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은 이제 시간의 주관성을 인정하지만 불교는 그것을 넘어 주관과 객관마저 부정한다. 사진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영속성’. 뉴턴식 시간관은 부파불교에서 이미 극복물리학 혁명 또 있을 땐 공사상 입증될 것 공(空) 사상과 시간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은 공(空)사상으로 알려져 있는바 ‘모든 법(존재 또는 현상)은 그 본체라 할 불변 영속의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이를 무자성(無自性)이라 함]’는 뜻이다. 이는 대상과 주관이 모두 개체로서는 공한 것이며, 인연에 따라 연기(緣起)로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일상생활에서 인식의 대상인 개체 사물에 명칭을 부여하고 개념[相]으로 파악함으로써 마치 실체가 있는 존재로 집착하게 되며, 이런 사유습관에서 시간도 실
지금 보이는 세계가 그대로 현재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고, 수많은 다른 과거의 별들이 중첩되어 있는 세계라고 할 수도 있다. 유부 삼세실유설은 과학적현재만이 실재라는 건 오류 아비달마 논사들의 첨예한 논쟁거리 중 하나가 삼세(과거·현재·미래)와 사물의 실재성에 관한 것이었다. 경량부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고, 설일체유부는 “과거·현재·미래의 일체법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三世實有]”고 하여 팽팽히 맞섰다. 우리의 일상경험으로 볼 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 우리는 현재에만 살고 있는 것이고,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므로 오직 현재만이 실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너무 명백한 사실로 보이는데 왜 ‘
시간이 연속적인가 아니면 최소단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이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현대물리학에서 상대성 이론은 연속적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론과 일반상대론이 결합되면 시공간이 양자화 되어 시간의 최소단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양자론과 일반 상대론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시간의 근본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시간에 최소단위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 최소시간을 ‘찰나’라고 하였다. ‘찰나’의 구체적인 수치(75분의 1초) 자체는 깊은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최소의 시간단위를 도입한 세계관은 현대과학기술의 관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진다. 아비달마 논사들이 시도한 것은 제법무
“찰나멸 찰나생” “모든 것은 空” 대립구사론서 우주·시공간·생명론 다뤄 아프가니스탄 하다지역에 위치한 명상하는 부처님들. 서양에서 시간에 관한 논의가 철학사상의 변천에 따라 달라졌듯이 불교의 시간론 역시 그 철학사상사적 전개와 밀접히 관련되어있다. 불교의 철학적 전개를 크게 초기불교(또는 근본불교), 부파불교, 중관불교, 유식불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 재새시부터 열반 후 일백년 정도까지의 시기이고, 이 기간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한 정도로서 특별히 교리의 철학적 논의가 발전되지 않았었다. 그 후 점차 교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여러 의견이 개진됨에 따라 그 주장에 따라 유파가 발생되어 20개 정도의 부파가 서로 경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
불교 설화 속 시간관 과학적 진실에 가까워시간은 빛의 파동성에 따라 변하는 空한 것 검은구멍이라고도 하는 블랙홀에서는 빛·에너지·물질·입자의 그 어느 것도 탈출하지 못한다. ‘신선노름의 도끼자루’라는 옛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옛날 비슬산 기슭에 사는 나무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산꼭대기에 올라가니 웬 노인 두 분이 바위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 나무꾼도 바둑을 두는데 흥미도 있고 하여 그 바위에 걸터앉아 보게 되었는데, 한참이 지나 바둑이 끝나자 두 노인이 일어서면서 “이제 그만 돌아가 볼까? 자네도 집으로 잘 가게.” 하고는 바람이 휙 불더니 사라져 버렸다. 나무꾼이 바위에서 내려서서 자기가 들고 온 도끼를 보니, 도끼자루는 썩어 없어져 버리고
우주여행시대에 나이-시간은 상대적서 있는 위치마다 시간은 다르게 흘러 옛날의 천자문은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으로 시작한다. 이제 막 글을 배우는 어린이로 하여금 천지와 우주를 먼저 생각토록 한 옛 선비들의 높은 정신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우주홍황’이란 우주가 말할 수 없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이런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시간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한 바퀴 도는 거리가 약 4만km이다. 빠른 제트비행기로 여행을 해도 이틀은 넘어 걸린다. 그러나 빛으로 달리면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이나 돌 수 있다. 이렇게 빠른 빛으로 태양까지 간다면 8분 20초 정도 걸린다. 그러므로 광속로켓을 개발한다면 태양계내의 여행은 방안에서 걷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노인 못 따라잡는 이여송’ 설화가 상대성 원리세상은 빛으로 꾸며진 환상…절대적 시간 없어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사령관으로 위세 당당했던 이여송 장군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하루는 이여송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한 노인이 소를 타고 그 잔치자리를 유유히 지나갔다. 이여송이 노하여 잡으러 쫓아가는데 그 노인은 여전히 저만치 멀어져 유유히 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말을 빨리 달려 좇아가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쫓다보니 산중에 들어가 그 노인으로부터 준엄한 가르침을 받고, 조선을 더 이상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설화에는 비현실적인 신비한 요소가 있어서 오히려 더 관심을 끌고 오래 기억되게 하는 수가 많은데, 이여송 설화에도 ‘말로 뒤쫓아 가는데 천천히 앞서가는 소가 계속 일정
뉴턴 이후 시간의 절대성 인식 보편화과학 발전할수록 용수 시간관에 주목 첫 회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정밀하게 측정되며 전 지구뿐 아니라 인공위성이 날아다니는 공간에까지 표준시간이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는가를 말하였다. 구태여 이러한 현대 기술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경험 또는 직관으로 보아도 시간은 우주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일정하게 흐를 것이라고 믿어진다. 내가 잠을 자든 운동을 하든 시간은 여여히 흐르며 즐겁든 괴롭든 시간은 무심하게 흐름을 알고 있다. 시간은 보편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꼭 같이 흐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평한 자연의 법칙이며, 하나의 시간이 전 우주에 걸쳐 균일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과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뉴턴은 그의 명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이러한 우리들의 일상적
원자시계 등장으로 백만분의 1초도 공유느긋한 삶에서 분초 다투는게 현대의 삶 살바도르 달리(1904~1989)의 ‘시간의 눈’ 시간이 무어냐고 물으면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막연해진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과학적 답으로는 ‘시계로 재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무엇이든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면 시간을 재는데 쓰일 수 있으므로 시계라 할 수 있겠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면 한 해가 되고, 달이 지구를 한 번 돌면 한 달이고, 지구가 자전을 한 번 하면 한 날(日)이 지난다. 우리에 친근한 해와 달과 지구가 년(年, 해), 월(月), 일(日, 날)의 시간단위를 자연스럽게 제공한다. 한 해는 대체로 12 달이므로 시간단위에 12진법이 들어왔고, 하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