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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트롱 미국 베이츠대학 교수-하

“아쇼카 왕은 불교 개혁가이자 최고 신앙인이었다”

▲ 존 스트롱 교수는 "아쇼카 왕은 때론 폭압적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변질된 승단을 개혁하고 불교를 선양하는 데 앞장섰던 군주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아쇼카 왕의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선하고 정직하며 의롭고 고결하고 종교적인 왕비를 갖는 것이 훌륭한 불교 군주의 표시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반면 악하고 비도덕적인 왕비를 갖는 것은 악한 왕의 표시였습니다. 실로 왕비는 군주의 살아 있는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아쇼카에게는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 중 아산디미타와 티시야락시타(Tiṣyarakṣitā)는 각각 왕비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많은 전설 속 아쇼카 왕은
폭압적 군주로도 나오지만
변질된 승가 개혁한 군주
3차 결집으로 ‘율’을 정립
8만4000 탑 조성하기도

아산디미타는 아쇼카의 첫 번째 왕비로 의롭고 도덕적이며 독실하게 불교를 믿었던 아내였습니다. ‘마하밤사’의 한 주석서에 따르면 그녀는 죽기 전에 불교에서 깨달음으로 향하는 네 단계 가운데 첫 단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한 후대의 상좌부 전승에서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나옵니다. 우선 아쇼카가 꿀을 바쳤다는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후생에 아산디미타로 태어난 젊은 여인이 독각을 꿀가게로 인도했을 뿐 아니라 독각에게 피륙을 바쳤다고 합니다. 후생에서 그녀는 아쇼카의 왕비가 되었고, 그녀가 쌓은 공덕으로 마법을 일으키는 칠기로 된 공에서 승복을 만드는 데 적합한 피륙을 마음대로 만들어서 스님 6만명의 옷을 지었다고 합니다. 

다른 본에서는 이 이야기가 그녀의 공덕으로 아쇼카가 불교를 후원하게 되었다고도 전합니다. 끊임없이 피륙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으로 남편을 매료시킨 뒤 그에게 법을 설하여 불교에 귀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쇼카는 다르마를 배우고, 도덕적인 규범들을 실천하며 8만4000개의 탑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쇼카의 다른 왕비인 티시야락시타는 아산디미타와 정반대였습니다. 아산디미타가 의롭다면, 티시야락시타는 간계하고 교활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본에 의하면, 아쇼카는 불교에 귀의한 뒤 머지않아 많은 보석과 장신구를 보디(보리수)에 공양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티시야락시타는 보디가 나무라는 것을 몰랐고, 그것이 자신의 라이벌이 될 후궁의 이름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는 그런 선물을 주지 않는 것에 화가 난 그녀는 마법사에게 ‘보디’를 독살하도록 했습니다. ‘보디’가 나무인 것을 알고 있던 마법사는 이 명을 받고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법사는 더 묻지 않고 보디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마법을 써서 나무 둥지에 실을 두르자 곧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아쇼카는 매우 상심했습니다. 그러나 티시야락시타는 아쇼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보디’가 죽으면 자신이 얼마든지 왕을 즐겁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를 들은 아쇼카는 ‘보디’가 여인이 아니며 깨달음의 나무라고 설명해줬습니다. 그때서야 티시야락시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마법사에게 저주를 되돌리도록 했습니다. 다행히 마법사가 늦지 않게 조치를 할 수 있어 나무는 살아났고, 아쇼카도 회복되었습니다.

티시야락시타가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아쇼카의 다른 왕비가 낳은 쿠날라(Kunāla)가 눈이 멀게 된 이야기입니다. 쿠날라는 의롭고 정직했을 뿐 아니라 용모가 준수하고 맑고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티시야락시타는 쿠날라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쿠날라에게 접근하여 그를 유혹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쿠날라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티시야락시타는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티시야락시타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쿠날라가 멀리 탁실라라는 변방으로 떠났을 때 아쇼카는 큰 병에 걸렸습니다.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아쇼카는 쿠날라를 불러 그를 왕위에 앉히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티시야락시타는 아쇼카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이를 고맙게 여긴 아쇼카는 티시야락시타에게 어떤 소원이든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쿠날라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은 그녀는 7일 동안 왕으로 통치할 권한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려 쿠날라의 눈알을 뽑게 했습니다. 쿠날라를 좋아했던 탁실라 관리들은 눈알을 뽑으라는 왕명을 차마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쿠날라는 왕명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며, 형리에게 자신의 눈알을 뽑도록 했습니다. 결국 쿠날라는 탁실라를 떠나 눈이 먼 채 방랑하는 악사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쇼카는 크게 분노했고, 곧 티시야락시타의 소행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의 여러 본들이 엇갈리고 각기 다른 결말을 보여 줍니다. 산스크리트어 본에서 아쇼카는 분노에 가득 차 티시야락시타에게 벌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뽑아내고, 날카로운 갈퀴로 몸을 가를 것이며, 꼬챙이로 찌르고, 톱으로 코를 자르고, 칼로 혀를 잘라내며, 몸에 독을 채울 것이다.”

다행히도 쿠날라가 이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자비심을 갖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티시야락시타처럼 악행을 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자비심이 붓다의 길이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 자비심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눈이 원래대로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쿠날라의 눈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아쇼카는 티시야락시타를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그녀를 칠기(lacquer)로 된 집에 넣어 죽였고, 이에 더하여 탁실라의 모든 주민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군주로서 아쇼카의 서로 다른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이 시점에 아쇼카는 이미 법왕, 즉 의로운 호불왕으로 오랫동안 다르마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 왔지만, 다시 잔인하고 충동적이며 사나운 군주로 돌아가 이러한 폭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은 텍스트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다르게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산스크리트어본의 한문 번역본에서는 이야기가 비슷하게 전개됩니다. 다만 여기서는 쿠날라의 눈이 회복되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아쇼카가 티시야락시타에 가한 폭력이 그녀의 범죄에 대해 적절한 형벌로 여겨질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중국인들은 이 이야기를 옮기면서 티시야락시타를 잔인하게 죽게 합니다. 그러나 티시야락시타가 그렇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그녀가 전생에 저지른 나쁜 업의 결과라는 이야기를 넣음으로써 아쇼카에게 어느 정도 면죄부를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11세기에 시로 쓰인 다른 본에서는 아쇼카가 쿠날라의 눈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자비심을 갖고 티시야락시타를 용서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쇼카의 불교 승가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전승에 따르면, 아쇼카는 8만4000개의 불탑을 건립한 뒤에 여러 종류의 행사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 행사들을 통해 그는 당시 불교계 고승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선 목갈리푸타(Moggaliputta Tissa)라는 고승과 함께 ‘3차 불교결집’을 진행했습니다. 이 행사에 대한 이야기는 팔리어 전승에만 나옵니다. 또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전승은 아쇼카가 고승 우파굽타(Upagupta)와 함께 8만4000개의 탑 건립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 행사들은 각각 아쇼카와 불교계의 관계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팔리어 전승에 따르면 아쇼카는 불교에 대한 지원을 많이 해 불교계는 매우 풍족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불교를 믿지 않는 많은 이교도들도 승려가 되기로 했습니다. 정신적인 이유가 아니라 좀 더 편안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 승가는 여러 파로 분열되었고 붓다의 가르침은 더렵혀지게 되었습니다. 목갈리푸타와 그밖의 정통파 스님들은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포살에 이교도적인 신입 스님들의 참여를 제한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쇼카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결국 그는 신하를 보내 스님들에게 포살을 함께 행하라고 명하고 이를 거부하는 스님들은 머리를 잘라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아쇼카의 신심 깊은 동생이 개입하기 전까지 여러 명의 고승들이 이렇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아쇼카는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는 바른 불교신앙을 확립할 수 있는 조정자로 고승 목갈리푸타를 왕궁으로 초청했습니다. 이후 아쇼카는 목갈리푸타의 견해에 반하는 스님들을 승가에서 쫓아냈습니다. 이로 인해 사견을 가진 6만명의 스님들이 승복을 벗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갈리푸타는 아쇼카의 후원을 받아 정통적 견해를 가진 스님들을 중심으로 대결집 행사를 열었습니다. 여기서 바른 다르마와 승가의 규칙인 율(律)이 다시 확립되었습니다. 이어서 원 모습을 찾게 된 교의를 가르치기 위해 포교승들을 스리랑카를 비롯한 여러 곳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아쇼카의 두 가지 불교 군주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승가를 정화시킨, 혹은 개혁한 군주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 밖에 불교를 퍼뜨린 군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거론하는 텍스트는 11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팔리어 텍스트 ‘로카판나티(Lokapanntti)’입니다. 이 텍스트는 그 이전의 산스크리트어 문헌들에 기초한 것인데, 불사리를 봉안한 8만4000 탑의 건립을 축하하기 위해 아쇼카가 열었던 행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쇼카는 붓다를 찬탄하면서 스님들과 불탑에 7년 7개월 7일 동안 보시를 했습니다. 이 중에는 온 나라와 모든 불탑을 밝힐 정도로 수많은 등잔을 바친 보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절정은 아쇼카가 붓다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 전체를 면으로 싸게 하고 500개의 항아리에 담긴 향유를 곳곳에 바릅니다. 그리고 불탑을 향해 합장하고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한 뒤 부처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게 했습니다. 화염은 곧 일곱 사람의 높이만큼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나 화염은 아쇼카의 몸을 태우지 않았습니다. 7일 동안 불길이 타올랐지만 아쇼카는 전단목 처럼 고요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쇼카가 최고의 불교 신앙자로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남방불교 전통에서 전하는 아쇼카 전설 가운데 일부만을 설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불교 군주로서 아쇼카의 여러 면모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쇼카가 승가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보았고, 약간은 회의적인 면도 보았습니다. 이러한 전설을 통해 아쇼카가 불교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통과 비정통, 정견과 사견을 나누는 개혁가였을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승가를 물질적으로 후원하며 큰 공덕을 지었고, 최고의 신앙인으로서 깊은 신앙을 실천했던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재단법인 리앤원이 9월9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진행한 ‘초기불교 언어, 전설, 유물’ 국제학술강연회에서 존 스트롱 미국 베이츠대학 교수가 강연한 ‘호불왕 아쇼카의 전설과 그 다양한 면모’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409호 / 2017년 9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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