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 그 경계가 끊어졌다.(極小同大 忘絶境界)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 끝과 겉이 보이지 않는다.(極大同小 不見邊表)앞에서 말한 ‘무재부재’를 다시 설명하였다. 이 구절은 『능엄경』에 ‘저 하나의 티끌 끝에 보왕찰(寶王刹)을 나투고, 가는 티끌에 앉아 대법륜을 굴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화엄법계관문에 ‘거대한 바다는 작은 물결 가운데 있지만 바다는 작은 것이 아니고, 작은 물결은 큰 바다에 널리 퍼져 있지만 물결이 큰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극소는 극대와 같고 극대는 극소와 같다. 거기에는 양쪽의 ‘경계’가 끊어지고 ‘변표’(가운데에 대한 가장자리, 안에 대한 바깥)를 보지 못한다. 사물의 크고 작은 것은 인간의 습관적인 분별에서 구별한 것으로, 도의 본체에는 크
화두(話頭)는 선을 수행할 때에 탐구하는 과제를 말합니다. 옛 선사들에게 누가 찾아가 도나 혹은 진리를 물었을 때 대답하였던 기이한 사연들이 있는데 이 대담의 화제(話題)가 되는 글, 즉 이야기 머리를 화두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옛날 덕산스님 밑에 설봉과 암두라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기 전에 덕산스님이 식사를 하려고 발우를 들고 큰방으로 갔는데, 설봉스님이 이것을 보고 “이 늙은이가 종도 치지 않았는데 어디를 가는 거야?”하고 한 마디 하였습니다. 이에 덕산스님이 고개를 숙이고 방장실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암두스님이 “안타깝구나. 덕산스님이 마지막 말(末後句)을 몰랐구나” 하고 말하였고, 암두스님의 이 말을 전해들은 덕산스님은 암두스님을 불러
진여의 세계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다.(眞如法界 無他無自)딱 맞게 상응하고 싶다면 다만 불이라고 할 뿐.(要急相應 唯言不二)진리와 하나가 된 마음, 대도를 체득한 마음에는 자타의 구별이 없고 일심과 만법이 일체가 된 세계이다. 진여법계는 ‘분별대립이 없는’ 세계, 즉 일심의 총칭이다. 따라서 나다 너다 하는 자아의 분별의 입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 대립이 끊어진 ‘진여’인 공의 경지를 아주 적절히 상응되는 말이라면 ‘불이(상대, 이원이 아닌 것)’라고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불이의 법문은 유마경의 핵심내용이다. 좬조당집』의 「투자(投子)장」에, “묻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라고 했는데, 미심쩍습니다. 화상께서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스승은 말씀하길
마음의 평등이 체득되면 분별이 모두 쉬어진다.(契心平等 所作俱息)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올바른 신심이 조화되어 곧아진다.(狐疑盡淨 正信調直)진리가 마음에 계합하고 이 마음은 대도(大道)인 것이라고 깨달으면,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는 분별은 전부 쉬어진다는 것이다. ‘계심’이라고 하는 세계에는 여우같은 의심이 완전히 없어지고 부처와 내가 하나라고 하는 신심이 확고부동하게 되는 것임을 말한다. ‘호의’는 앞에서도 나왔지만 가지가지의 생각으로 백가지의 분별을 나타내며, ‘조직’은 우두법융의 『심명(心銘)』에 “일심도 망녕되지 않으면 만 가지 인연이 조화롭고 바르다”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직’은 선가에서 많이 쓰는 용어다. ‘직관(直觀)’ ‘직절(直截)’, ‘직지(直指)’,
일여하여 체가 현묘하게 되면 우뚝하여 (만가지의 인)연을 잊는다.(一如體玄 兀爾妄緣)만법을 평등하게 보게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萬法齊觀 歸復自然)일여라는 진리의 본체는 유현해서 이로써 음미하게 되면, 견문각지상에서 구속받는 어떤 것도 없다.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절대 방해되고 걸리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앞 절에서 만 가지 존재는 일여하여 차별이 없다고 하였고, 이번에는 이러한 평등한 세계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세상사에 걸림 없는 참된 자아의 실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만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대승불교의 입장이다.‘올이’는 ‘부동’의 뜻. ‘망연’은 ‘손쓸 틈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백장광록』에는 ‘삼조가 말하되,’라고 하여 ‘마음, 목석과 같이’라고 하여 예를
미혹하기 때문에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고 싫음이 없다.(迷生寂亂 悟無好惡)모든 것에 대한 두 변은 헛되이 스스로 짐작함에서 생긴다.(一切二邊 浪自斟酌)미혹한 마음이므로 언제나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겨 한없이 환영을 따르지만, 모든 존재는 정해진 모습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좋고 싫을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본래의 마음을 잃게 되면 이원적 대립이 생기지만 깨달으면 그 대립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원적 대립은 자신이 분별하여 헤아리는 것에 의해 일어나는 것. ‘짐작’은 본래 ‘술을 대작한다.’라는 뜻이다. 즉 ‘사정을 생각해서 정도껏 잘 배려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자아의 분별을 의미한다. 대립된 분별은 자아의 망상에서 만들어져 나온 환상(幻想)이라는 것이다.꿈과 환상, 헛된
Q : 돈오(頓悟)란 무엇입니까? A : 돈오는 ‘즉시 깨달음’을 말합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에 대해 설명하길 ‘돈(頓)이란 단번에 망념을 없애는 것이요, 오(悟)란 얻을 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頓者頓除妄念 悟者悟無所得)’라고 말하였습니다. 돈(頓)이란 즉시, 단박, 일순간, 단번이라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은 단계를 밟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깨달을 때는 어느 한 순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頓悟)’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대주스님은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에 대하여 ‘얻을 바 없음을 깨닫는 것(悟無所得)’이라고 확고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즉, 깨달음은 특이한 어떤 것을 얻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 적인 것이든 개념적인
좋아하지 않으면 정신이 피곤하나니 어찌 (도에)소원함과 친근함이 있을까?(不好勞神 何用疎親)일승을 얻고자 한다면 육진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欲趣一乘 勿惡六塵)참다운 수행이란 무엇일까? 다만 좌선만에 집착하게 되면 의식이 혼침해서 정신마저 지쳐 오히려 좌선수행조차 수고로울 뿐임을 강조한다. ‘본래면목’이 도인데 달리 수행을 통해 도에 가까이해야 한다든가 성글어진다던가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것이다. 친·소는 자아의 분별일 뿐 일승의 가르침을 체득하려고 한다면, 육진 즉 육경(六境)을 싫어하고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육진은 육근에 대한 객관으로써 ‘본래심’의 거울을 덮었을 때 그것은 티끌이다. 다시 말해서 육진을 싫어하여 마음을 청정히 하고자 좌선에 집착하다 보면 일종의 선에 대한 친·소가 생겨 도리어
대도는 체가 넓어서 쉽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것이 없다.(大道體寬 無易無難)소견은 여우처럼 의심이 일어나 급하게 서두르면 더욱 늦어진다.(小見狐疑 轉急轉遲)장승업의 송하노송도(19세기)대도는 그 자체가 넓어 쉽게 가거나 어렵게 간다는 구별이 없는데, 다만 자아의 소견이 생겨나 급하게 서두르면 서둘수록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늦어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당대 방거사는 어느 날 토굴에서 좌선하고 있는 도중,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어렵고 어렵고 정말 어렵구나, 열섬의 깨가 나무 끝에서 격류하고 있구나.” 이번에는 방거사 부인이 “쉽구나 쉽구나 정말 쉽구나, 침상에서 내려와 땅을 밟는 것처럼.” 이를 듣고 딸, 영조가 말했다.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백가지 초목의 맨 끝머리, 조사의 뜻이다.” 대
경(객관)은 능(주관)에 의한 경이며 능은 경에 의한 능이다.(境由能境 能由境能)양단을 알게 되면 본래 이것은 (동일한)하나의 공이다.(欲知兩段 元是一空)최북의 관수삼매도(18세기)분별이 없고 집착이 없는 ‘일심불생’의 경계에서는 그 지반이 ‘일공(一空)’임을 밝힌다. 능은 주관이라고 하는 일심이며 경은 객관이라고 하는 환경이다. 『수능엄경』에 “소(所), 이미 망(妄)에 서면 그대가 망, 능이 따라 일어난다.”라고 한다. 능과 경, 주관과 객관의 상호성과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진여의 세계는 무법(無法)이며 무심이다. 무심 즉 무법의 세계는 지도(至道)가 현성한다. 심 즉 능이 없어지면 경도 사라지는 세계이며 경이 사라지면 능 즉 심도 사라진다. 이 둘이 사라진 곳에 이를 참된 공이라고 한다.
두 견해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추구해서도 안된다.(二見不住 愼莫追尋)조금이라도 시비가 나타나면 어지러이 본심을 잃게 된다.(才見是非 紛然失心)두 견해는 간택, 증애, 순역, 위순, 등의 이원적인 분별이다. 이러한 견해의 집착은 ‘양변에 걸리는 것’이 된다. 또한 분별의 견해로 추구해서는 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판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본심 즉 ‘신심’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동산록』에 이런 일화가 있다. 동산스님이 행각하고 있을 때, 관리 한사람을 만났다. 그는 지식인이면서 불자였다. 스님에게 “제자는 3조선사의 『신심명』의 주석을 쓰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신심명』에는 ‘조금이라도 시비가 있으면 어지러이 본심을 잃는다’고 했는데, 그대는 어떻게 주석한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임에서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은 다시 미동한다.(心動歸止 止更彌動)오직 양변에 걸려 있으니 어찌 한 모양을 알까.(唯滯兩邊 寧知一種)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하면 할수록 본심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우두법융은 『심명』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게 하면 도리어 흩어진다”고 하였고, 『종경록』에서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깨달음이 늦어지는 것을 우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움직임·그침, 진·망, 유·무의 양변의 세계에 걸려 있다면 일종(一種)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한 모양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모두 공력을 잃고(一種不通 兩處失功),있음을 버리려 하면 있음에 떨어지고 공에 따르려 하면 공과 등진다.(遣有沒有 從空背空)일종을 통달하지 못하면 양변 자체의 공력을 잃게 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