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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중생에게 번뇌가 없다면, 부처는 법을 설할 필요가 없다

기자명 정운 스님

이분법적 분별심 내지 않는 게 무심

원문: 배휴가 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황벽이 말했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무심(無心)이 도이다. 다만 마음에 생각으로 있음과 없음, 길고 짧음, 상대와 나, 주관과 객관 등 이분법적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이 (참다운)무심이다. 마음은 본래 부처요, 부처는 이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 마음은 허공과 같다. 왜냐하면 ‘부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다’고 하였다. 달리 (부처를)구할 필요가 없다. 구함이 있으면 고통이 따른다. 설사 억겁이 지나도록 6바라밀과 온갖 만행을 닦아 부처의 보리를 얻는 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연의 조작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연이 다하면 마침내 무상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보신과 화신이 참된 부처가 아니며, 또한 설법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다만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 아상·인상이 없는 것, 그것이 본래 부처이다.

중생이 번뇌 일으켜 아상 내니
번뇌 제거된 자리가 바로 부처
조사·간화선이 최고 선 아니라
공부하는 마음 간절함이 관건

해설: 허공 비유는 이 어록에서 몇 번 언급되어 있다. 마음[法身]을 허공에 비유한 것은 청정한 본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영원히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분별심이 사라진 경지라고도 표현하는데, 허공처럼 걸림 없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인연의 조작에 속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이 이록이 조사선의 돈오돈수 사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뜻한다. 깨달음은 억지로 조장해서 수행하고 증득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인연이 만약 다하면 마침내 무상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유위법이다. 곧 깨달음·열반·해탈이란 영원히 변치 않는 무위법에 속한다. 그런데 인연에 의한 것이라면, 시간이 흐르면 무상하지만 진정한 해탈은 무상이나 무아·고통을 여읜 것이다. 그래서 무상·고·무아의 반대인 상·락·아·정을 열반 4덕이라고 한다. 조계종은 화두를 간(看)하는 간화선이 중심이다. 이는 수행의 방법론이요, 이론적으로는 조사선이다. 바로 이 어록은 조사선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은 중생에게 아상이 없었다면, ‘그대가 바로 부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요,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중생이 번뇌를 일으키고, 아상을 내기 때문에 ‘번뇌가 제거된 그 자리가 바로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금강경’ 14품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곧 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을 여읜즉 ‘제불’이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14품 제목이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이다. 곧 ‘상을 여읜 그 자리가 바로 적멸의 자리’라는 뜻이요, 상을 여읜즉 바로 부처의 경지라는 의미이다.  

이 ‘전심법요’에는 ‘즉심시불’ 문구가 많이 나온다. 즉심시불은 당나라 조사선 시대의 화두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를 화두로 삼아 수행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보다 수행에 적합한 1700공안이 있는데도 간화선 수행자가 점점 줄고 있다. 

혜능 선사가 “불법은 세간에 있으며, 세간을 떠난 진리는 없다”고 했듯이 세간의 말을 빌려서 우리 불법을 배대해 보자. 스포츠를 연구하는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위대한 선수와 일반 선수를 가르는 기준은 신체와 기술적인 능력이 아니라 정신력이다. 과거 일을 잊고, 미래에 일어날 일도 생각하지 않고, 현 순간에 몰입하는 능력이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위대한 선수를 만든다.” 또한 이세돌 바둑기사는 “밥을 먹든 술을 먹든 친구들과 당구를 치건 무슨 일을 하던 간에 항상 내 머리 속에는 바둑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구한말 수월(1855~1928) 스님의 말씀에도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우든지 간에 어쨌든 마음을 모으는 겨.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해야 하는 겨…”라고 하였다. 

이세돌과 스포츠인들의 몰입, 그리고 수월 스님이 말한 삼매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간화선이 발달하여 우리에게 좋은 수행법을 제공하지만, 관건은 우리가 얼마나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다. 실천 없는 불교가 의미 없듯이 실천 없는 선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간화선이 최고의 선이 아니다. 문제는 화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자로서 공부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냐에 달려 있다. 무엇보다 꾸준히 밀고나가는 정진력, 장원심(長遠心)이 절실하다. 이것만이 불교의 살길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12호 / 2017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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