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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요동성에 세워진 아쇼카왕 불탑

기자명 주수완

우리 땅이 오래전부터 불국토였음을 천명한 신의 한수

▲ 미얀마 바고의 쉐모도 파고다. 버마에는 아쇼카왕과 연관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실린 ‘요동성 육왕탑’의 이야기는 당나라 때 도선(道宣, 596~667) 율사께서 저술한 ‘집신주삼보감통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일연 스님이 채록한 것이다. 제목의 뜻은 ‘요동성에 있던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란 뜻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동성에 고구려의 성왕이라는 왕이 순행을 왔다가 신비한 오색구름이 휘감아 돌며 머무는 곳을 발견했다. 이에 그곳으로 다가가보니 그 구름 속에 지팡이를 든 승려가 홀로 서있는 것이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노인은 사라지고 대신 3층의 흙으로 쌓은 기단 위에 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탑만 보였다. 왕은 승려가 서있던 자리를 파보게 했는데, 지팡이와 신발과 더불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명문이 나왔다. 마침 그 중에 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어 이것이 불탑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에 고구려 왕은 불교를 믿을 결심을 하고 이 탑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금 7층의 목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요동성에 아쇼카왕 세운 탑
‘삼국유사’의 탑상편에 등장

아쇼카왕 8개탑 사리 꺼내
인도 전역에 분산해서 봉안

아쇼카 왕이 고구려 땅에도
탑 쌓았다는 기록 설화일 듯

요동에 고구려가 쌓은 탑은
기록과 그림으로 남아있어

요나라 때 쌓은 백탑자리가
고구려 탑 있던 곳으로 추정

불교와 오랜 인연 강조위해
아쇼카 탑 전설 만들었을 것

이 이야기의 원본인 도선의 ‘집신주삼보감통록’이나 이를 채록한 일연 스님이나 모두 이 탑을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라고 하였다. 과연 아쇼카왕이 인도 바깥, 그것도 중국을 건너 동쪽 끝단의 고구려 요동성에 탑을 세울 수 있었을까? 인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드신 후 다비를 하고 나온 사리는 모두 8등분 하여 8개의 탑을 세웠다. 그런데 그 후 100년 정도 뒤에 아쇼카왕이 인도 전역을 통일하고 이들 8개의 탑에 있던 사리들을 꺼내어 제국 영토에 골고루 도합 8만4천개의 탑을 세워 그 안에 각각 분산하여 봉안했다고 한다. 아마도 불교를 인도 전역에 전파하고 각 지역의 불교도들이 보다 쉽게 부처님께 공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 중국 감숙성에서 발견된 북량 시대의 석탑들. 아마도 이런 작은 석탑들은 땅에서 발굴된 아쇼카왕 석탑을 모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설화는 이 8만4천개의 탑이 모두 인도 안에 세워진 것이었을 뿐 중국에까지 세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들 수많은 탑이 세워진 곳 중에 중국이나 고구려가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는 물론 후대에 해당 지역의 사람들이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인도에서 약간 벗어난 곳, 그러니까 실크로드나 미얀마 같은 곳에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 있다는 정도로 그 범위가 조금 확장된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사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쇼카왕이 그런 곳에 인부를 보내 직접 탑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8개의 탑에서 나온 진신사리 일부를 보내 탑을 세울 것을 지시하거나 종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래서 실제 미얀마에는 아쇼카왕이 불교전파를 목적으로 파견한 승려들이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전하는 탑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스리랑카, 미얀마 등은 인도와 인접해 있어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 실크로드를 따라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 발견되는 곳이 점점 동쪽으로 옮겨지더니 처음에는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감숙성 지역에서 발견되기 시작하다가 섬서성을 거쳐 나중에는 뱃길을 따라 중국 복건성이나 남경 등에서도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 발견되며, 급기야 고구려 땅 요동성에서도 발견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기에 ‘집신주삼보감통록’에서 지칭하는 ‘신주(神州)’의 정확한 개념은 단순히 당시의 중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서역(중앙아시아)과 인도를 아우르는 지금의 ‘아시아’를 일컫는 개념에 더 가깝다. 이들 서로 다른 지역을 ‘신주’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이유는 당연히 불교라는 공통분모 덕분이다. 이를 바탕으로 책 제목을 풀어보면 “불교가 전파된 아시아 전역에서 불교가 일으킨 기적의 기록”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 중국 요령성 요양의 백탑.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의 배경이 된 요동성이 있던 곳이어서, 육왕탑 자리에 이 백탑이 세워진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여하간 이 ‘집신주삼보감통록’에 등장하는 아쇼카왕이 세운 탑의 모습은 대략 이렇다. 재료는 돌과 비슷한 재질이고 높이는 한 자 네 치, 즉 1.4척이니까 대략 45㎝, 그리고 5단의 상륜부를 가졌으며, 그 모습이 인도와 호탄의 불탑과 비슷했다고 한다. 크기는 우리가 흔히 ‘탑’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건축물의 크기는 아니지만, 둘레에 방울과 구리로 만든 경쇠가 달려 있었다고 하니 비교적 정교한 형태였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탑이 아니라, 인도의 스투파 모양으로 생긴 사리기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실제 감숙성에서 발견되는 소위 “북량탑”이라는 독특하게 생긴 탑들이 있는데, 아마도 아쇼카왕탑을 모델로 만든 복제품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고구려 왕이 발견한 요동성의 아쇼카왕 탑은 3층의 토탑, 즉 흙으로 쌓은 탑이었다. 아마 벽돌탑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탑이었던 것 같고, 그 위에 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구조물이 있다고 했으니 이는 ‘집신주삼보감통록’에서 인도나 호탄의 탑과 같다는 설명과 일치한다. 솥을 엎어 놓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인도의 스투파처럼 둥근 형태의 탑을 ‘복발탑’, 즉 발우를 뒤엎어 놓은 모양의 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고구려 왕은 이 탑을 보호하기 위해 7층의 목탑을 덮어 씌웠다. 그렇지만 완전히 덮어 원래의 아쇼카왕의 탑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 것 같고, 아마 안으로 들어가 보면 원래의 탑을 볼 수 있는 구조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또한 고구려는 주로 8각형의 탑을 세웠는데, 이 요동성에 세운 7층 목탑도 아마 8각형 평면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삼국유사’ 기록에도 이미 오래 전에 낡아서 점차 층수가 낮아졌다고 했는데,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가 이곳을 지날 때만 해도 이곳은 이미 “空曠蕭條(공광소조)”, 즉 텅 비고 쓸쓸한 상태였다고 하니 세월이 오래 흐른 탓도 있고, 연개소문 이후 도교를 중시한 결과이기도 하리라 짐작된다.

현재 중국의 요양시에는 요동성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로 전해지는 곳이 있는데, 그 외곽으로 ‘백탑’이라는 요나라 때 세워진 거대한 탑이 있다. 혹자는 바로 이 자리가 요동성 육왕탑이 세워져 있던 곳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 고구려 고분 중에 요동성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벽화가 그려진 “요동성총”에도 요동성의 안과 밖에 고층 누각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이것이 탑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추정되며, 성 바깥의 누각 자리가 현재의 백탑이 서있는 육왕탑 자리일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 중국 섬서성 부풍 법문사의 진신사리탑. 진시황 때 인도에서 온 아쇼카왕의 승려사절단이 가져왔던 불지사리가 발굴된 장소에 세워졌다.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이런 탑이 중국과 고구려에까지 세워졌다는 전설은 왜 생겨났을까? 아마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절을 세워야했고, 당시로서는 절을 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탑을 세워야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탑을 세우기 위해 진신사리를 구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신사리를 얻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인도의 승려들이 직접 진신사리를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오는 것이었다. 서안 근교 부풍의 법문사는 부처님의 불지사리, 즉 손가락 사리로 유명한 곳인데, 이곳은 아쇼카왕이 보낸 승려 포교단이 중국 진시황을 찾아왔다가 포교를 거절당하자 가지고 온 진신사리를 묻어놓은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었다. 이곳을 한나라 때 파르티아에서 온 승려 안세고가 발굴하여 진신사리를 찾아내고 이를 기념하여 탑을 세운 것이 계속 이어져 지금의 법문사탑이 되었다.

그 다음 방법이 ‘요동성 육왕탑’처럼 아쇼카왕에 의해 세워졌다가 땅에 묻힌 탑을 발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발견된 탑이 정말로 아쇼카왕이 세운 8만4천개의 탑 중의 하나라면, 틀림없이 그 안에 있는 사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인 셈이다.

이렇게 진신사리를 구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지만, 더 나아가 중국에 불교를 전하는 스님들과 불자들은 불교가 결코 그 당시에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이미 인도의 아쇼카왕 시절부터, 그리고 중국의 입장에서는 진시황 때부터 불교가 전해져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불교는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불교가 결코 신흥종교가 아님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연 스님은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이 아쇼카왕탑을 찬했다. “기인지점제신번(幾人指點祭神?)”. 풀자면 “몇 사람이나 이 신성한 무덤에 제를 올렸을 것인가!”일텐데, 여기서 일연 스님이 불탑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 대신 무덤이라는 뜻에 가까운 ‘스투파’의 원뜻을 살려 ‘무덤 번(?)’자를 선택한 것이 주목된다. 일연 스님은 진신사리가 매납된 이 탑을 진정한 스투파, 즉 석가모니의 무덤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단어의 선택이야말로 우리 땅 역시 오래전부터 불국토로서의 인연과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싶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09호 / 2017년 9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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