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 잘 살고 싶다.불교는 내게 있어 나침반이다. 부처님의 수승한 가르침이 나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 최적화 되도록 노력하며 살고 싶다. 그렇게 해서 이번 생에서 마친다면 어떨까. 윤회가 끊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윤회가 끊어지지 못 한다고 해도 마음 아프진 않을 것 같다. 이번 생에 부처님과 인연이 다음 생에서 더욱 더 견고해진다면 그것도 참 좋겠다.불교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에는 계기가 있었다. 1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그해 겨울, 마지막 날 눈길을 올라 찾았던 곳이 바로 절이었다. 당시 불자가 아니었지만 알
“수리수리 마하수리….”유년시절 늘 듣던 ‘천수경’직지사 등 대찰 순례하며가람배치 의문에 경전공부문사수 원칙으로 정진할 것유년시절 집에서는 무슨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 시절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매일 집에서 틀어놓은 주문은 ‘천수경’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 손을 잡고 직지사를 자주 오르내렸다. 불연이 이미 시작됐던 것이다. 충북과 경북 경계 인근에서 태어나 차로 10분 거리인 곳에 황악산 직지사가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30여년 전 직지사는 모과나무 과수원과 맑은 계곡, 노란 은행나무와 울창한 소나무
축서사 보광전에 홀로 앉는다. 신라시대 비로자나 부처님을 대면한다. 큰 귀 늘어뜨리고 지권인에 반개한 눈 사이로 뻗어 나오는 안광에 주눅이 든다. 하지만 나도 눈빛을 교환해 본다. 불법으로 세상을 환하게 밝혀 놓았으나 마주한 중생은 그 빛 속에서 어둠만 보고 있다. 움켜진 손 안에 내 마음이 들어 있다고 말씀한다. 그 손가락을 펼쳐 보지 못한다. 그만두고 눈을 감고 눈앞 부처님을 떠나 내속 부처님으로 가볼까. 그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모태불교신자’라 불렸지만큰스님 법문 외면했던 시절원통암 인연으로 바뀐 신행축서사·무여 스님 뵈며
죽음은 여기 저기, 그리고 내 곁에 도사리고 있었다. 부모 죽음서부터 방황 시작독립·결혼·이혼 등 우여곡절타종교 다녀도 마음은 공허‘금강경’ 등 사경하며 귀의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엄마와 같이 다니는 일이 잦았고, 부모와 떨어져 한시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영원한 이별이라는 죽음을 알게 된 후부터 두려움에 빠져 살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살아야하나.’ 아버지는 53세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슬픔이 엄습했고 앞은 캄캄했으며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점차 울음소리만 남았고, 메마른 눈물은 가슴만 미어지게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귀여움을 받고 축복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결혼하고 딸 둘을 낳고 기르다보니 어느덧 50줄 후반이다. 자신을 돌아보니 허전함과 쓸쓸함이 몰려왔다. 생전 어머니가 절에 다니면서 불교를 접하긴 했지만 그 동안 지지부진했었다. 부처님오신날에야 아내와 절에 가서 연등을 가족 별로 달고, 무병과 가족의 안녕을 빌 정도에 불과했다. 흔히 말하는 ‘초파일 신도’였다. 사찰예절도 몰랐던 초보약천사 템플스테이서 변화디지털대학서 불자로 거듭포교사로서 수행정진 발원지금처럼 가을 무렵이었다. 몇 년 전 지인 소개로 불
소리가 좋다. 산사에서 흘러나오는 경전 읽는 소리, 목탁소리, 염불소리, 풍경소리…. 법당에서 좌선이라도 하면 마음이 한없이 편해진다. 남의 집 같지 않다. 산행을 하더라도 사찰 있는 곳을 찾는다. 걷는 자체가 수행이라 여겨져 혹여 전생에 탁발승이 아니었는지 착각도 든다. 단순한 걷기이지만 수행이라 여기는 순간, 마음이 편안하다. 조용하고 한적한 오솔길 따라 걷다 산사를 만나면 극락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송광사서 법명 받고 수계일·가정에만 매달렸던 청춘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반추‘금강경’ 간경 등 정진 중조계총림과 인연
행복은 내 작품이다.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 부모와 일찍 사별 후 방황군서 배운 기술로 사회생활참나에 갈증, 불교대학 입학 신흥사서 신행하며 기도정진25년 전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뒤로 하고 군대를 전역한 뒤 홀로 남은 할머니와 지내면서 나 자신을 고민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내가 누구이며 왜 태어났는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답답함에 혼자 사색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나중에는 할머니의 걱정스러운 외침도 뒤로 하고 버틸 수 있을 허기만 채우며 혼자 방에 틀어박혔다. 모든 빛을 차단하고 촛불과
“우리는 충분히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를 쓸수록 괴로워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대부분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놓아버리면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에 따른 고통도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버린다고 해서 모든 집착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이기적인 욕망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수행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보살의 마음으로 최소한의 것도 충족되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는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어르신
불교를 알기 전엔 그런 줄만 알았다.‘나’라는 존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 부모님이 만든 환경과 주어진 모든 것들을 배경 안에서 사는 줄 알았다. 자기 사고방식에 따라 잘 살고, 못 살고 그런 줄만 알았다. 천안 종갓집 1남5년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자 할머니와 성불사에 다니며 100일 기도를 하고 남동생을 가졌단다. 그렇다. 부모님들은 신심이 유독 깊었다. 유년시절 두어 번 절에 따라간 기억이 불교의 전부였다.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작은 가게를 시작했다. 열심히 살았다. 20년 넘게 오후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나 운 좋게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정년까지는 근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요즘 퇴직 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까를 많이 생각한다. 지금까지 ‘인간 강신경’이 아닌 사회구성원, 아들, 남편, 직장인, 아버지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으로 이를 완전히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정년 후에는 나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은 사회에 봉사하며 베풀며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학업에 재능도 의욕도 없고 해서 허송세월을 보냈다. 대학 4학년이 되
‘부모미생전 본래면목.’부모에게 몸 받기 전 이 몸이 무엇인가?오래전부터 나를 끊임없이 힘들고 괴롭게 했던 일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버지를 향한 미움이 항상 떨쳐지지 않은 채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이었다. 술과 폭력 등으로 집안 식구들을 힘들게 하면서 내 어린 시절에 고통스러운 기억만 남게 했다는 생각에 분노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나의 주변에는 꼭 분심을 일으키는 사람이 한 두 명씩 존재했다는 것이다. 어려서 성장과정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내 전생들 업장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 주변 한 사람이 되었던지 과거 어떤
내게 부처님은 새벽 어스름처럼 불투명하게 다가왔다.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친정어머니의 새벽기도였다. 어머니의 기도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촛불 밝히고 향 피우면서 시작됐다. 어린 시절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주문 같았던 그 기도는 잠결이라도 내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았던 것 같다. 훗날 절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가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술술 나오게 됐으니 말이다.어머니는 몇 해 전 돌아가시기 전까지 새벽기도하며 삶 속에서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하고 살아왔다. 노보살로서 팔순이 넘어서도 늘 부처님 말씀 새겨진 경전을 읽고 주변 모든 사람들이 행
한 때 무속신앙에 빠졌던 난, 이제 당당한 불자다.그림처럼 아름다운 섬진강 상류 인근 시골마을, 1960년 12월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다. 주위 많은 분들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공무원 생활을 하시던 자상하고 배려 깊은 부모님의 4남1녀 중 장녀였다. 시골이지만 부족함이 없는 유복한 가정에서 집안어른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4개면에 한 곳 뿐인 중학교에 들어가 12km가 넘는 비포장 신작로를 버스 타고 통학을 했다. 이 시절에 내 기본적인 인격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버지
유년시절, 좋은 추억이 없다.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린 나이에 지게를 졌다. 집 주변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곤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 것 같다.등록금을 제 때 한 번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 매번 혼났다. 하교 이후에도 늦게 남아서 벌을 서기도 했고, 교실 청소를 하기도 했다. 고학년인 6학년 때는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일도 속상한데, 그 당
난 얼마나 부처님께,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갔을까.조상 대대로 불교집안이었다. 소위 모태신앙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절에 갔다. 20대에는 절에 다니며 가족들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안내했다. 지금도 열심히 다니고 있고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다닌다. 내가 절에 다니면서 느끼는 행복을 우리 가족들도 같이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기도하는 게 좋다. 절에 가서 부처님을 뵙고 청정도량을 거닐면 참 마음이 편하다. 내 마음과 몸이 달라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1주일 동안 도시생활에 찌들어 지친 심신
그냥 절에 다닌다는 사실이 무의미했다.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확실하게 배우고 싶었다. 조계종 포교원 디지털대학 신도전문과정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항상 자비행을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잘하는 자비행인지 모르겠다. 후회하고, 다짐하고, 참회하고, 바로잡고, 수행하고…. 참 어렵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할지 당황스럽다.과감하게 자신을 고통 받는 사람 자리에 놓아봤을 때 만일 똑같은 고통을 받는다면? 내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겪게 될지 가능한 생생하게 상상
늘 의문이었다.‘진정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내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진실한 내 실체를 알고 싶었다. 생물학적인 나, 사회적 역할로서의 나를 떠나면 난 진정 누구인가. 이 의문은 세월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의심의 덩어리로 더 커져만 간다. 요즘 인문학 강의가 많다. 명강의가 없진 않지만 나를 향한 갈증은 해소할 수 없다고 본다.어딘가 있을 것 같은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해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참선으로 찾아보려고 했다. 1700여년 넘는 시간 동안 선사들은 선방에서 기도와 선행, 참선으로 ‘그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