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룸비니 · 보드가야 부처님을 사진으로 만나세요룸비니 동산 부처님 탄생상룸비니 법당안 - 발굴하기전에 모셨던 부처님 탄생상 마야부인이 무우수나무를 붙잡고 아기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걸음을 걸은 다음 천상천하유아독존 보드가야 대탑 부처님부처님께서 성불하신 최고의 성지보드가야 마하보디사원 대탑 내 부처님 항마족지인상사르나트 초전법륜상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초전법륜상으로 인도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품(5세기)파키스탄 부처님 고행상부처님이 6년간의 극한 고행을 표현한 고행상으로 라호르박물관소장(2세기)우주의 중심, 수미산달마
동양의 종교 중에서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 있어서 불교가 단연 선구적이었다. 불교도 처음에는 스투파(불탑) 외에는 별다른 물질문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점차 불상 같은 시각물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물질문화의 생산에는 많은 돈이 들기 마련이니, 자연스레 그 바탕에는 불교 특유의 경영관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참선을 중시하고 무소유를 강조하는 불교가 왜 이렇게 물질문화 생산에 적극적이었을까? 불교경영에 대한 물음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선 ‘불교경영’이라고 하면 불교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
인도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유물로써 존재한다. 붓다의 흔적만이 거대한 유적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붓다의 삶의 현장에서 충만한 깨우침보다 무상한 세월과 공간의 황량함에 직면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 세계 불자들은 인도로 향한다. 붓다의 숨결을 찾아 성지를 순례한다. 그곳에는 붓다의 가르침과 깨달음의 벼리들이 존재하리라는 확고한 믿음 혹은 간절함 때문이다. ‘삶이 고(苦)일 때 붓다, 직설과 미술’은 놀라운 책이다. 붓다의 삶과 수행의 여정을 눈으로 읽고, 촉감으로 느끼고, 뇌로 해석하고, 궁극적으로 마음에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주한 파키스탄 대사를 통해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소장 ‘부처님 고행상’의 한국 전시를 제안했다.진우 스님은 11월28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접견실에서 나빌 무니르 주한 파키스탄 대사의 예방을 받고 "내년 한국-파키스탄 수교 40주년을 맞아 파키스탄의 부처님 고행상이 한국에 전시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부처님 고생상’은 간다라 미술(고대 인도 북서부 간다라 지방(現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발달한 그리스ㆍ로마 풍의 불교 미술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스님은 “한국과 파키스탄은 4세기 경 파
칼이나 창을 든 채 악행을 한 사람이나 마귀를 밟고 서 있는 사천왕상은 눈을 부릅뜨고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흔히들 ‘분노상’이라 하고, 두려움을 준다고들 하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내가 사천왕상을 볼 때마다 받는 인상은 따뜻하고 유머러스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 점이 무엇보다 놀랍다. 더없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따뜻하고, 위협적 동작을 하고 있는데 유머러스한 느낌을 줄 수 있다니! 개인적인 얘기를 덧붙이자면, 나는 절에 있는 상들 가운데 사천왕상을 가장 좋아한다. 사천왕상만큼 많지는 않으나 금강역사상도 그렇다
다양한 사상과 종교, 언어, 민족이 공존하는 파키스탄에서 견고히 뿌리내린 불교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파키스탄의 불교문화유산’이 공개됐다. 동서 문화의 가장 성공적인 융합이라 평가받는 간다라 미술도 깊이 있게 조명돼 흥미를 더한다.주한파키스탄 대사관은 6월28일 용산 전쟁기념관 이병형홀에서 ‘파키스탄의 불교문화유산’ 다큐멘터리 시사회를 개최했다. 주한파키스탄 대사관과 자예르 필름이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2018년 8월부터 기획돼 11개월간의 촬영을 거쳐 올해 6월 완성됐다. 러닝타임은 40분이다.파키
조계종과 파키스탄 정부가 한국에서 간다라 유물이 전시될 수 있도록 실무적인 협의를 진행키로 했다.나빌 무니르 주한 파키스탄 대사와 서상표 주 파키스탄 대사는 4월5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접견실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예방하고 간다라 유물 한국 전시 공동개최를 제안했다.이에 원행 스님은 “라호르박물관에 소장된 ‘석가모니 고행상’은 보존 상태가 취약해 한국으로 운반하기 위험할 수 있다”면서 “나머지 운반 가능한 불교유적이라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스님은 이어 이 자리에 배석한 총무원 사회부장
고딕성당은 화려한 ‘기적의 빛’을 수직적인 신의 나라 안으로 끌어들였지만, 그 빛은 보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없음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무한’의 거리가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멀리 절대적 피안의 세계에 있었지만, 인간이 사는 피안의 현세에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며 죽은 신의 아들이 있었고, 그를 낳은 세간의 가족이 있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의 부름에 응답하고 배신하고 다시 되돌아오던 역사적 인물들이 있었다.초월성의 경험은 이런 이들의 신체를 둘러싸고 가시화된다. 종교적 초월성을 표현하는 ‘숭고’라는 미적
“이 세상 올 때는 업연에 끌리어 오는 줄 모르고 왔지만 갈 때는 알아차림으로 한 생각 챙기면서 가는 줄 알고 가고 싶습니다. 올 때는 비록 울면서 왔지만 갈 때는 웃으며 가고자 합니다. 나를 억지로 병원으로 데려가 영양제를 놓고 음식을 먹이지 마십시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대중들께 짐 지워 드려 죄송합니다.”지리산 정각사 죽림선원에서 정진하던 대현 스님이 만성폐렴 진단을 받은 것은 지난해 초였다. 1년 중 가장 춥다는 소한 무렵이었다. 세속 나이로 74세였던 스님은 매년 이맘때면 심한 감기몸살을 앓았고 이번에도 비슷하리라 여겼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이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파키스탄의 별’ 명예훈장을 받았다.원행 스님은 11월11일 서울 롯데호텔서 열린 한국-파키스탄 수교 38주년 기념행사에서 파키스탄 대통령을 대신해 뭄타즈 자흐라 발로치 주한 파키스탄 대사로부터 국가훈장을 받았다.‘파키스탄의 별’ 명예훈장은 매년 파키스탄 정부에서 수여하는 훈장으로 전 세계적으로 각 분야별 공로가 있는 인사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한국과 파키스탄 평화활동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파키스탄의 별’ 명예훈장을 받았다. 이는 송종환 전 파키스탄 대사에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신통력으로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나 몸으로써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그리고는 곧 여러 가지 전단, 훈륙, 도루바의 향과 필력가, 침수, 교향들을 먹고, 1200년 동안 첨복 등의 꽃 향유를 마시며,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 앞에서 하늘 보배 옷으로 스스로 몸을 감고, 거기에 향유를 부어 적신 뒤 신통력의 서원으로써 1200년에 걸쳐 스스로 몸을 태우니, 그 광명이 80억 항하의 모래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었느니라.”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법화경’에서 약왕보살 전신인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음력 12월8일은 성도재일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루신 깨달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세상을 생각하면 성도재일은 부처님오신날 이상의 큰 행사로, 전 세계인이 함께 기념해야할 축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3월경 연재에는 부처님 깨달음의 문명사적 의의에 대해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이르시게 되는 수행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고의 속박을 벗어나 완전한 해탈을 이루고자 결심하신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사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당시 사문들
고요했던 고운사에 선풍(禪風)이 휘몰아 쳤다.(1980) 통도사 극락선원, 묘관음사 길상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해 온 현봉근일(玄峰勤日) 스님(현 고운사 조실)이 주석하며 승가는 물론 재가불자들에게도 참선의 길을 열어 보였는데, 월말이면 어김없이 참선법회를 열어 철야정진으로 이끌었다. 안동대 미술학과에 입학(1979)해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청년은 2학년 때 고운사를 찾아 큰스님을 처음 친견했다. 선기 충만한 세납 40대의 근일 스님 위모(威貌)는 고산 속 설원을 활보하는 호랑이를 보는 듯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이뭣고’ 화두를 받
서산(西山)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다. 비록 신체적으로 꼽추라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나아가 한국전쟁 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한창인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을 보면 건강상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만, 최소한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력을 보면 그는 매우 열정적이었다.그가 불교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다만 미술을 처음 배운 것은 종로 YMCA(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였고, 당시 그의 삼촌인 구자옥(具滋玉)이 YMCA의 총무였다고 하니 혹 그의 집안은 기독교에 더 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경남 사천의 다솔사(多率寺) 아래에 살던 청년은 진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왕 방 하나 얻어야 한다면 조용한 공간이 좋을 듯해 비봉산 아래의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 법당에 들어가 ‘절에는 무슨 책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였는데 한 문장에 눈길이 꽂혔다. 태어나 처음 마주한 글귀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한학자인 할아버지에게서 한학교육을 받으며 축적한 내공이 있었던 터라 한자로 된 원문을 단박에 읽어냈다.‘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
파키스탄 대사가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의 ‘석가모니 고행상’ 한국 전시에 관련한 실무적인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뭄타즈 자흐라 발로치 주한 파키스탄 대사가 5월19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접견실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예방하고 “‘석가모니 고행상’은 보존 상태가 취약해 전문가들이 방법을 논의 중에 있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 불자들이 ‘석가모니 고행상’을 친견할 수 있는 전시회 개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2019년 11월 조계종 방문단은 국빈초청으로 파키스탄을 순례할 당시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와
달라이라마는 어떤 스승이고, 다람살라는 어떤 곳일까?그동안 많은 매체를 통해 달라이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저작물을 통해 가르침 내용을 접하면서 다람살라 풍경을 간접적으로 보아왔지만,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살아온 이에게 직접 경험을 듣는 일은 흔치 않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오로지 다람살라만을 고집하며 스승 달라이라마 지근에서 수행과 봉사의 삶을 살아온 청전 스님이 풀어놓은 이야기는 그래서 새롭다.‘안녕, 다람살라’는 청전 스님이 달라이라마와 함께한 다람살라에서의 30여년 수행생활을 되돌아본 이야기를 담아냈다. 2018년
이상좌(李上佐)는 조선 초기인 중종대에 활동한 궁정화가로서 원래 노비였으나 그림 실력이 출중하여 중종의 배려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중종이 승하하자 이듬해인 1545년에는 중종의 어진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는 단순히 도화서에 발탁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실제로 이듬해인 1546년에는 공신들의 초상화집을 그려 왕실에 공헌한 인물들에게 수여하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실력이 출중하면 등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건강한 사회
부처님의 생애에는 매우 드라마틱한 부분이 여러 번 있다. 탄생부터 출가, 수행, 교화, 입멸까지 곳곳마다 매우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마도 치열하고 진실한 삶의 아름다운 여운일 것이라 생각된다.고타마는 출가 후 직접적으로 지도해줄 스승을 찾아 학습했다. 하지만 출가 때 품은 ‘인생의 궁극적인 답’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홀로 수행하기로 하고 정진에 들어갔다. 홀로 시작한 정진은 곧 고행으로 이어졌다. 지금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아프카니스탄에 있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고행상이 그것을 잘 대변하고 있다.조각으로 조성한
백제불교는 마라난타존자의 전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라난타존자는 지금으로부터 1635년 전인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침류왕은 마라난타존자를 한성 궁궐로 맞아들여 정성스럽게 예를 올리고 설법을 들은 후 이듬해 10명을 출가시켰다. 그것이 백제불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마라난타존자는 간다라국 출신 스님이었다. 간다라는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이다. 간다라는 알렉산더왕의 동방원정으로 인하여 헬레니즘문화가 전해져 있던 곳이다. 여기에 인도의 불교문화가 전해져 헬레니즘 조각양식을 담은 독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