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양개 스님의 상좌가 설법했다. “신기하구나! 도의 세계여, 불가사의한 경계여!” 동산 스님이 상좌에게 물었다. “도계다 불계다 하는 것은 묻지 않겠으나 도계다 불계다 하는 이는 어떤 사람인가?” 상좌가 말이 없자 동산 스님이 재촉했다. “왜 말을 못하는가?” “다투면 얻지 못합니다.” “하란 말도 못하고서 어째서 다투면 얻을 수 없다 하는가?” 상좌가 말이 없자 동산 스님이 말했다. “부처나 도는 이름뿐이니 경전을 인용해 대답해 보라.” “경전에선 무엇이라 했습니까?” “뜻을 얻고는 말은 잊으라 했다.” “아직도 경전의 뜻을 마음에다 두어 병을 만드시는군요.” “도계다 불계다 하는 자는 얼마나 병이 들었는가?” 상좌는 그 일로 목숨을 마쳤다.
사명(思明) 스님이 하루는 보수(寶壽) 스님을 찾아 물었다. “화성(化城, 방편)을 짓밟아버릴 때는 어떠합니까?” 이에 보수 스님은 “날카로운 칼은 죽은 자를 베지 않는다”했다. 이에 사명 스님이 “뱁니다”하자 보수 스님은 대뜸 후려쳤다. 사명 스님이 이에 그치지 않고 열 번이나 “뱁니다”하자 보수 스님도 열 번 치면서 말했다. “무엇이 그처럼 다급해 죽은 시체를 지키려다 뼈아픈 방망이에 얻어맞느냐?” 이 말을 남긴 보수 스님은 나가버렸다. 그 때 한 스님이 보수 스님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대화했던 스님이 무슨 말을 했기에 스님께서는 방편으로 제접하셨습니까?” 보수 스님은 또다시 후려친 후 이 스님을 내쫓아버렸다.
Q : 선문답이란 무엇입니까? A : 선문답은 선지식에게 내방객이 찾아와 대담할 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기연언구(奇緣言句)의 수행자들 문답을 말합니다. 선지식은 평이한 언어로 사람을 깨닫게 하기도 하지만, 가끔 깊은 뜻이 담겨있는 한 마디를 던져서 깨닫게 하기도 합니다. 선문답은 부처님께서 초기 소승불교를 설할 때에 주로 비유를 들어 사람을 깨닫게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문답은 통상 세 종류의 질문 답변이 있습니다. 첫째는 질문의 내용에 맞는 간단한 비유나 상징으로 대답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경우입니다. 부처님처럼 긴 말은 아니고 짧고 간결한 말인데 듣고 난 다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둘째는 말로서 상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흠산(欽山) 스님이 동산 양개 스님을 찾아가자 동산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오느냐?” “대자(大慈)스님에게서 옵니다.” “스님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색(色) 앞에서 보았느냐, 색 뒤에서 보았느냐?” “앞뒤가 아닌 자리에서 보았습니다.” 동산 스님이 이에 묵묵히 있자 흠산 스님이 말했다. “저는 너무 일찍 스승을 떠나 스승의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흠산 스님이 암두, 설봉 스님과 앉아 있을 때 동산 스님이 차를 내었다. 흠산 스님이 눈을 감자 동산 스님이 말씀하셨다. “어디 갔다 왔느냐?” “선정에 들었다 왔습니다.” “선정은 본래 문이 없는데 어디로 들어갔느냐?”
조산 스님이 지의도자(紙衣道者)가 찾아오자 물었다. “지의도인이 아닌가?” “예” “무엇이 종이 옷 속의 일인가?” “옷 하나 몸에 걸쳤다 하면 만법이 모두 다 여여합니다.” “무엇이 옷 속의 작용이더냐?” 지의도인은 앞으로 가까이 가 끄덕끄덕하더니 선 채로 죽어버렸다. 이에 조산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렇게 떠날 줄만 알고 어째서 이렇게 올 줄을 모르는가?” 그러자 지의도인이 홀연히 눈을 뜨며 물었다. “신령하고 진실한 성품 하나가 어미 뱃속을 빌리지 않을 땐 어떻습니까?” “오묘함은 아니다.” “어찌해야 오묘함입니까?” “빌리지 않는 빌림이라네.” 지의도인은 “안녕히 계십시오.”하더니 그대로 천화해 버렸다.
동산 양개 스님이 운거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느냐?” “산에 갔다 왔습니다.” “그 산은 머물만 했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도성 안이 모조리 너에게 점령되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들어갈 길을 얻었군.”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다면 어떻게 나를 보겠는가.” “길이 있다면 스님과 사이에 산이 있어 막히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은 훗날 천 사람 만 사람이 붙들어도 머물지 않을 것이다.” 동산 양개 스님이 운거 스님과 물을 건너던 중에 물었다. “물이 얼마나 깊은가?” “젖지 않을 정도입니다.” “덜렁대는 사람이구나.” “스님이 말씀해 보십시오.” “마르지 않을 정도다.”
「금강경」을 경청하던 방거사가 좌주에게 물었다. “속인에게 질문이 있는데 여쭤도 괜찮습니까?” “의심이 있거든 물어보시오.” “경전에 아상도 인상도 없다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강론하고 누가 듣는 것입니까?” 좌주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문자를 따라 의미를 이해할 뿐인지라 그 뜻은 모르겠습니다.” 이에 방거사가 송을 지었다. 나도 없고 남도 없는데 무슨 가까움과 먼 것이 있겠는가. 그대에게 좌주살이 그만 하라고 권하노니 어찌 참을 구하느니만 같겠는가. 금강반야의 성품은 하나의 가는 티끌마저 없고 여시아문에서 신수봉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그저 붙여 본 이름일 뿐.
단하 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산 아래서 왔습니다.” “밥은 먹었는가?” “예” “너에게 밥을 준 사람은 안목을 갖췄는가?” 스님은 말이 없었다. 이들 두고 장경 스님이 보복 스님에게 물었다. “밥을 주었으니 은혜를 갚을 만한 자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 했을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둘 다 장님이다.” “그 기틀을 다해도 장님이 되었겠는가?” “나를 장님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정주 스님 회하에 있던 한 스님이 오구 스님을 찾아오자 오구 스님이 물었다. “정주 스님의 가르침은 이곳과 무엇이 같으냐?”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지 않다면 다시 가라.” “방망이 끝에 눈이 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쳐서는 안 됩니다.” 오구 스님은 “오늘은 한 놈만 친다”며 또 한대 후려쳤다. 스님이 나가 버리니 “억울한 방망이를 얻어맞는 놈이 있기는 있었구나.” 나가던 스님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국자 자루가 스님의 손아귀에 있는데 어떡해야 합니까?” “그대가 필요하다면 돌려주겠다.” 스님이 앞으로 다가와 오구 스님의 방망이를 빼앗아 세 차려 후려쳤다. 이에 오구 스님이 말했다. “억울한 매로군.” “누가 맞고 있습니까?” “경솔하게 치는 놈이군” 스님이 문득 절을 올리자 오구
거양 선객이 흠산 스님에게 물었다. “한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격파했을 때는 어떠합니까?” “관문 속에 있는 주인공을 내놔보아라” “잘못이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당장 고쳐보아라.” “화살은 잘 쏘았으나 맞지는 않았습니다.”하고 거양선객은 바로 나갔다. “잠깐, 스님!”하고 부르자 거양선객이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흠산 스니이 멱살을 잡고 말했다.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하는 것은 그만두고 저 흠산에다 화살을 쏘아 보아라.” 거양 선객이 머뭇거리자 흠산 스님이 일곱방망이를 치면서 말했다. “이놈이 앞으로도 30년은 더 헤매야 정신을 차리겠군.”
어떤 사람이 선지식의 설법을 듣고 즉시 자기를 알고 깨달아서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부처의 심성을 회복하였다 하여도 어떤 일을 당하여서는 미미하게 흔들리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담배를 못 끊던 사람이 의사가 ‘당신은 폐암 4기요!’ 라고 말하는 한마디를 듣고 즉시 담배를 원하는 마음을 끊었지만(頓悟頓修), 그래서 담배를 안 피우던 과거로 되돌아갔지만, 몸에서는 여전히 니코틴 중독이 발동하여 담배를 원하는 유혹이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사람(頓悟者)은 유혹에 끌려가지 않고 즉시 원하는 마음을 중지시킵니다. 이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게 되면 다시는 담배 유혹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돈오를 얻은 사람도 부처
장사 스님이 하루는 산에서 내려와 문 앞에 이르자 수좌가 물었다. “스님은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지는 꽃을 따라 돌아왔느니라.” “아주 봄날 같군요.” “아무렴,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 낫지.” 장졸이라는 진사(進士)가 『천불명경』을 보고 장사 스님에게 물었다. “백천의 많은 부처님에 대해 들었지만 도대체 어느 국토에 거처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있습니까?” “최호가 ‘황학루’시를 쓴 이후로 그대는 황학루에 관한 시를 쓴 적이 있는가?” “아직 쓰지 못했습니다.” “한가할 때 시 한 편 써보는 게 좋겠네.”
Q : 수행이란 무엇인가요? 또 견성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A : 수행이란 ‘닦고 행함’ 또는 ‘행을 닦음’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완전한 상태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면 구태여 수행이라는 과정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금생은 물론이고 전생부터 습관들여서 굳어버린 지독한 중독증세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탐진치(탐욕, 분노, 어리석음) 3독입니다. 사람은 현재 내부적으로는 부처의 심성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과거의 습성에 이끌려 어리석은 마음을 쓰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마음을 단련하고 수련하는 일을 해야 중독증세를 제거하고 본래 부처의 심성과 행동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두 가지 수행이 있습니다. 첫째는 초심자 수행입니다. 초심자는 무엇보다
조주 스님이 하루는 땅을 쓸고 있는데 한 스님이 물었다. “선지식이신데 어떻게 해서 티끌이 있습니까?” “바깥에서 온 것이다.” “청정한 가람에 어떻게 해서 티끌이 있습니까?” “여기 티끌 한 점(질문한 스님)이 또 있구나.”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저 담 너머에 있다.” “이런 길을 묻지 않고 대도를 물었습니다.” “큰 길은 장안(長安)으로 뚫려 있다.” 조주 스님은 이렇듯 우리 주변에 벌어지는 일을 갖고 후학을 제접했다. 꼭 칼날을 상하거나 손을 다치지 않아도 고준하면 이렇듯 멋진 기봉을 쓸 수 있다.
Q : 본래성불(本來成佛)이란 무엇인가요? A : 본래성불은 부처님의 정통 교설입니다. 『원각경』 보안보살장에 ‘중생은 본래 성불한 것이니 생사와 열반이 지난 밤 꿈과 같은 줄 알지니라.(始知衆生 本來成佛 生死涅槃 猶如昨夢)’라고 하였고, 보살계에서는 ‘본래 근원인 자성은 청정하다(本源自性淸淨)’라고 하였습니다. 육조스님은 보살계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짓고 받는 것이 자성법신이고, 스스로 행함이 부처의 행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善知識 見自性自淨 自修自作 自性法身 自行佛行 自作自性佛道)'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자기가 부처이므로 선행을 행하여 복을 받게 하는 자도 자기이고, 악업을 지어 고통을
조주 스님이 투자 스님에게 물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야간 통행하지 말고 날이 밝으면 가거라.” 투자 스님의 법거량은 다 이와 같았다. 한 스님이 투자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입니까?” “도이니라.” “무엇이 부처입니까?” “부처니라.”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열려 있다.” “천지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그런 소리는 없다.” “천지가 생긴 뒤에는 어떠합니까?” “저마다 시간을 갖겠지.”
염불은 삼학 갖추도록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근본 염불은 수승한 업장소멸법 부귀영화도 염불보다 못해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지만 번뇌의 업장에 가려져 나타나지 못하는 아미타불을 극락세계의 아미타불로 변하게 하는 것은 간절한 정토염불의 힘이다. 아미타불 48대원은 염불에 힘입어 중생의 번뇌 업장을 영원한 극락세계 아미타불의 법신과 반야로 전환되게 한다. 육근을 거두고 일심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불러 생각의 경계가 고요하고 마음이 텅 비면 불성이 저절로 드러나 곧 부처님 지견에 들어가 자성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염불은 모든 수행문중에 가장 수승하다. 『문수반야경』에서 문수보살은 “내가 임종할 때 모든 마장 없어지고 극락세계 왕생하여 모든 소원 성취하고 그 자리에서 아미타불께 수기를 받
Q : 시도 때도 없이 끓어오르는 불만으로 무척 괴롭습니다. 염불을 하면 그런 상태가 호전될까요? A : 우리의 참생명은 본래부터 무한공덕으로 자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한마디로 공덕이란,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자기 삶의 내용으로 발견치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공덕이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하지만 참생명의 가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공덕은 아무런 인연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온갖 죄업의 당사자가 되고, 그에 따른 응분의 과보를 받아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따라서 항상 무한공덕 속에 사는 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 살고 있다는 은혜, 숨 쉬고 있다는 은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사소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조주 스님 돌다리의 소문을 들은지 오래인데 막상 와 보니 외나무다리 뿐이군요.” “그대는 외나무 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는 보지를 못했다.” “어떤 것이 돌다리입니까?”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조주 스님이 수좌와 함께 돌다리를 구경하다가 수좌에게 물었다. “누가 만들었는가?” “이응이 만들었습니다.” “만들 때 어디부터 손을 댔는가?“ 수좌가 말이 없자 말했다. “평소에는 돌다리 돌다리 말하면서 물으니 손을 댄 곳도 모르는구나.” 조주종심(趙州從諶, 778~897)은 산동 조주 사람으로 속성은 학씨다. 남전보원의 법을 이었으며 송대 선종오가에 큰 영향을 끼쳤고 화두를 많이 남겼다.
한 스님이 동산 스님에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다가오는데 어떻게 피하시렵니까?” “왜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 “추위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요?” “추울 때는 스님을 춥게 하고 더울 때는 스님을 덥게 한다.” 이와 유사한 거량을 하나 더 보자. 조산 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이처럼 무더운 날씨에 어디서 피서하려느냐?” “확탕·노탄 지옥에서 하겠습니다.” “지옥서 어떻게 피서를 하겠느냐?”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황룡오신 스님이 말했다. “선(禪)을 함에 산수(山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이 사라지면 불은 저절로 시원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