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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귀향, 혹은 부모도 태어나기 전 고향에 대하여-중

고향이란 자신이 좋다고 믿는 아상의 한 조각

▲ ‘제행무상(諸行無常)’고윤숙 화가

고향이란 말에서 아직도 강한 그리움과 향수를 느끼는 이들은 실향민들일 것이다. 저기 멀지 않은 곳에 고향이 있지만 철조망보다 무시무시한 군사분계선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이들.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 외국에서 살게 된 이들.

고향 변해도 향수 품는 건 조상 체취 때문
근원으로 올라가면 지구 그 자체가 고향
불교에서 고향은 만법 근원 되는 그 무엇

가령 1960년대 재일조선인들이 느끼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단지 일본생활에서 감수해야 했던 고통의 음각화(陰刻畵)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많은 이들이 강제징용에 의해, 혹은 먹고 살 것을 찾아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났고, 그렇게 떠난 고향이 바다 건너편 바로 저기에 있었으니까. 그것이 재일조선인의 ‘북송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기분이었을 게다. 니이가타(新潟)는 그 북송선이 떠나던 도시였다. 4·3 항쟁으로 인해 밀항해서 도망쳐, 환영받지 못하는 일본에서의 삶을 살았던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은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조국’이란 말로 쉽게 환기되는 그런 귀향조차 고통스런 현재의 피안을 찾는, 고통 없는 낙처(樂處)가 저기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희망이 산출한 것임 또한 잘 안다. “항상/ 고향이/ 바다 건너편에/ 있는 자에게/ 어느새/ 바다는/ 소원으로밖에/ 남지 않는다.”(‘니이가타’, 글누림, 93쪽)

더욱 난감한 것은 그들이 돌아가게 될 고향은 그들이 떠나온 고향과 결코 동일할 리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다. 지명의 동일성이 고향의 동일성을 보증해줄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함께 살던 이들은 대부분 이런저런 이유로 떠났을 것이고, 남은 이들조차 전과 같을 리 없다. 떠날 때와 다른 정치적 경제적 조건이 그곳을 다른 땅으로 만들었을 테고, 심지어 향수 속에 떠올리던 산과 들판의 ‘풍경’마저 같은 모습일 가능성이 없다. 그렇기에 그런 귀향은 부재하는 고향으로, 또 하나의 타향이 된 땅으로 되돌아가게 될 게 분명하다.

그처럼 다른 모습이 된 땅, ‘고향상실’이란 말처럼 망가지고 상실되어버린 그 땅 또한 고향이라 해야 할까? 여전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귀향을 소망한다면, 그렇게 바뀌어버려 당혹스레 대면하게 될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까? 사실 세상만사가 무상한 변화 속에 있다면, 예전에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란 이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귀향이란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소망 아닌가?

낙포 원안(洛浦 元安)은 이를 잘 알고 있다. 낙포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다.

“제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집은 허물어지고 가족도 흩어졌거늘 그대는 어디로 돌아가겠다는 말인가?”(‘공안집 2’, 한국전통사상총서 간행위, 1101쪽)

그렇다. 고향의 풍경이 달라지지 않았다 해도, 이미 자신이 떠나왔던 것처럼 다른 가족들 또한 떠나서 흩어졌을 것이고, 집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집이 아닐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학인이 돌아갈 곳을 찾으며 묻는 ‘고향’이란 단지 지리적인 땅으로서의 고향만은 아니다. 그것은 육조대사가 말했던 “부모도 태어나기 전의” 탄생지, ‘본래면목’이라고 부르는 본원적인 것이다. 만법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가 귀의해야 할 본원의 ‘도’나 불법을 묻는 질문이지만, 역으로 흔히 말하는 ‘고향’이란 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낙포에게 물었던 학인도 그랬지만, 자신이 살던 생활의 장을 떠나 고향으로 가겠다며 북송선을 탔던 이들이나, 고향상실에 대한 향수 속에서 존재를 사유하고자 했던 하이데거에게나 모두 되던져져야 할 질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겨움과 그리움이 멀리 떠난 사람들을 당기는 힘을 갖고 있는 곳이 고향이다. 정겨움과 그리움이 거기 맴돌고 있다면, 그건 거기에 그리운 사람들이 있고 익숙한 산과 내, 논과 밭이, 나무와 풀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도 그랬겠지만, 북송선을 타고 귀향한 이들이 당도한 곳은 정확하게 낙포 말대로 집은 허물어지고 가족은 흩어진 곳이었을 게다. 떠나올 땐 일본의 식민지였던 땅이었으나 돌아갈 곳은 사회주의 정권이 지배하는 땅이었으니, 사람이든 땅이든 예전의 모습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곳이 고향이라 믿는다면, 그곳이 바로 나의 ‘조국’,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내 ‘할아버지’가 살던 곳이고 나의 ‘조상’이 살던 곳이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장편시 ‘니이가타’에서 김시종은 ‘조상’을 찾아가려면 제대로 찾아가야지 그 정도 갖고 되겠느냐 반문하는 것 같다. 조상이란 나를 낳아 존재하게 해준 기원을 뜻한다. 그렇다면 조상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단지 할아버지에서 멈추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찾아 계속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학이 아니라 과학을 따른다면, 그 기원은 신이 아니라 나의 유전자를 통해 이어진 인간 이전의 유인원, 그 유인원 이전의 어떤 생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모든 생물의 발생적 기원인 박테리아까지는 그만둔다고 해도, 최소한 동물들의 폭발적인 탄생이 있었던 고생대의 캄브리아기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내가/ 고생대의/ 조용함 가운데서/ 서성대고 있다.”(‘니이가타’, 68) 그렇다면 나의 조상이 탄생한 땅은 지금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지리적 명칭이 아니라, 인류의 기원이 된 동물들이 살던 땅, 이름도 없고 국경도 없어 ‘조국’이란 말이 아무 의미가 없는 지구상의 어떤 땅일 것이다. 그건 우리가 잠깐 거슬러 올라가다 마는 지리적 고향이 아니라,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6000년보다 훨씬 긴 시간, 잘 알지 못하는 5억7000만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도달하는 지질학적 고향이다.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어떤 이름도 붙여지기 이전의 지구다. 지구가 바로 우리의 고향인 것이다. 지구상의 어디든 고향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겨우 100년 정도의 역사만을 갖는 ‘조국’이란 얼마나 초라하고 불완전한 고향인가.

사방세계가 서로를 걱정하고 배려하며 합일된 하이데거 말년의 고향은 어떠한가? 지구를 지키려는 마음을 환기시키는 지질학적 고향이 거기 있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죽은 자들이 신이 되어 인간을 지켜주고 죽을 자인 인간이 하늘과 땅을 보호하며 거주하는 그런 사방세계란 ‘인간의 시간’을 넘지 못한다. 겁(劫)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스케일이 없다면, 고향이란 자신이 기억하는 어떤 시간, 자기와 가족, 이웃들이 땅을 갈고 씨를 뿌려 대지로부터 식물을 키워내던 얼마 안 되는 시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고향이란 자신이 기억하는 ‘장소’를 뜻할 뿐이다. 하이데거가 횔덜린을 빌어 말했던 귀향을 특정 장소가 아니라 어디서나 고향을 만들어야 함을 뜻한다고 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그때 돌아갈 고향이란 하이데거 자신이 좋다고 믿는 어떤 상태를 뜻할 뿐이다. 어느 경우든 이런 고향이란 ‘자신’이 기억하거나 그리워하고, ‘자신’이 좋다고 믿는 형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아상(我相)’의 한 조각은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12호 / 2017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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