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 아니 한국 불교의 중심 도량인 서울 종로 수송동의 조계사 대웅전은, 1937년 5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38년 10월에 준공하였으니 그 역사가 80년에 지나지 않는다.불교계 뜻 모아 총본산 건립집집마다 부처님 받들기 발원본·말사 스님들도 적극 참여전북 정읍 보천교 건물 활용조선 500년 동안 불교가 핍박받으면서 서울 4대문 안에는 절을 세울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스님들의 도성 안 출입까지도 금지되었으니, 승가·재가를 막론한 불제자들은 서울 한복판에 번듯한 대웅전을 세워 무너진 불교의 자존심을 일으
현재 국내 최고급의 신라호텔이 있는 자리는 1932년부터 민족해방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일제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을 겸한 절을 세워 운영하던 곳이다.이토 사망 23년 맞아 낙성식이광수 등 친일 부역자 참석식민지 지배 위한 활동 목적본래 이곳은 1895년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인물 명성황후를 지키다가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충성심을 찬양한다’는 뜻으로 고종황제가 제단을 쌓고 ‘장충
1941년 3월4일부터 10일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 이하 법회)는, 당시 전국의 승려 6000여명 중 독신 비구승이 300여명에 지나지 않던 시절에 “조선 불교의 전통을 살리겠다”며 비구승 34명이 서울 중심가에서 개최한 대회였다. 총독부 지원을 받는 ‘권력’과 ‘세속 생활’의 맛에 물든 승려들을 상대로 당당하고 의연하게 “우리가 조선 불교의 주인공이다”며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1941년 3월 중앙선원서 열려‘경허 계승자’ 만공스님 주도끝까지 선사 의연함 보여줘당시 상황에서 이 ‘법회’
“서리와 소나무 같은 지조로 자신을 정제하고, 물에 담긴 달처럼 마음을 비우고 사람을 대하라(霜松潔操 水月虛襟).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지. 영명연수 선사 문집의 서문에 나오는 글인데, 시류와 이해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탐심으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야.”이판·사판 연연해하지 않고종단 힘들 때마다 적극 참여총무원장·승가대학장도 역임어린이법회·현판 한글화 주도2004년 ‘법보신문’의 새해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 고(故) 석주 정일(昔珠正一) 스님은 일생을 ‘서리와 소나무 같은 지조’로 꼿꼿
현재의 동국대는 1906년 명진학교, 1910년 불교사범학교, 1914년 불교고등학교, 1915년 불교중앙학림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922년 강제로 폐교되었다. 1922년 출범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이하 불전)를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40년 다시 혜화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일제의 전시동원령에 따라 4년 만에 다시 강제 폐교를 당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27일 혜화전문학교를 재개교하여 이듬해 1946년 9월20일에는 동국대학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동국대 전신…1
일제의 강제 병탄 후 불교를 관리하기 위하여 총독부에서 조선사찰령을 반포하고, 세속사회의 행정 체계에 따라 전국 사찰을 ‘본-말사’ 체제로 재편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 본사 30곳이 정해졌으며, 1915년 중앙에 ‘삼십본산연합사무소’를 두었다. 이 ‘연합사무소’는 총독부 인가를 받아 설립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총독부가 주도하였을 것이고, 총독부의 지원이 없으면 운영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연합사무소’는 탄생의 성격에 맞게 강대련 등 친일 승려가 주도하고 윤택영·박영효·권중현·한창수·이완용 등 부일협력의 대가로 작위를 받은
1929년 10월11일, 이제는 허물어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조선총독부 안의 큰 홀에서 당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1858~1936)가 입회한 가운데 조선불교대회(이하에서는 ‘불교대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육군·해군대신, 외무·사법·체신차관, 궁내대신 등 일본군과 내각의 주요 인사를 비롯하여 정토진종(淨土眞宗) 대곡사파·본원사파·불광사파 관장(총무원장에 해당) 등 일본 불교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총독이 참석하는 자리이니만큼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조선의 재계와 불교계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것
서울 개운사는 찬란한 전각 등 ‘유형’의 자산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1845년 우기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대원암(大圓庵)에 1926년 석전 한영(1870~1948) 스님이 불교전문강원(이하 ‘강원’)을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 이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큰 소임을 맡아온 ‘무형’의 자산이다.1926년 한영 스님 강원 설립청담·서정주·조지훈 등 공부현대에는 대장경 전산화 산실조계종 탄생의 주역 중 한 분이었던 청담 스님이 이 ‘강원’에서 공부했고, 신석정·서정주·이광수·조지훈·김달진 등 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와 국방에 관한 모든 권한을 빼앗긴, 이름 뿐의 ‘제국(帝國)’ 대한제국 마지막 순종황제의 황후 윤씨(시호: 獻儀慈仁純貞孝皇后. 아래에서는 ‘황후’)는 을사늑약과 한일 병탄에서 매국 행위에 앞장 선 ‘공로’(?)로 일본 정부에서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파 윤택영의 딸이다. 한일 병탄 당시 ‘황후’가 옥새(玉璽)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으려 버티며 조약 서명을 막으려 애썼으나 숙부 윤덕영에게 빼앗기고 울음을 터뜨렸던 일화는 유명하다.용성 스님과 각별한 인연불행 이겨내고 불교 귀의매일 좌선·독경하며 생활
“첫째, 불타의 구제자(救濟者)의 중심자로 큰 임무와 굳건한 행실을 가지자. 둘째, 시대에 적응한 교화방법을 만들자. 셋째, 불교 조선의 건립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통일적으로 준비하자. 넷째, 불타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불지(佛旨)를 몸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불교 교육제도의 확립을 기하자.”청담·운허 스님 등이 주도주지직 안 맡은 46명 참여불교발전 위한 다양한 논의위 네 가지 다짐은 청담·운허 스님 등이 주도하여 1928년 3월14~17일 각황사(현 조계사)에서 개최한 ‘조선불교학인대회’에서 채택한 강령이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수
“일본의 식민제국주의는 국제정세 상 가장 범죄적이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이제 문명과 인류를 타락시키는 이 같은 범죄를 씻어내고 처벌할 때가 되었습니다.”1914년 14세에 은해사로 출가범어사 만세운동·만당 등 주도해방 후 문교부장관 등 역임1927년 2월1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1회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을 대표해 참석한 범산(梵山) 김법린의 사자후였다.이 대회에는 범산 이외에 한글학자 이극로, 일제강점기 좌파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 해방 이후 북한의 최고인민회
서울 보성고등학교는 보부상 출신으로 탁지부대신에까지 올랐던 이용익이 1906년 9월 현재 조계사 경내에 세운 사립학교이다. 일제에 항거했던 이용익은 을사늑약 이후 러시아 여러 곳을 떠돌다 1907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때 고종에게 보낸 마지막 글에서 ‘널리 학교를 세우고(廣建學敎), 인재를 교육하며(人材敎育), 국권을 회복해 달라(國權回復)’는 당부를 남길 정도로 ‘민족의 미래가 교육에 달려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의 설립자도 이용익이다.)이용익이 1906년 건립한 사학1924년 불교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