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몸이 편하고 할 일이 없으니 맨 날 곱창씹어요.” 국방부에서 군복무 중인 아들이 휴가 중 나와 한 말이다. 이곳은 민간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곳이라 다른 전방의 군인들보다 일이 많지 않다. 때문에 동료들이 빈 시간에 서로 흉보고 본 흉을 또 보고 별거 아닌 것 가지고도 욕한다는 용어가 ‘곱창’이라는 것이다. 순간 번뜩 떠올랐다. 왜 요즘 사람들은 복잡하게 많은 생각을 하고 옛날 사람들에 비해 번뇌가 많은지에 대한 답이. 우리 어머니 시절만 봐도 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새벽부터 잠들 때까지 하루 종일 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분들의 영혼은 지금 사람들보다 밝고 순수하여 예지력이 뛰어났다. 반면 요즘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입으로는 먹는 등 여섯 감각을 쉴 새 없이 작동한다. 영혼이
개미, 나무, 뇌, 신…. 썼다하면 기록적으로 팔리는 저자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근래에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로 선정되었다. 때문에 그가 쓴 책들 역시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다고 한다. 그의 어떤 면이 이토록 한국인들에게 어필 될 수 있는 것일까? 베르베르는 자신의 독자가 가장 많은 한국과 러시아인들에 대해 “한국인들은 과거에서 훨씬 벗어나 있고, 러시아는 아직도 중세풍습이 강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그는 13살 때부터 동양의 정신세계를 알게 되어 그때부터 태극권, 요가, 선(禪)을 해왔고 티베트불교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호흡법을 배워 뇌를 조절하고 심장박동의 완급(緩急)도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수행이 단련된 베르베르는 작가답게 창의력을 강조했다. 창의력을 키우는 비법으로 두 가지
2001년 달라이라마는 위스콘신대학의 요청으로 티벳의 많은 수행자들을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편에 태웠다. 이 대학의 데이비슨 박사가 실험하는 ‘수행 중 뇌파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 실험에서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를 위해 무제한적으로 자비명상을 하도록 요청하고 검사한 결과, 스님들의 뇌파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강력하게 활성화된 감마파가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실험시간 이외에 휴식기간 동안에도 감마파의 발생정도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자비명상이 일시적 상태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뇌에 구체적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자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감마파란 무엇이며, 이 뇌파가 강력하게 증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빠른 빈도의 주파수를 보이는 감마파
자비명상의 유래는 남방불교의 수행논서인 『청정도론』에 부처님께서 『자비경』을 설하시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 500명의 비구가 부처님께 각각 근기에 맞는 특수한 명상기법을 전수 받고 히말라야 기슭에서 넉 달 간 명상에 전념하기 위해 안거에 들어갔다. 수행자들이 온다는 소식을 접한 지역 주민들과 주변의 정령들은 기쁘게 맞이하며 명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비구들이 잠깐 머물다가 떠날 줄 알고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목신들은 여러 날이 지나도록 그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차지하고 비켜주질 않자 화가 났다. 거대한 나무의 목신들은 집을 빼앗긴 것으로 여겨 수행자들에게 무시무시한 형용을 나타내 보이고 끔찍한 소리를 내거나 메스꺼운 냄새를 피워 그들을 쫓아내기로 결의했다. 그들이 갖가지
적극적이며 숭고하고 진정한 보살행은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우리는 ‘보살’이란 용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진정한 보살의 숭고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얕고 가볍게 인식된 지 오래다. 보살은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이다. 지상에서 가장 숭고한 자비행을 실천하는 보살과 같은 인간형은 다른 종교나 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보살의 가장 큰 특징인 희생정신이란, 삶 자체가 ‘고’라는 사실(一切皆苦)을 잘 통찰하고 있지만 자신만의 해탈을 서두르지 않고 많은 중생들의 고통을 껴안고 그들과 더불어 깨달음의 세계로 가고자 함이다. 불교의 이러한 보살 희생정신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티베트 민족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티베트인들의
마음을 안으로 모아 고요히 명상에 들면 마치 무의식에 저장된 모든 용량의 업이 드러난 듯 하다. 강한 것에서부터 미세한 것까지 복잡하게 펼쳐지는 망상 뿐 아니라 몸의 고통은 다리에서 허리를 타고 머리 꼭대기까지 그 수위가 강해지며 마음의 평정을 갖으려는데 더욱 곤란케 한다. 이것을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수행을 멈출지 더 깊은 정진의 계기로 이어갈지 갈림길도 되지만, 항상 깨어 살아갈 것인지 흐릿한 영혼으로 남은 생을 살 것인지의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아나파나 호흡 명상은 이러한 고통을 정화하고 삼매의 힘을 기르는데 매우 빠른 효과가 있다. 이 호흡은 숨의 힘과 길이를 같게해서 40분에서 1시간 정도 쉬지 않고 호흡을 한 후 마지막에 길게 들이쉬고 참다가 몸을 풀어준다. 그런데 호흡을 하는 도중에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한계는 무한한 것 같다. 스포츠를 통한 기록을 보면 계속해서 기존의 기록을 갱신하고 또 깨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이승훈 선수는 스피드스케이팅 10Km를 돌고 세계신기록으로 결승점을 들어오면서도 그런 긴 거리를 달린 사람처럼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그의 얼굴엔 헐떡임이 없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점수를 갱신한 김연아는 ‘무아(無我)’의 연기로 그를 지켜 본 모든 이들을 함께 ‘무아지경(無我之境)’으로 몰아넣었다. 세상을 삼매 속으로 끌어들인 덕에 고요하고 포근하며 따사로운 에너지가 며칠을 이어가고 있다. 끊임없는 훈련으로 쌓인 내공은 모든 이들의 오감을 사로잡은 채 마음을 한 곳에 고정시켜
인터넷 선방 ‘카페’는 유치부에서부터 70대 후반까지 다양한 도반들이 함께한다. 특이한 점은 어린 도반들이 어른들을 이끌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올해 고등부 3학년 기우 도반이 대배를 하다가 어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걸어왔다고 한다. “대배를 하는데 검은 녹색 같은 게 보이더니 귀신이 보였고, 그 귀신이 나를 한참을 노려보았어요. 이때 순간적으로 무서운 생각을 하면 더 무서울 것 같아 부처님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니, 피를 흘리며 서있던 귀신이 능글맞게 웃는 듯 하더니 오렌지색이 나타나며 점차 흰색으로 변하고 귀신도 없어졌어요. 그 귀신이 내 업장이라 생각되면서 업장이란 나의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빛, 귀신, 업장 모든 게 이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아요.”이 일기가 올라온 순간 어린 법우가 천도를
우리가 살면서 참으로 많은 죄를 지으며 사는 것 같다.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지은 허물이 참으로 다양하다. 그래서 참회기도를 하고도 앉아서 고요히 머무를 때 얕은 것에서부터 깊이 박혀있는 죄업이 드러나 씻어 내릴 때까지 여러 번 깔닥 고개의 힘든 고비와 부딪히게 된다. 이 고개를 무사히 넘기는가 아닌가, 지은 허물에 대한 성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고 이런 경계를 바라보고 사라지게 할 힘과 테크닉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수행은 진보와 퇴보, 그리고 멈춤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 같다. 지금은 군 복무 중인 아들이 어려서부터 엄마의 수행하는 모습을 여러 각도로 지켜보며, 때론 “엄마는 명상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워요.”하기도 한다.또 티베트불교 중 ‘만달라 공양’ 수행을 하는 것을 보고 살며
아침에 카페 문을 열면 하루 동안 공부한 도반들의 수행일기가 올라와 있다. 비록 카페공간이지만 도반들의 공부 열기는 선방 못지않게 대단하다. 어떤 일기는 울고 또 어떤 글은 웃게 된다. 우는 것도 슬픔의 눈물, 안타까움의 눈물, 저절로 흐르는 눈물, 기쁨의 눈물, 감격의 눈물이 있다. 또 웃음에도 어이없는 웃음, 동의의 기쁜 웃음, 감격의 웃음, 성취의 웃음 등 그 종류가 다르고 느낌이 다르다. 공부를 하면서 나날이 변해가는 과정은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공통점도 있다. 처음 20여일은 고삐 풀린 망아지 길들이는 것처럼 거친 경계와 익숙하지 않은 심신을 조복 받느라 힘들고 긴장된 나날들이다. 그 고비를 일단 통과하면 몸이 수행하는데 점점 길들여지고 마음은 순해지고 차분해 진다. 그러나 잠잠해 진 것
지난여름 ‘불교인재개발원’에서 12주 동안 ‘명상교실’ 강의가 끝나고 도반들이 하나 둘 100일 정진에 들어갔다. 능엄주를 하루에 21독, 33독, 54독, 108독 등 자신의 형편에 맞게 시작하시는 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08독, 540독, 1,080독 이상을 하는 분들도 있다. 누가 하라마라 할 것도 없이 삼복더위에 한 보살님이 맨 앞에서 스타트 줄을 끊는 순간 여기저기서 함께했다. 그리고 강의에 참석하지 못한 카페의 도반들도 덩달아 뒤따라 출발했다. 그 중 청량심 보살님은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나중에 합류한 분이다. 뒤늦게 출발한 보살님은 중간에서 앞서 가고 있는 도반들의 뒤를 밀어주고, 함께 간 도반들을 재촉하며, 뒤따라오는 도반들은 끌어당겨 주는 역할을 하였다. 중간에 몇 번의 어
수행을 열심히 하면서 수행일기를 쓰는 분들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인들의 수행과정을 보며 경책으로 삼기도 한다.어머니의 능엄주 수행을 지켜보며 함께해온 희견님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오늘은 어머니가 능엄주 108독 100일기도를 회향하는 날입니다. 외우기도 힘들다는 능엄주 108독을 100일 기도를 마치시는 어머니가 너무나도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100일 기도 회향하는 날 아침에 제가 꿈을 꾸었습니다. 두 분의 스님께서 집에 오셨습니다. 제 느낌에는 성철 스님 같았습니다. 큰스님들이 입으시는 장삼을 입으시고 어머니가 기도하시는 방에 들어가셔서 앉으셨습니다. 한 스님은 파드마삼바바 사진이 있는 곳에 절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방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3배를 올리자, 성철 스님께서 ‘능엄주 열심히
수행을 하면서 놀라운 변화 중 하나는 어머니의 역할이다. 어머니의 마음 씀이 그대로 온 가족에게 여과 없이 투과됨으로써 가족들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감을 볼 수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학부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상대로 부모에 대한 느낌을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따뜻하고 친근한 부모 밑에서 자란 학생들은 질병이 작은 반면 부모가 냉정하고 긴장감 속에 사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질병에 걸렸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가 냉정한 것보다 어머니가 냉정한 경우는 더 심하고 많은 질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 연구결과에 의하면 어머니의 따뜻한 자애로움과 위치가 그 어떤 보약과도 비교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카페에 올라온 수행일기를 보면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가 다수이다. 그 중 몇 가족을 차례로 소개해 나갈까
부부는 7000생의 인연이 있어야 하고, 자식은 9000생의 연이 있어야 하며, 도반은 12000생이 연이 있어야 만날 수 있다고 했던가. 아난이 좋은 도반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기뻐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도반은 공부의 반인 것 같습니다”라고 그 감동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도반이 공부의 전부이다”고 하셨다. 도반들과 함께 정진해 간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힘이고 참으로 유익함이 많은 것 같다. 100일의 일정을 정해놓고 집중수행을 먼저 출발한 사람, 그 뒤를 따르는 도반들, 남들이 열심히 이어가는 수행일기를 보고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하고 지켜보다가 이어오는 안전형 도반들이 있다. 우리가 아무 계획 없이 사노라면 100일간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사라졌는지, 그 후유증은 어떠했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기록해 간다는 것은 확실히 많은 발전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예전에 능엄주를 하루에 108독 이상씩 100일을 하기로 정해놓고 매일 기록을 해 보았다. 막연히 100일을 세면서 기도를 하는 것보다 기록을 하게 됨으로써 놀라운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날짜만 정해놓고 공부를 하면 그날그날의 임무만 마칠 수 있다. 하지만 기록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먼저 시간 관리를 할 수 있게 된다. 뒹굴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잡담을 하는 등 불필요하게 보낸 시간들을 모두 명상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하루에 체험한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그 경험은 무엇을 먹고 먹지 말아야 하는지, 소식을 할 때와 과식을 할 때의 장단점, 어떤 언행을 하면 유익하고
때론 성지순례를 나서는 것과 스승님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수행 중에서도 참으로 가치 있는 정진인 것 같다. 지난 9월 중순, 달라이라마께서 해마다 한국인들을 위해 하시는 설법을 듣기 위해 인도의 달람살라를 갔다. ‘달람살라’는 이름만 들어도 내게는 언제나 설레고 가슴 벅찬 곳이다. 법회를 하루 앞두고 우리에겐 갑작스런 행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까마바 존자님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까마바 존자님은 금생이 17번째 환생으로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1000년이 넘은 세월 동안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원력으로 계속 환생하기를 반복해 오셨다. 우리가 세는 나이로 올해 25살이지만 그 분을 뵌 순간 나이를 금방 잊게 한다. 존자님을 친견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분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 아무리 악몽을 꾸고 가위눌리는 등의 현상들이 있었을지라도 잠에서 깨고 나면 꿈속의 일이었다고 안도하고 우린 또다시 눈앞에 부딪치는 경계들 속에 흡수되며 바쁜 일과로 이어간다. 문제는 명상 중 잠재된 의식, 즉 업력이 밀고 올라올 때이다. 이 때 그 성질을 알지 못하면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공부를 해보면 처음엔 몸을 정복(정화)하느라 그 다음은 밀려오는 망상을 녹여가느라 다른데 신경을 쓰지 못한다. 그렇게 노력해가다보면 어느 순간 몸은 공부하는데 장애를 주지 않고 따라서 마음은 고요한 연못처럼 행복을 느껴가는 빈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 온 생은 무수히 많고 지은 업이 두터워 번뇌가 그렇게 쉽게 뿌리가 뽑히는 것만은 아니다.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갑작스런 죽음을 제외하고 명이 다한 죽음의 과정을 보면 삶의 결과물들이 죽기 전부터 하나씩 또는 무더기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사후 그 영향은 산자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살아서 악행을 많이 저지른 사람은 죽어가면서 후회를 하게 된다. 이 때 감정이 극도로 혼란해 지면서 순식간에 부정적 생각이 용광로처럼 타오르며 온통 마음을 장악하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평소 욕심이 많고 한이 많은 사람은 죽을 때 참으로 고통스럽게 죽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에서 나오는 악취는 그 어떤 냄새보다도 고약하다. 그리고 숨이 멎을 때까지 온갖 몸부림과 고통을 호소하다가 똥오줌 등 갖은 배설물을 내보내고 죽는다. 숨이 멎은 후부터는 비참할 만큼 보기 흉한 모습을 남긴다. 눈을 감지 못하고 부
사람이 죽을 때 죽는 것은 몸이지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마음은 꿈속에서처럼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불 속에 들어가면 뜨겁고, 괴물이 나타나면 무섭고, 좋은 모습들에는 애착을 갖게 되고,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즉 살아서나 죽어서나 자신이 하던 생각은 업의 힘으로 계속 이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악몽을 꾸고 가위눌리는 등의 현상들이 있었을지라도 잠에서 깨고 나면 꿈속의 일이었다고 안도하고 우린 또다시 눈앞에 부딪치는 경계들 속에 흡수되며 바쁜 일과로 이어간다. 문제는 명상 중 잠재된 의식, 즉 업력이 밀고 올라올 때이다. 공부를 해보면 처음엔 몸을 정복(정화)하느라 그 다음은 밀려오는 망상을 녹여가느라 다른데 신경을 쓰지 못한다. 그렇게 노력해가다보면
“아무리 잘살았다고 해도 죽을 때 보면 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죽음은 그 사람의 평생 결과물이다. 때문에 공부인들이나 종교인들의 죽음은 세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고귀하게 살다간 극소수를 제외하고 우리 대부분은 죽음 앞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잘못 살아온 한 생, 남은 가족과 재물에 대한 집착,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 윤회를 믿더라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을 지에 대한 불안, 사후 벌어질 공포에 대한 불안 등의 이유로 스스로를 옭아매면서 고통을 받는다. 우리가 잘 죽는 학습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불안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다시 말해 품위 있고 평온한 죽음과 다시는 고통스런 사바세계에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이다.고대로부터 인간들은 사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그림과 글, 설화 등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