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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강태춘

기자명 김영욱

금강에서 길을 찾다

▲ ‘일봉일불’ 부분, 백자토 채색, 62×28cm.

그는 도예가다. 도예가는 흙과 함께 살아간다. 흙은 퇴적된 물질이다. 자연 그대로 두면 식물이 뿌리 내리고 자라게 하고, 사람의 손을 거치면 하나의 조형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도자(陶磁)라 불리며 쓰이거나 감상된다. 도자를 빚어내는 작가를 도예가라 부른다. 도예가에게 흙은 선(禪)의 화두이고, 도자는 화두에 대한 하나의 깨우침이다. 하나의 깨우침을 보여주기 위해 수백 번, 수천 번의 손맛을 담아내는 일생이 도예가의 숙명이다.

흙은 ‘화두’ 도자는 ‘깨우침’
무심코 두드린 죽구의 흔적
형태 벗어난 요체로 재탄생

지천명에 이른 도예가. 그와의 인연이 벌써 17년이다. 나이 차이는 망년지교(忘年之交)이나 행동에 거스름이 없으니 막역지우(莫逆之友)나 다름없다. 매달 매년 가는 작업실이기에 근래 빚어낸 도자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던 터였다. 여름의 무더운 열기가 점차 수그러들 무렵 새로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가로로 긴 흙판 위로 손에 쥔 죽구(竹具)가 빠르게 움직인다. 얇은 대나무가 판을 치고 튕겨 나온다. 지나간 흔적은 산의 뼈대가 되고, 연이은 뼈대는 하나의 산을 이룬다. 이내 산의 암골(巖骨)과 형세가 흙판에 그려진다. 가늘고 주름진 긴 뼈대의 암석이 일품이다. 물어보니 해강 김규진(1868~1933)의 ‘총석정도(叢石亭圖)’를 보고 떠올렸다고 한다. 무심코 두드린 대나무의 흔적이 새로운 화두를 만들어낸 것이다.

‘시심마(是甚麽)’, 이게 무엇인가? 그저 흙 위에 두드린 대나무의 흔적이다. 흔적은 이내 하나의 현상을 이룬다. 다시 무수한 두드림에 의해 현상은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현상으로 나타난다. 대나무의 흔적은 산을 이룬다. 그것은 물질적인 현상으로 파악되지만, 변화하는 현상의 실체는 파악할 수 없다. 작가는 궁극적인 실체를 공(空)으로 표출한다. 이는 반야(般若)의 핵심이다.

그가 다른 작품을 선보였다. 산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먹의 농담으로 그려냈다. 세로로 긴 산봉우리의 정상으로 눈을 돌리니 승려 혹은 보살의 형상을 한 인물이 앉아 있다. 문득 떠오르는 시 한 구절이 있다.

‘기달산에 들어온 뒤부터 날마다 담무갈에 관해 들었네. 이곳에서 보살을 보니 묘연한 한 바윗돌이구나(自入怾怛山 日聞曇無竭 及此見眞身 杳然一巖).’

이민구(1589~1670)의 시이다. 기달산은 봄날 금강산의 별명(別名)이고, 담무갈은 다른 말로 법기(法起)라 부른다. ‘화엄경’권45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서 말하기를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으니, 그곳의 담무갈보살이 일만이천 보살과 함께 반야심경을 설법한다”고 했다. 이민구가 본 담무갈 형상의 바위도 이러했을까. 작품의 인물이 반야를 설법하는 담무갈인지, 설법을 경청하는 승려의 모습인지 그 실체와 현상은 알 수 없다. 그저 일순(一瞬)의 두드림에 의해 구현된 작가의 화두이자, 작가가 만난 불가(佛家)와의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일기일회(一期一會)라 했다. 생애 단 한 번의 만남을 말한다. 되짚어보면 중국 진나라 사람 원언백이 말한 “만세일기 천재일우(萬歲一期 千載一遇)”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일본의 다도가 야마노우에 소우지도 “평생 단 한 번의 만남(一期に一度の会)”이라 말했고, 법정 스님 또한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다”는 글을 남겼다.

흙은 작가의 화두이고 빚어진 도자는 화두에 대한 깨우침이다. 흙을 빚는 연륜이 더해가면 형태의 미를 벗어나 찰나에 떠오른 화두가 형태의 요체가 된다. 나아가 도예가는 빚고 있는 손맛에 의해 화두를 깨우친다. 그간 쓰임의 그릇과 아름다운 달항아리를 빚어온 작가에게 이번 작업의 화두는 마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작가와 반야의 일기일회인 것이다. 작은 파문은 얼마 전 전시에서 선보이며 주목을 끌었다. 머지않아 점차 퍼져나가는 파문이 반야의 요체에 닿길 기원한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411호 / 2017년 10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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