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봉화 축서사 적묵당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 뒤편으로 낮은 언덕 위에 석조비로자나불좌상 1구가 놓여 있다(사진 1). 언뜻 봐서는 불상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하는 곳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오랜 세월 탓으로 마멸이 진행되어 세부표현이 뚜렷하지 않지만 의외로 예스러움이 엿보인다. 불상의 대좌와 광배는 이미 없어졌고 불신만 남아 있는데 머리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전반적으로 좁은 어깨와 빈약한 가슴으로 양감이 줄어들었지만 착의법이나 옷주름 표현, 손의 형태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양 어깨에
최근에 결실된 두 손을 복원하여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비로자나불상 2구가 있다.경상북도 예천 한천사(寒天寺) 유리광전에 안치된 철조비로자나불상은 1979년 8월에 보물로 지정되면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사진 1). 처음 발견되었을 때 두 손이 모두 결실된 상태라 약합을 가진 약사불로 후보하였다가 2002년에 팔의 위치를 고려하여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으로 복원되었다. 한천사 비로자나불상은 불신에 비해 머리가 작고 다리의 폭이 넓어 안정적인 모습이며 양감 있는 어깨와 넓은 두 다리,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2007∼2008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경기도 분당구 판교 신도시 건설 예정지를 발굴, 조사하였을 때 사찰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청동비로자나불좌상 1점을 비롯하여 청동지장보살좌상 2점, 금동소탑 상부, 석탑 상륜부의 보륜으로 추정되는 석재 3점, 청자접시, 토기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판교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공원과 체육시설 등이 들어서 있어 절터의 흔적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출토 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판교동 절터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속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판교 신도시 개발 중에 발견된 고려시대의 불상
부산 금정구 범어사(梵魚寺)의 창건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권4에 나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의상 대사가 678년에 창건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화엄종 10찰 중 하나라고 한다. 범어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경남지역의 3대사찰로 유명하다. 범어사 비로전(毘盧殿)에는 목조비로자나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다(사진). ‘범어사지(梵魚寺誌)’와 ‘범어사비로삼존중수도금기’에 의하면, 1638년(숙종 9)에 해민 스님이 비로전을 중창하면서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이후 1722년 3월에서 6월에 걸쳐 진열(進悅), 관성(寬性), 옥총(玉聰),
경북 포항시 북구에 있는 보경사(寶鏡寺)는 신라 진평왕대에 창건한 사찰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23에 의하면 ‘보경사는 내영산에 있으며, 고려 때 이송로가 지은 원진국사의 비가 있다’고 한다.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는 1224년에 세워졌는데 그 내용에 의해 1215년에 원진국사가 보경사 주지로 오면서 중창해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보경사 불상에 대해서는 1793년에 동봉화상이 쓴 ‘내연산보경사사적기’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원진국사는 일찍이 보경사 아래 동구에 있는 광흥사에
경상북도 경주 기림사는 신라 때 창건한 사찰이라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렸고 그 후 여러 번의 중수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사찰의 연륜 만큼이나 단청의 색깔이 바래져 있어 유난히 고적하고 예스럽다. 기림사 대적광전에 안치된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은 본존 비로자나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불상중수점안기’와 ‘아미타여래중수개금발원문’에 의해 1564년과 1719년에 걸쳐 1차, 2차 중수가 있었으며 좌우 협시불이 약사불과 아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을 배치한 목조삼존불상이(보물 제1548호) 봉안되어 있다(사진). 이런 법신, 보신, 화신으로 구성된 삼존불 형식은 조선 후기 불화에서는 많이 볼 수 있으나 불상에서는 그 예가 드물다. 특히 보관을 쓰고 두 손을 양 어깨 위로 올려 손바닥을 벌리고 있는 노사나불상은 조선 후기의 삼존불상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예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의 대형 삼존불상은 노사나불상 대신에 약사불상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목조삼존불상의 복장에서 조
전라북도 김제 귀신사(歸信寺)는 676년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각 지방의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십찰 중 하나로 전주 일대를 관할하던 큰 절이었다. 창건 당시에는 국신사(國信寺)라 하였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구순사(拘脣寺)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가 조선 1873년에 귀신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권33 ‘전주부 불우조’에 의하면, 1376년 9월에 왜구 300여 명이 침입하여 전주성을 함락하였는데, 당시 병마사였던 유실(柳實)이 공격하자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참사사적기(大懺寺事蹟記)’에 의해 신라 진흥왕 때 검단선사가 대참사(大懺寺), 중애사(重愛寺)와 함께 세운 사찰이라 전해진다. 선운(禪雲)이란 ‘구름 속에 누워 참선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을 뜻한다. 선운사 대웅보전에는 장방형의 수미단 위에 비로자나불좌상을 본존(사진 1)으로 하여 좌우에 약사불좌상과 아미타불좌상이 봉안(사진 2)되어 있다. 원래 비로자나불상의 협시불로는 노사나불과 석가불상이 배치되는 것이지만 석가불상의 협시인 약사불상과 아미타불상으로 구성된 비로자
경상북도 고령 대가야박물관 경내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2구가 전시되어 있다. 이 불상 2구는 어느 절에 있었던 것을 옮겨왔는지, 또 언제 조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1976년 고령군 내 여러 절터에 흩어져 있던 불상을 모아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석조비로자나불상 2구 모두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세부표현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중 1구(사진 1)는 광배를 갖추고 있으나 불상의 머리는 이어붙인 흔적이 있으며 양쪽 무릎도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얼굴은 둥근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며 머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금동비로자나불입상 2구는 크기나 조형감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상 중에서 보기 드문 입상이며 손의 좌우가 바뀐 좌권인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그중 큰 편에 속하는 금동비로자나불입상은 조형적으로 우수한 편이다(사진 1). 머리를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인 채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서 있는 모습에서 여유로우면서 여성적인 자태마저 풍긴다. 머리는 작아지고 신체는 길어지면서 균형이 잡혔으며 어깨에서 발 아래까지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자락 표현에서도 비교적 간결하면서 세련된 조형미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원래 있었던 봉안처나 유래과정에 대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사진 1). 철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철불좌상으로 가슴과 팔, 다리 부분에 주물의 외형을 이어붙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전반적으로 균형감 있는 신체비례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비로운 얼굴 표정이 매우 인상적이다. 종교적 신비함을 가진 위엄스러운 얼굴이라기보다 현세적 이미지가 강해 친근한 모습이다. 이 불상의 안정감 있는 자세나 머리 위 큼직한 육계(肉髻), 두 다리 사이에서 모아진 부채꼴 모양의 옷자락 등은 통일신라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석조비로자나불상은 1911년 일제강점기 때 덕수궁미술관에서 구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불상이 봉안되어 있던 사찰이나 그 유래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현재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조비로자나불상이다. 파손된 부분이 거의 없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조각기법도 섬세하고 정교하여 뛰어난 면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근엄한 얼굴 표정과 아담한 신체표현에서 균형 잡힌 조형감을 보여주나 어깨와 무릎의 폭이 줄어들어 약간 왜소한 모습이다. 불상의 육계(
경기도 안성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교통과 문화의 교류를 위한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널리 알려져 왔던 곳이다. 특히 신라 5경이었던 청주, 충주, 원주에서 한강유역으로 연결되거나, 중국과 불교문화를 교류하는데 주요한 항구인 당항진(唐港津)으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지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진전사원(眞殿寺院)이 위치하고 있어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안성지역에는 절터와 불상, 석탑, 부도, 당간지주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안성 운수암(雲水庵) 비로전에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상은 70여
경상북도 김천에서 대구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금릉군 남명 오봉동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뒤편에는 금오산이 있는데, 이 금오산 서쪽 기슭에 갈항사(葛項寺) 절터가 위치하고 있다. 갈항사에 대한 자세한 연혁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통일신라 때 화엄법사 승전(勝詮)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권4 ‘승전촉루’조에 갈항사의 절 이름과 창건에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승전법사는 의상대사의 제자 중 한사람으로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법장대사의 문하에서 화엄을 배웠다. 692년에 법장이 의상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신라로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굴산사(崛山寺)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삼국유사’ 권3에 의하면 ‘847년(문성왕 9) 범일국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굴산사를 개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당집(祖堂集)’권17에는 ‘851년(문성왕 13) 명주의 도독 김공이 청하여 범일이 굴산사에 입산하여 지냈다.’고 되어 있다. 굴산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9세기경 범일(梵日)이 주석하면서 선종 산문 중심의 사찰로서 세력이 확대된 것으로 짐작된다. 강릉을 중심으로 영동지역과 양양을 비롯하여 평창, 춘천, 홍천 뿐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 마애마을에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상은 팔각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하여 앉아 있는 모습이다(사진). 오랫동안 노천에 방치되어 있어서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목에도 머리와 몸을 이어붙인 시멘트 흔적이 심하게 남아 있다. 이곳에는 ‘망천사(望天寺)’라는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이 사찰의 자세한 연혁을 알 수 없다. 주변은 소나무 숲으로 변하여 절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기와편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현재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철책 안에 모셔져 있다. 마애비로자나불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작고 다리의 폭이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에 있는 용운사 절터에는 석조비로자나불상 1구와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43호)이 나란히 놓여 있다. 불상 주위에서 ‘용운사(龍雲寺)’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가 발견되고 옛 절터의 축대가 남아 있어 예전에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불상 앞쪽에 있는 경작지 일대가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마멸되었고 파손된 흔적이 남아 있다. 불상의 머리는 절단되었던 것을 다시 붙여 놓은 것으로 굵은 머리카락이 뚜렷하나 육계(肉髻)
경기도 남양주시 수종사(水鐘寺) 경내에 있는 팔각오층석탑에서 조선시대의 금동불상군 중의 하나인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발견되었다.수종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돌 틈으로 흘러나오는 샘물이 땅에 떨어질 때 종소리를 낸다는 데서 절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458년 세조가 금강산을 다녀오다가 양수리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한밤중에 맑은 종소리가 나서 깨어나 산위의 암자 속에서 십육나한을 발견하고 이듬해에 절을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1890년에 또 한 번 중창이 있었으나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1974년에 대
국립경주박물관 경내에 전시중인 석조비로자나불상 2구는 경주 창림사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다. 창림사(昌林寺)는 경주시 내남면 탑동 남산 서북쪽 기슭, 일명 ‘탑골(塔谷)’이라는 곳에 위치한다. 절 이름은 1918년에 일본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이 부근에서 ‘창림(昌林)’이라고 양각된 수키와를 발견함으로써 밝혀졌다.‘삼국유사’권1에 의하면, 창림사는 신라 박혁거세와 알영비가 태어난 신라 최초의 궁궐지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권4에는 ‘고려 현종 12년(1021) 5월에 경주 고선사의 금라가사(金羅袈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