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힘들어!”라는 유행가의 절규가 아프게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세상이다. 오래도록 유행하고 있는 전염병이 주는 상실과 고통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겪는 보다 근본적인 고통의 원인은 통하지 않는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동의보감’ 역시 “고통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고 적시하고 있다. 혈류가 흐르지 않으면 갖가지 병이 생기는 것처럼, 물류의 불통이 궁핍과 불편을 초래하고, 고용시장의 불통이 청년실업과 조직의 경직성을 야기하며, 인간적인 교감과 소통 부재가 불신과 갈등을 조장한다.패망한 월나라의 경제를 일으켜 세운 계연
“무슨 차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답은 커피, 녹차, 홍차, 대추차 등 다양하다. 영어로 “Would you like tea or coffee?"라고 물을 때, 보통 tea를 선택하면 홍차가, coffee를 선택하면 커피가 제공된다. 영어의 차(tea)에는 coffee가 포함되지 않는다. 차는 차나무 잎을 가공해 음료화 시킨 것을 의미한다. 마실 수 있는 모든 음료를 차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를 가공해 만든 음료일 뿐 차라고 부르지 않는다. 차잎이 없으면 차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차를 마시는
1인 가족의 증가와 주거난의 심화로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는 어지간히 쇠락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인간에게 집이란 편안함과 휴식을 주는 곳으로서 근본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귀소본능의 원천이다.집은 희망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닿기 어려운 먼 곳에 있을 것만 같은 이상과 희망도 알고 보면 결국 내가 깃들어 사는 집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 벨기에 작가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에서 희망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나섰던 틸틸과 미틸 남매가 끝내 그 파랑새를 발견한 곳도 침실 머리맡의 새장이었다던가.최근 미국 콜로라도 대학의 샘
나이 70을 훌쩍 넘긴 가수 나훈아가 세상을 울컥하게 만들고 있다. 추석 연휴 첫날에 방영한 KBS2의 ‘2020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라는 특별방송 때문이다. 특히 15년 만에 방송출연한 그가 부른 ‘테스형’이란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노래를 하다말고 중간중간에 무심한 듯 작심한 듯 던진 멘트들은 여야정치권의 아전인수를 낳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가수 나훈아의 노래에는 독특한 유머코드와 해학적 언어습관이 작동한다.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가사는 슬픈 듯, 기쁜 듯,
최근 우리 사회에 공정(公正)이란 말이 부쩍 많이 등장하고 있고, 이 말을 둘러싼 논란도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다. “도가 사라지니 도에 대한 말이 넘쳐난다”고 하는 노자의 말이 아프게 느껴진다. 몇 해 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었다. 한동안 나는 이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쉽게 재미를 느낄 수도 없는 책이 어떻게 많이 팔리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현실에서 정의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니까 정의라는 말도 그립고 그것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더 강해진 결과라 이해하게 되었다.공정이란 말에는 치우
8월 중순 수도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코로나 재확산으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더욱 강력해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한 지 여러 주째다. 사업장 일시 폐쇄로 소상공인 자영업자 분들이 겪고 계실 고통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도 공공장소에서의 의무적 마스크 착용이 몹시 불편하실 줄 안다. 그래서일 것이다. 마스크 착용을 권유하는 시민과 이를 거부하는 시민 사이의 갈등이 언론에 부쩍 자주 등장하는 것은.정부 시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 또는 세대별 문화 지체 등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막연하게 떠오르는 몇
순전히 우연이었다. ‘미스터트롯’에서 초등학생 정동원이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를 구성지게 부르는 것을 보게 된 것은. 처음엔 좀 거북했다. 보릿고개란 말의 뜻도 모를 앳된 얼굴의 13살 소년이 굳이 저런 가사의 노래까지 불러야 하나 싶어서였다. 정동원이 노래하는 동안 화면에는 원곡자 진성의 붉게 충혈된 두 눈이 클로즈업되었다. 그와 나는 베이비부머 시대에 태어났고 나이도 엇비슷한 것으로 안다. 내가 노래 속의 가사에 훅하고 감정이입(感情移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보릿고개의 첫 소절인 ‘아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는 어머니
국가적 재난의 상황이 더욱 심각한 지경으로 접어들었다. 국가적으로 힘과 지혜를 모아 대처해야 할 마당에 우리의 현실은 견해와 주장의 차이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정치와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 따른 갈등과 혼란이 이제는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방역의 문제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의 차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명백한 사실 자체를 다르게 보고 해석함으로써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은 어둡기만 하다.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설 곳이 없다”고 하는 공자의 말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이처럼 극
현재 조계종 3대 숙원사업을 꼽는다면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10․27법난 피해에 대한 명예회복 사업과 신도시 거점사찰 건립, 불교문화재 수리・보존 센터 건립사업이 아닐까 싶다. 외형적으로 보면 모두 하드웨어지만, 그 안에 채워질 소프트웨어를 생각한다면 매우 중요한 일이다.10·27 법난은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자행한 일련의 사건이다. 그리고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중들의 신성한 기도처이며 수행처인 부처님 도량을 군화발로 짓밟은 만행은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불행한 기
내 유전자에 감사하게도, 그리고 그 유전자를 전해주신 부모님과 조상님들께 감사하게도, 나는 물욕이 없는 편이다. 새로운 물건을 보고 소유욕에 휩싸인 적이 별로 없다. 대신 지녀온 물건에 대한 애착은 강한 편이다. 혹자는 삶의 투영에 대한 과도한 의미화를 지적하기도 하나, 글쎄. 나의 애착은 오히려 애니미즘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나를 잃고 홀로 남겨질 그 물건들의 쓸쓸하고 두려울 마음. 그것이 나는 그다지도 사무친다.음식에 대해서는 이렇다. 식탐에 대한 자기 검열을 하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미식이나 과식에 대한 기호는 크지
봄엔 꽃이 있어 설렜고 여름엔 비가 잦아 행복하다. 유난히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어릴 때도 그랬고 철든 지금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좋은 걸 어떡하나. 동시에 비를 끔찍하게 아꼈다. 나에게 ‘비 오는 날은 파전에 막걸리’란 말을 했다가 더러 머쓱해진 사람도 있을 정도다. 적어도 비 오는 날만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만의 방식으로 비와 대화를 시도한다. 물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와인 한 잔까지 거부하는 것은 차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다만 혼자여야 한다는
헌법에는 국가를 통치하는 기본적인 원칙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규범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요즘 우리 현실을 보면 법에 관한 시비와 논란이 그치지 않고, 법 자체에 대한 불신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왜 국가의 기본질서를 세우는 법이 통째로 흔들리고 법에 대한 회의가 이토록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성찰해 본다.지금까지 기본법인 헌법만 해도 9차례나 개정되었고 수없이 많은 법이 새로 만들어지고 개정되고 있다. 그런데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동기나 목적에 사가 깃들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철저히 공을 지향하는 법의 정당성과 권위가 적
일반인이 문화재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관심만 갖추게 된다면 그것이 곧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문화재 복원과 보존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얼마 전 소장하고 있던 ‘묘법연화경’ 보수 과정은 그러한 생각을 넓힐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문화재’란 선조들이 남긴 유산으로서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문화재는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문화 발전의 바탕이 되므로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어야 하며,
7월8일 포털사이트에서는 광주의 집단감염이 광륵사가 아닌 방문판매발이라는 내용의 속보가 일제히 떴다. 광주시는 당일 오전 광주지역 코로나19 재확산 최초 감염원으로 방문판매와 금양오피스텔을 지목하며, 역학조사결과 대부분의 집단감염이 방문 판매에서 비롯돼 금양오피스텔을 통해 퍼졌다고 설명하였다.고작 일 년에 한두 번 절에 갈 뿐이지만 그래도 불교신자라고 저 기사들이 내심 반갑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고 반 년, 불교가 한국사회의 어느 종교보다도 기민하게 방역에 앞장섰다는 자부심이 있던 터였기에, 지난달 27일 광륵사 관련 확진자 발생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시비가 끊이질 않는다. 얼마 전에는 운행 중이던 전동차가 멈춰서는 돌발 상황도 발생했다. 전철 안에서 일어난 마스크 실랑이가 원인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지난 6월22일 기준 마스크 착용을 둘러싼 역무원이나 다른 승객과 시비가 벌어져 경찰에 신고된 사건만 840건이다. 짜증이 날만도 하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장장 6개월째 강요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왜 마스크를 써야 할까. 윤리학적으로 세 가지 유형의 행위자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정부에서 결정한
나라와 사회가 온통 뒤숭숭해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서 6월 25일이 되었다. 부모에게서 생생한 이야기로 듣고 글과 영상을 통해 본 그때 전쟁의 모습은 참혹 그 자체였다. 해마다 기념식을 하고 다시는 이런 참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지만 정작 전쟁의 위험은 주변에 넘쳐나고 있다. 전쟁의 위험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전쟁의 싹이 어디서 움트는지 잠시 성찰해 보고자 한다.묵자는 전쟁을 인류가 피해야 할 최대의 악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그는 체계적인 사상으로 때로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 불철주야 전쟁을 막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였
막막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은사 홍윤식(洪潤植) 교수님의 병환을 듣고 찾아갔지만, 병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부고를 접하고 말았다. 급히 달려가니 예전의 적막감은 어디로 가고 장례식장은 많은 조문객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 접촉이 강조되는 요즈음이다. 특히나 병원, 장례식장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고 꺼리는 일들이 일상화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장례식장은 고인의 마지막을 추모하는 이들로 가득한 것이다. 아! 홍교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도 정을 많이 뿌리고 다니셨구나!
가끔 인간의 지성에 경이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해석이 정반대이거나 분분함을 볼 때가 그렇다. 각자의 입장과 소양의 차이가 존재하는 한 똑같은 견해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없는 이유도 동일하다. 보다 객관적이려고 노력은 하지만 ‘완전한 객관’은 관념에서나 존재할 이상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옳을 수 없으며 너는 항상 나쁠 수 없다.우리가 객관적이고 옳은 논리를 주장하기보다 차라리 “나의 말에는 나의 욕구와 나의 한계가 명백히 반영되어 있다.” “나의 생각에는 분명히 편견
자주 걷는 편이다. 가는 길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충무로와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는 코스다. 중간중간 안행(雁行)을 하듯 줄지어 늘어선 오색연등을 곁눈질하면서 걷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압권은 전통연등축제가 열리고 있는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형형색색의 연등들이 저마다 독창적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진지하기도 하고 익살스럽기도 하다. 겉모습은 우락부락한 사천왕상이지만 속마음은 천진난만한 동자승을 닮았다. 어느 순간 옹기종기 짝지어 앉아 있던 젊은 연인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진다. 밤
고3을 시작으로 등교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파행을 거두고 정상의 과정으로 돌아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번 기회에 파행과 역행을 거듭하는 교육이 제자리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현재 우리 교육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의 부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로, 교육의 중심과 주체가 뒤바뀌어 있다. 부모와 선생이 이끌고 아이와 학생은 따라가고 끌려가는 형상이다. 무엇을 배우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문제에조차도 부모와 선생의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