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발달은 인간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인류는 물질이 풍요로워지면서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됐고, 인간 내면에 깔려 있는 소유욕을 한껏 드러내 조금 더 많이 갖고자 남의 것을 탐하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게 됐다.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른 긍정적 효과가 태산처럼 크면서도 그 이면에는 인간을 본성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살도록 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그렇게 본성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우리사회는 인문학이 설 자리를 점차 잃어왔고, 급기야 사유를 필
우리나라는 2013년 기준으로 하루 평균 43.6명, 그러니까 33분마다 한 명이 스스로 생을 중단하고 있다. 자살률은 이미 2003년을 기점으로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를 추월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그러나 올해로 10년째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수치는 변함이 없다. 그만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말이다.이처럼 한계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대부분 누군가의 위로도 들리지 않고, 현 상황에서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자괴감과 자책감이 끊임없이 내면을 흔
보통 사람들은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길이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앞에 무엇인가가 있어서 겁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것일 뿐이다. 인생길도 그렇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내 인생에서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불안하고, 때론 혼란스럽다.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고 집착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과거에 집착하는 일은 지금 이 순간을 더욱 힘들게 하거나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잠시 안온하게 할 뿐, 대부분 미래의 삶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사회학자․작가로 활동하며 철학․문학․영화․예술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저작들을 발표해온 질 들뢰즈는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라고 넘쳐나는 정보의 문제를 지적했고, 하이데거는 여기에 더해 ‘정보란 명령이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혹시 그 정보, 아니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명령을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있기에 나온 말이다.책도 그렇다. 매년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책들이 새롭게 출간되
이 세상이라는 연극 무대에 오른 모든 이들이 주인공을 꿈꾼다. 주인공 혼자만의 힘으로 무대가 성립될 수 없음에도 모두가 ‘언젠가는 나도 주인공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삶의 무게를 감내하고 있다. 그만큼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고, 더불어 주인공이 됐을 때 성취감과 자기 존재감을 만끽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자기 역할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 주인공, 아니 자신이 속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류의 편에서 살아가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그러
문화(文化)는 의식주를 비롯해 언어, 풍습, 도덕, 종교, 학문, 예술, 각종 제도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한 시대와 집단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낯선 곳을 찾을 때 그 지역의 문화를 사전 학습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그래서 한 나라의 문화를 놓고도 관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게 마련이다. 특히 역사가 오래되고 지형이 넓은 곳일수록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문화가 그렇다. 특히 그들은 스스로를 세계의 중앙에 위치한 가장 문명화 된 나라라고 생각하며 ‘중화(
인간들의 착각 중 하나는 아마도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치기일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우주 최고의 존재라도 되는 양,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자연을 마구잡이로 파헤쳐 왔다. 그 결과 문명의 발달을 이뤘고 그로인한 편리함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기 한참 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온 자연의 역습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아니, 인간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과보가 이어지고 있다. 바람, 비, 눈, 기온 등 기후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이에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위기를 감지한 서구는 이미 자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마음 속 깊이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버거운 극한 상황에 이른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그래서 때론 자기 삶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정치가, 권력자, 대기업 총수 등 소위 ‘힘’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 높여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한없이 힘없고 나약해 보이기만 하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자신을 옥죄는 온갖 고통과 강박증, 그에 따른 지독한 수치심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지만 그리 간단치 않다. 때문에 실직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우리사회에는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있다. 불교를 비롯해 개신교, 천주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증산교에 기타종교까지 어우러져 있다. 세계적으로 종교간 갈등 노출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전쟁도 불사하는 현실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경우다. 종교학자들이 우리사회의 다종교 문화에 관심 갖는 이유다.그렇다면 우리사회의 종교는 안녕할까? 아니다. 지나친 종교 이기주의가 오히려 종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고, 수행자나 성직자의 직업화 또한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데 한 몫 하고 있다. 때문에 자기 종
우리는 흔히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바람직한 행동 규범’을 도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법률로 정해서 반드시 지키도록 강제한 내용들 보다, 이 도덕적 삶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사람의 인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초․중․고등학교에서도 ‘도덕’을 별도의 교과목으로 정해 도덕성을 기르고 정서를 순화시킴으로써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건전한 인격을 갖추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철학적 깊이가 더해지지 않은 교육은 교문을 나서 사회에 첫 발을 딛는 순간 그저 여러 교과목 중 하나로 기억에
‘인생이란 무엇인가?’인류에게 자아의식이 생긴 이후 언제나 사유의 대상이 됐던 물음이다. 특히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좌절을 겪거나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에 직면할 때면 인생을 절실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그럼에도 좀처럼 풀기 어려운 화두가 바로 ‘인생’이다.보통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돌아보고 생각하는 이 화두를 ‘완벽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며 이야기로 풀어내 엮은이가 있다. 중국의 대학자이자, 인류의 정신적 스승으로까지 존경받는 지셴린(季羨林)이다. 중국의 위대한 대학자이자 나라의 어른으로
그동안 꽤나 오랜 세월을 나누고 또 나누기를 반복하며 다양한 학문 영역을 창조해내던 학계가 이제는 학제를 넘나들며 이웃 학문을 탐구하고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포용과 융합을 넘어 통합을 주창한다. 나누기를 끝내고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꾸러미에 꿰는 듯한 모양새다. 이른바 통섭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도 영역간 공고하던 울타리를 걷어내고 자유롭게 왕래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가치 창출, 혹은 잃어버린 존재들의 본래 모습을 살려내고자 스스로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하버드대학에
오늘날 세상은 앞만 보고, 또 높은 곳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돈, 권력, 명예로 대변되는 이른바 사회적 성공을 향한 몸부림이다. 그것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고, 공동체가 파괴되고, 사회가 황량해져도 ‘나’ 개인의 성공을 목표로 한 거침없는 질주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부당함을 알면서도 권력자의 한 마디에 ‘예’라고 대답할 때 과감하게 잘못을 지적하며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듯이, 무한경쟁 시대에도 성공을 향해 앞을 보는 대신 ‘성공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전 세계가 매일같이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사고로 신음하고 있다. 자연재해나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재난은 물론 살인, 강도 등 자신이 직면한 고통의 무게를 타인에게 내던지는 것으로 덜어보려는 행위도 끊이지 않는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만만치 않은 개인의 정신 심리 상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형상이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인생길에서 점차 삶에 대한 의미가 희박해지고 있는 데서 오는 참혹한 결과다.그러나 ‘죽을 것만 같다’며 아우성 치고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삶을 포기하거나 사회적 일탈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지구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세계는 하나다’라는 말이 더 이상 어색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말 그대로 인드라망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과 달리 복잡해진 세상에서 한 국가의 문제는 특정 국가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이웃국가는 물론 세계적인 문제로 확대된다. 나아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로 숨진 환자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을 전 세계가 예의주시하고 있는데서 볼 수 있듯, 한 사람의 질병에서부터 한 민족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죽음을 접하면서 살아간다. 천수를 다하고 기력이 쇠진해 저절로 신체 기능이 멈추는 자연사를 목도하는가 하면, 아직 젊은 나이에 뜻하지 않은 사고나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고 있다. 그래서 가족, 친인척, 지인들의 죽음을 지켜보거나 임종 소식을 들으면서 늘 살아 있음에 안도하고 감사하기도 한다.특히 옛날부터 오래 사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삼았고,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오복의 하나로 꼽아왔을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을 도외시해왔다. 하지만 이 세
세상 사람들은 흔히 혈연이나 지연, 또는 공동의 이해관계 및 목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기본적 집단을 공동체라고 말한다. 우리사회 정치권에서 표심을 자극할 목적으로 내세운 ‘우리가 남이가!’도 그런 공동체를 염두에 둔데서 나온 말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촌의 평화와 공동 생존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며 말하는 ‘인류공동체’는 사전적 의미의 공동체와는 사뭇 다르다.지금 우리사회가, 아니 지구촌 곳곳에서 공동선 추구를 목표로 이야기 하는 ‘인류공동체’는 다름 아닌 ‘인드라망’이다. 넓고 큰 그물의 각각 코마다 구슬이 달려
“용서해라, 그래야만 진정으로 행복해진다.”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로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며 독립운동을 이끌고, 티베트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주력한 공로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달라이라마의 말이다. 무력을 앞세운 중국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다 나라를 빼앗긴 지도자의 이 말은 지구촌의 이목을 티베트와 티베트불교로 집중시켰고, 이후 티베트불교는 전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오늘날 티베트를 소재로 한 서적, 영화, 음반 같은 문화 인프라가 형성되면서 티베트 신드롬을 불러오게 한 단초가 됐다.덕분에 티베트불교는 튼튼한 조
인류는 시대를 막론하고 강자가 약자를 부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왔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신분 때문에 삶의 모습을 바꾸는 자체가 불가능했던 국가와 제도가 적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존재했던 노비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비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제 스스로의 의지로 삶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단지 양반에게 목숨을 내맡긴 채 그들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에나 의로운 인물이 하나씩 나타나 동시대를
세계적으로 저명한 미래학자 윌리엄 하랄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는 “2020년이면 지식정보시대가 끝나고 지식 이상의 가치와 목표를 중시하는 영성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오감을 대신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용서, 겸손은 물론 생명에 가치를 둔 다양한 감각이 가치를 발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상이다. 꼭 윌리엄 하랄 등 미래학자의 예상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오감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즉 영혼과 영성의 발현만이 위기에 처한 지구촌을 구할 유일한 희망이라는 데 동조하고 있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