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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분별없는 윤리학, 차별 없는 존재론-하

모든 것은 서로 각자 다른 형태로 평등하다

▲ ‘야승추로적부거(也勝秋露滴芙蕖)’고윤숙 화가

‘장자 만물이 모두 평등하다’는 장대한 존재론적 사상을 펼쳐 보여준다. 발가락 사이에 이어져 있는, 흔히 없는 살조차 군더더기로 여기지 않으며, 손가락이 갈라져 여섯 일곱이 된 것 또한 쓸데없는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장자’ 전편에 걸쳐서 추한 몰골의 인물이나 곱사등이, 절름발이 등이 최고의 도를 터득한 인물로 반복하여 등장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기형이 없다
각자 자기 나름의 형태만이 있을 뿐
차별 초월하면 각자 기준 세상 열려

이런 생각은 ‘적자생존’의 경쟁적 진화론을 쓴 것으로 알려진 다윈의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진화나 적자생존은 형태가 좀 더 완전한 것이나 기능이 좀 더 충분한 것이 살아남으며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는 게 진화라는 생각과 아주 다르게, 환경에 따라 살아남기 유리한 것이 살아남는 게 진화이고, 이는 종종 형태나 기능의 완전성이 ‘감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됨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를 전해준다. 마데이라제도(諸島)라는 섬에 사는 풍뎅이는 그 종의 수에서나 개체 수에서나 50% 정도가 날개가 없어서 날지 못하는 것이다. ‘기형’이나 ‘불구’라 할 만한 풍뎅이가 통상적인 경우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것이다. 다윈에 따르면 그곳이 바람이 많은 섬이란 사실이 그 이유다. 즉 날개가 발달하여 잘 날아다니는 놈은 바람에 날려 바다에 빠져 죽는 경우가 많은 반면, 날개가 기형이라 못 나는 놈은 그러지 않아 살아남은 것이다. 적자생존이란 이런 것이다.

생명체의 능력이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능력이다. 그것이 진화의 원동력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물속에선 어류가 가장 탁월하고 습지에선 양서류나 파충류가 가장 탁월할 것이다. 높은 산 위에서라면 당연히 조류가 최고다. 작은 것은 작아서 생존에 유리하며, 큰 것은 커서 생존에 유리하다. 즉 모든 생명체는 나름의 생존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장애라든지 기형이라든지, 불구 같은 관념은 특정한 형태의 유기체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관념일 뿐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기형’은 없다. 각자 자기 나름의 형태가 있을 뿐이다. 동시에 자연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불구’ 아닌 것도 없다. 인간은 물에 들어가면 죽고 상어는 뭍에 올라오면 죽는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선 모두다 불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공평하다. 분별을 하지 말하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적 가르침이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모두 차별 없이 평등함을 설하지만, 그것은 모두 동일함을 설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서로 다른 채, 또한 서로 다르기에 평등함을 설하는 것이다. “풀줄기와 큰 기둥, 문둥이와 서시(西施)로부터 세상의 온갖 이상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도는 통해서 하나가 되게 한다”는 말이 그러하다(‘장자 1’, 88).

그러나 지식은 분별한다. 이런 분별에 애증의 감정이 수반된다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호오와 우열의 판단은 따라다닌다. 여기서 문제는 척도다. 판단하는 자의 특정한 척도로 모든 것을 분별하고, 평가하며, 위계화하는 것이다. 가령 경제학은 생산성을 척도로 사물이나 사람을 분별하고 호오를 평가한다. 같은 비용이면 좀 더 많이 좀 더 싸게 생산하고자 하는 자의 척도가 모든 것을 분별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이나 사람이 갖는 다른 측면들은 사상되어 보이지 않게 된다. 장자가 보기에 이는 자연의 존재론적 평등성을 보지 못하는 작은 지식이다. 그래서인지 “도(道)로서 조화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세간에서]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옳다고 여기고, 세간에서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다.”(‘장자 1’, 124) 추하고 기형인 인물을 도에 가까운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 이 때문이었을까? 어쨌건 이럼으로써 세간에 통용되는 “편견을 없애버려 경계 없는 경지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고자 한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분별하지 않으면 될 뿐이다”는 3조의 말은 ‘장자’에서 펼쳐지는 이런 도의 개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선가에서 도와 시비의 분별을 상반되는 자리에 놓고, 도와 지식을 대립시켜 깨달음(證悟)을 지식에 의해 얻어지는 깨달음(解悟)과 대비하는 오래된 전통 또한 그렇다. 조주가 간택이나 명백함/모호함 이전으로 거슬러 올랐던 ‘모른다’의 경지는 이렇게 시비의 분별을 모르는 경지,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나 차별이 생겨나기 이전의 경지였던 것이다. 시비로 갈라지기 이전의 ‘하나’, 혹은 하나 이전의 ‘무’가 그것이다. 좌우와 인륜, 의리, 차별과 경쟁, 다투는 일 등의 구별이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장자 1’, 102)

분별이 사라진 세계,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차별이 사라진 세계, 모든 것은 각자대로의 다른 채 평등한 세계다. 그 존재론적 평등성의 평면 위에 펼쳐지는 것은 순수긍정이다. 작은 작은 것대로 긍정하고, 큰 것은 큰 것대로 긍정하는 것, 예쁜 것은 예쁜 대로 긍정하고 추한 것은 추한대로 긍정하는 것.

운문이 “십오일 이전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지만, 십오일 이후에 대해서 한 구절을 말해 보아라”라고 묻곤 대중을 대신하여 스스로 이렇게 대답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벽암록’상, 71) 십오일은 안거가 끝나는 날이라고 한다. 안거는 깨달음을 얻고자 들어앉아 집중 수행하는 것이다. 안거가 끝났다고 모두가 깨달음을 얻었을 리는 없지만, 얻고자 한다면, 그 뒤는 모든 분별심이 사라지고 천 가지 차별이 끊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차별이 끊어진 뒤엔 어떠하겠는가 묻는 말일 게다. 차별이 끊어지면 모든 것을 오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긍정할 수 있다. 그렇게 긍정하는 이에게는 매일이 좋은 날일 것이다.

장사(長沙)의 봄 얘기는 분별이 사라진 뒤에 ‘좋고 나쁨’을 말하는, ‘장자’와는 다른 새로운 경지가 열림을 보여준다. 장사가 하루는 산을 유람한 뒤 돌아오니 수좌가 물었다.

“스님께선 어딜 다녀오십니까?”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위험한 대답이다. 분별을 떠난 이가 따로 좋은 것이 어디 있다고 유람을 한단 말인가? 하여 수좌가 다시 묻는다.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처음에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그리고 나서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느니라.”

역시! 멋진 대답이다. 향기로운 풀은 향기로우니 좋고, 지는 꽃은 지는 모습 그대로 좋다 함이니, 피어나는 것, 지는 것 모두가 좋다는 말이다. 분별을 떠난다 함은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음을 아는 것이다. 수좌도 이를 잘 알아들었던 듯하다.

“아주 봄날 같군요.”
“아무렴, 가을날 이슬방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

여기서 장사는 ‘장자’와 달라진다. 장자에선 모두를 차별 없이 긍정하는 것이 지고의 경지다. ‘제물(齊物)’의 경지. 그러나 장사는 거기 멈추지 않는다. 꽃은 꽃대로 좋고, 낙엽은 낙엽대로 좋다, 바로 그렇기에 꽃을 보는 데야 가을보단 봄이 좋다. 차별이 사라진 존재론적 평면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하나의 초월적 척도로 재는 평면을 떠나, 각자에게 내재하는 각자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내재성의 평면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10호 / 2017년 10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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