 보내기, 사진 보내고 받기 등 많은 3차산업혁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그러던 인류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 제
작품 속 파란의 가방에 담긴 은장도는 밝음이가 자살을 계획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은장도는 할머니가 유물로 남겨준 것이다. 작품 속에서 밝음이는 할머니가 소녀시절에 끌려가 몸소 겪어야 했던 치욕과 고통의 과거를 목도한다. 일본군에게 능욕을 당한 뒤 자살하려는 할머니를 위무하는 것은 다름 아닌 파란이다. 파란의 말을 듣고서 할머니가 하는 말은 가슴 저릿하다.“그래야 나중에 너를, 예쁜 파란이와 씩씩한 밝음이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팠지. 너무너무 아팠지.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지. 온 몸에, 영혼에까지 새겨진 고통과 상처는 지
제82칙 : 관세음보살은 인지에서 원통을 증득하시고, 과지에서 중생을 구호하신다.관세음보살께서는 과거 오랜 겁에 이미 성불하시어 명호가 정법명 여래이다. 그러나 자비심이 간절하여 상적광토에 안온히 머무실지라도 실보장엄토, 방편유여토, 범성동거토에 자취를 드리우신다. 항상 부처의 몸을 나투실지라도 또한 보살 연각 성문 및 인천 육도의 몸을 두루 나투신다. 항상 아미타부처님의 신변에서 받들어 모실지라도 또한 시방 무진법계에 두루 색신을 나투신다. 그래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 있기만 하면 관세음보살께서 번창하도록 하신다. 어떤 몸으로
7세기는 공교롭게도 백제 역시 사리신앙이 대중화된 시기였다. 신라나 백제 두 나라 모두 독자적으로 중국의 선진 사리신앙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충분히 살펴본 다음 그 핵심을 도입했던 결과였다. 백제는 익산 제석사 목탑에서 불사리가 출현함으로써 대중적 관심을 모으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이때가 643년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미 이전에도 비슷한 이적이 나타난 적 있었다. 577년 2월15일, 위덕왕(재위 554~598)이 왕흥사를 짓고 불사리를 봉안할 때였다. 이 불사는 위덕왕의 아들이 갑자기 죽자 불사리를 모셔와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
세상에는 자신을 고귀하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천하다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사회적 배경, 재산, 교육의 정도, 권력 등을 갖고 귀천(貴賤)을 따진다. 요즘도 그러한데 붓다께서 재세할 당시 인도 사회는 어떠했을까? 이른바 천한 출신의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대우는 꿈에도 꾸지 못했다. 즉 인간이 아닌 동물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 한때 붓다가 사왓띠(사위성)에서 탁발을 하다가 불을 숭배하는 악기까 바라드와자(Aggikabhāradvāja)의 집으로 향했다. 바라드와자는 멀리 붓다가 오는 것을 보고는 “까까중
제4 묘행무주분의 ‘응무소주행어포시(應無所住行於布施, 머무는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와 제10 장엄정토분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이란 글귀는 ‘금강경’의 유명한 문구 가운데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 이렇게 두 문장을 놓고보면 완전한 내용을 갖춘 것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머물다’라는 동사는 타동사이므로 당연히 목적어가 필요하다. 즉 ‘집에 머물다' 등으로 어디에 머무는 지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다. 그러면 한문 원문에 해당 내용이 빠져있는가? 그렇지 않다. 바
수천년간의 인류 역사를 통해 볼 때 규칙적인 명상수행은 신체·정서·심리·영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이롭다. 하지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명상을 하면서 깊어지기 위해서는 존 카밧진 교수가 말하는 일곱 가지 수행의 기본 태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기본 태도는 상호보완적이어서 하나의 태도를 실천하면 다른 태도들이 저절로 연관되어 더욱 깊어진다. 첫째는 ‘판단하려 하지 말라(Non-judging)’다. 우리는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의 가치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판단하고 그것에 반응한다. 어떤 일, 어떤 사람 그리고 어떤 사건에
11장에서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여실하게 말로 가르치신 ‘진여’와 ‘생멸’의 두 뜻은, 마음에는 ‘본성’과 ‘형상’이 있고, ‘돈오’와 ‘점수’ 두 문이 자기 수행의 처음과 끝인 것을 확실히 판단한 후에, ‘교설’의 뜻을 놓아버리고 다만 자기 마음에 현전하는 ‘일념’으로 자세히 ‘선지’를 참구하면 반드시 증득하게 된다. 이것을 몸을 벗어나는 ‘활로’라고 한다”고 한 본문은 고봉화상(1238∼1295)의 ‘선요’ 내용으로, 마명(馬鳴, 100∼160)의 ‘기신론’에서 ‘마음’에 불변의 ‘진여’와 인연을 따르는 ‘생멸’의 두 가지
운개화상이 석상에게 물었다. “모든 집들이 문을 닫고 있을 때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집들이 문을 열어두고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석상이 말했다. “집안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운개가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반년이 지난 어느 날 바야흐로 한마디 말했다. “아무도 그를 교화할 수가 없습니다.” 석상이 말했다. “말은 그럴듯하다만 아직은 한참 모자란다.” 운개가 물었다. “스님이라면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석상이 말했다. “아무도 그를 알 수가 없다.”운개지원(雲盖志元)은 석상경제를 사법하였다. 운개가 제방을
전 세계를 마스크 속에 가둬두고 사람들 간의 만남을 두려움으로 몰고 온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 발생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가장 주된 원인으로는 잘못된 식습관이 거론되고 있다. 박쥐나 천산갑을 식용으로 사용하며 그 안에서 2차적으로 오염된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면서 이러한 공포의 질병이 된 것이다. 이러한 무분별한 식습관에 대한 경고는 인류의 의식주가 점차 풍요로워지면서부터 항상 염려되어오던 일이었다. 어쩌면 염려 이전에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인류의 식습관이 육식 위주로 변화되며 종전에 없던 새로운 질병이 생기고
‘사분율’에 의하면 다른 비구의 죄를 드러낼 때는 적절한 때와 적절하지 않은 때를 알아야 하고, 진실이며 거짓이 아니어야 하고, 이익을 주고 손해를 주지 않으며, 부드러운 말로써, 성내는 마음 없이 자비심으로 해야 한다. 영지율사는 ‘사분율행사초자지기’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첫째, 때를 알아야 한다. 죄를 드러내기 마땅한 때와 마땅하지 않은 때를 아는 것이다. 거죄(擧罪)에 적당한 시기를 알고 적당하지 않은 때는 죄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이 죄를 범했더라도 그를 따르는 문도나 속가 권속이 있는 앞에서 죄를 드러낸다면 때
코로나19로 인한 비상사태로 우리 절의 모든 기도와 법회, 행사를 멈춘 지 벌써 두 달째입니다. 경전 공부반과 어린이, 청소년 법회까지 모두 중단된 상태입니다. 금방 지나갈 듯했던 혼자만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일상의 일들이 일상이 아니게 되자, 비로소 그 가치를 느낍니다. 봄꽃 소식이 들려오는데, 마음은 겨울 속에 멈추어 있습니다. 심리적인 고통이 심해지는 우리 절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일을 생각했습니다. 핸드폰으로 사시기도를 녹음해서 모든 신도님들께 톡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지난 관음재일에는 노트북으
‘세주묘엄품’의 두 번째 권(화엄경 제2권)에는 색계와 욕계의 상수(上首) 천왕들이 성취한 해탈문이 설해져 있습니다. 또 상수들 가운데서도 대표되는 천왕들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먼저 색계 천왕으로서는 이미 앞에서 본 묘염해 대자재천왕에 이어서 4선천을 대표하는 광과천왕, 변정천왕, 광음천왕, 대범천왕의 해탈경계가 차례로 보입니다. 제4선천에 대자재천왕과 광과천왕 2류가 있어서 색계제천중이 5류중입니다. 이 천왕들은 다 적정법에 안주하고, 광대하고 즐거운 법문에 안주하며 세간에 이익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우
잘못된 세계관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잘못된 세계관이 이 사회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말한다. 사전에서는 세계 전체의 의미와 가치 등에 관해 가지는 철학적 견해라고 풀이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이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관에 따라 인간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에 인생관이라고도 부른다.기원전 6세기 붓다시대의 종교사상가들은 인간의 길흉화복의 원인을 다섯 가
코로나19보다 앞서 인류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바이러스는 자본주의다. 그 특징의 유사성은 놀랍도록 닮았다. 이 양자는 무엇보다도 무차별하다. 지역, 인종, 성별,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더구나 저항력이 약한 사람들, 경쟁에 낙오된 사람들, 낮고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더욱 짓누른다. 틈 사이로 공략하면서 오랫동안 축적한 사회시스템의 허점을 잘 이용한다. 양자는 오랫동안 잠복해 있었다. 전자는 동물의 몸에 진화하지 않은 채로 숨죽이며 있었지만, 지금은 인간 숙주를 만나 세계로 확산 중이다. 후자는 일찍이 인간의 마음을 숙주로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