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옛 서독의 수도였던 본(Bon)의 올드 시티에서 지내고 있다. 성 마리아 성당 근처 100년이 넘은 아파트 4층을 숙소로 빌렸는데, 거실 창문 바로 앞 성당에서는 아침 8시부터 시작해서 매 시간마다 종을 울린다. 특히 낮12시와 일요일 미사 시간엔 5분 이상 종을 치는데, 뮌스터 대성당 종소리와 어우러져 빨리 성당으로 오라고 재촉하는 느낌을 준다. 기독교 신자가 점점 줄어드는 유럽에서 이곳 본은 50% 가까운 사람이 성당을 다닌다고 하니, 열심히 종을 치는 보람이 있을 듯하다. 불교가 국교 역할을 하던 통일신라와 고려는
중국사에서 당대 못지않게 그 이전 시기인 동한∼위·진·남북조 300년간에 걸쳐서도 문화와 철학이 발전했고, 청담사상이 풍부했던 시대이다. 불교적으로는 역경 사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무렵, 520년에 달마가 중국으로 건너왔다. 달마만큼 중국 선종사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도 드물다. 반면 달마가 실제 인물인지? 가상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달마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있다. △달마와 양무제가 만나 대화하다. △달마가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하다. △2조 혜가가 달마 앞에서 단비(斷臂)하다. △당시 유명한
인간불교를 기치로 대만 불광산사를 창건한 이래 한평생 불교문화 진흥, 교육, 자선사업 등에 온힘을 기울여 온 성운 대사가 2월5일 불광산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97세, 법랍 85세.성운대사는 2016년 뇌출혈로 쓰러져 큰 수술을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회복돼 집필, 법문 등 활동을 이어왔다. 하지만 근래 병세가 다시 악화됐으며, 입적 당시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엄염불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입적한 것으로 전해졌다.‘대만의 스승’으로 불리는 성운대사는 1927년 중국 장쑤성 장두(江都)에서 태어나 12세 때 난징 서하산 대
광주 보은사(주지 도제 스님)가 1월8일 보은사 2층 법당에서 자비명상 마가 스님(옥천사 주지)을 초청해 ‘마가 스님 초청 떡국데이 법회’를 갖고 백고좌법회의 시작을 알렸다. 이번 행사는 광주 보은사가 매달 1명의 고승을 초청해 법문을 청하는 자리다.보은사 주지 도제 스님은 “광주(光州)라는 지명은 무량광 아미타부처님이 상주하는 빛고을이다”라며 “보은사에서 매달 한 분씩 큰 스님을 백분을 모셔 법을 청하는 백고좌 법회로 빛고을 광주를 부처님의 세상으로 만들자”고 말했다.옥천사 주지 마가 스님은 ‘잠깐 멈춤’이라는 주제로 “세상에서
독립운동가이자 근세 불교 중흥조인 진종용성 스님(1864~1940)의 일대기를 만화로 만날 수 있게 됐다.중견만화가 정수일씨가 최근 ‘한국 근세불교의 큰스승, 용성 스님’을 출간했다. 편양언기, 원효대사, 사명대사, 만해 스님, 경허선사에 이은 운주사의 만화고승열전 시리즈 여섯 번째다.작가는 역사의 격동기에 선사, 율사, 독립운동가, 대중포교사, 불교개혁운동가, 역경가, 저술가 등의 활동으로 한국불교를 일으켜 세운 용성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흥미롭게 그려냈다.용성 스님은 1864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4세에 출가했으나 부모님의
의상(625~702)은 원효(617~686)와 함께 신라중대의 새로운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런데 그들에 관한 전기 자료는 의외로 많지 않아 자세한 행적을 밝히기가 극히 어렵게 되었다.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효는 재가불자로서 승속을 넘나드는 무애한 교화 활동을 전개하면서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거나 교단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후 그의 불교는 제대로 전승될 수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전기 자료와 함께 저술들도 온전히 전승되지 못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제강점기는 장구한 한국 역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주권을 빼앗긴 암흑기였다. 한국불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존망의 갈림길에 섰을 무렵 영축산의 구하천보 스님(1872~1965)과 오대산의 한암중원 스님(1876~1951)은 같은 문중의 사촌 사형제로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잇고 지평을 넓히는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구하 스님은 학교 설립, 포교당 건립에 두드러진 행적을 남겼다. 명신학교(현 하북초)와 불교명신학교를 시작으로 입정상업학교(현 부산해동고), 통도중학교(현 보광중) 등을 설립했으며, 통도사 마산포교당의 대자
지난 호에서 중국불교의 다양한 양태에 대해 언급했다. 이번 글은 한족이 발전시킨 불교[禪]를 중심으로 한다. 중국불교가 어떻게 유입되고, 발전되었는지 2000년의 전체 흐름을 보면, 후한 시대[A.D. 1세기]는 중국에 불교의 ‘씨앗’이 뿌려진 단계이고, 위진남북조 시대는 ‘뿌리’가 내리고 튼튼한 ‘가지’가 형성된 단계라고 본다. 당나라∼남송대 초기는 ‘수많은 잎’들이 무성함과 동시에 ‘열매’가 풍성하게 열린 단계이고, 남송대 말기∼근자까지 더이상 열매가 열리지 않고, 가지도 줄었으며, ‘고목’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이다[‘고목’은
[1665호 / 2023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영웅들이 소설로 탄생됐다. 삼국시대 가장 처절했던 전쟁을 겪었던 난세의 명장들과 왕들의 지략과 권모술수,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고승들의 지혜의 목소리가 소설 속에 가득 담겨 있다. 치열했던 인생과 사랑, 삶의 사슬들이 간결하면서도 빠른 전개와 아름다운 문체로 재미있게 쓰여진 소설이다.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조상들 지혜와 용기를 배우며 선조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서사적 소설이다. 임창석 지음, 아시아북스, 1만6500원.[1664호 / 2023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여래의 법신은 불가사의라. 색도 없고 상도 없고 견줄 데도 없도다. 그러나 중생 위해 색신을 드러내시니, 시방 어디든 그 모습 보이지 않는 곳 없다네.”(‘60화엄 노사나불품’)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선정에 잠긴 채 정각(正覺)을 이룬 순간, 그는 ‘깨달은 자’ 불타가 되고, 동시에 법신으로서의 노사나불(비로자나불)로 현현한다. 석가모니불은 침묵하지만 동시에 교설은 보살의 입을 통해 끝없이 펼쳐지며, 그 속에서 불타를 말하고, 세계를 말하며, 중생을 말한다. 그렇다면 ‘화엄경’의 불타관과 세계관을 시각문화의 영역에선 어떻게 표현할
의상(625~702)이 생존하였던 7세기 후반기는 신라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이 기간은 ‘중고’기의 26대 진평왕(579~632)·27대 선덕여왕(632~647)·28대 진덕여왕(647~654), 그리고 ‘중대’기의 29대 태종무열왕(654~661)·30대 문무왕(661~681)·31대 신문왕(681∼692)·32대 효소왕(692∼702) 등 6인 국왕의 재위 기간에 해당되는데, 신라의 역사를 ‘중고’기에서 ‘중대’기로 구분케 할 만큼 커다란 사회적·사상적인 변혁기였다. 우선 대내적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지배체제
[1664호 / 2023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세계문화유산이자 화엄종찰 영주 부석사의 전성기 사역은 어디까지였을까. 현재의 부석사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남쪽 산기슭에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남북 축선상에 이어져 있다.그래서 부석사와 관련된 연구나 조사는 주로 현재의 사역에 국한에 이루어져 왔지만 구전에는 무량수전 동서 10리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 동쪽 보물 제220호 석조여래좌상이 있었던 북지리 179번지 일대는 한때 동방사지(東方寺址)로 불렸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방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에 있는 절터라는 뜻이 와전돼 그렇게 불렸다
인도와 동아시아는 불교를 매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한국의 구법승들이 중국을 넘어 인도로 갔듯 인도의 고승들이 직접 한반도에 와서 불법을 전하고 일으켰다.기록에 따르면 불교는 인도에서 서역과 중국, 혹은 남방 해양을 통해 전래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중국 북방 육로를 통해 전해졌다. 지루가참(支婁迦懺), 지겸(支謙), 축법란(竺法蘭), 구마라즙(鳩摩羅什), 순도(順道) 등은 서역 승려이다. 순도는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반하여 불도징(佛圖澄), 달마(達磨), 지공(指空) 등은 천축국 즉
△535년 법흥왕비, 영흥사 창건 △595년 5월, 고구려 고승 혜자, 일본에 건너가 황태자 풍총의 스승이 됨 △643년 신라 자장, 당에서 복귀하며 불사리 1백·불정골, 불아(佛牙) 및 불소착 비라금점가사·삼장 4백여함 가져옴. 기림사 창건 △751년 대상 김대성이 불국사 및 석불사 창건 △919년 고려태조, 10개의 사찰 도내에 창건 △991년 4월 송에서 대장경 481함 2500권을 가져옴 △1051년 문종, 오백나한재를 개설 △1097년 2월 국청사 준공 △1231년 왕이 몸소 승려 3만명 공양 △1363년 11월 지공선현
“인내·용서하는 화해 덕성 길러야”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신령스러운 광채가 새 아침을 장엄하니집집마다 無盡福樂(무진복락)을 이루는 門(문)이 열리고하늘이 天機(천기)를 움직여 한없는 공덕을 풀어내니萬物(만물)은 利澤(이택)을 입고 환희의 눈을 뜹니다.곳곳에서 장악을 무너뜨리는 法雷(법뢰)가 일고 大施門(대시문)이 열리니十方(시방)에 가득한 障礙(장애)가 구름처럼 사라지고頭頭物物(두두물물)이 제 몸을 풀어 本分消息(본분소식)을 전하니걸음마다 普門(보문)이요 이르는 곳마다 圓通(원통)입니다.생각생각은 깨달음으로 이어져 부처를 빚어
순천 선암사, 문경 봉암사, 대구 동화사, 구례 천은사의 일주문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됐다. 사찰 일주문이 보물로 지정된 건 2006년 ‘부산 범어사 조계문’ 이후 두 번째다.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12월28일 사찰 일주문 4곳과 ‘고성 옥천사 자방루’ ‘성남 봉국사 대광명전’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탑’을 보물로 지정했다.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산문(山門)이다.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정문이기도 하다. 통상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내가 나의 참모습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나의 참모습을 여러 조사께서 갖가지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 설명을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우리나라 함허 선사께서 풀어주셨습니다. 이 강의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와, 내가 그렇게 멋진 놈이로구나. 그런 줄 모르고 있었구나.’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금정총림 방장 지유 대종사가 ‘함허 득통 대선사의 금강경 서문’을 선(禪)의 이치로 명쾌하게 풀어내는 5일간의 정진 법석이 사부대중의 동참 열기 속에서 출발했다.범어사(주지 보운 스님)는 12월27일 경내 보제루에서 ‘금정총림 범어사 지
어렸을 때 외할머니를 따라 종종 절에 갔었다. 할머니가 불공을 드리는 동안 마당에서 혼자 놀다 보면, 가끔 스님도 아닌데 절에서 사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몸이 아파서 절에서 정양하는 분이었다. 2002년 박사논문 ‘신라의학사연구’를 제출하면서, 한국고대의학이 불교의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찰이 몸이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장소가 된 것은 절이라는 공간이 생긴 이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내리기까지 의료선교사들의 활약에 큰 도움을 받은 것처럼, 불교가 처음 한반도에 전파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