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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상을 놀라게 한 ‘금부처 밀송 사건’의 전말

기자명 이숙희

세간 화제에도 외무부 관련·배후 못 밝혀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백제, 높이 21.1cm. ‘고대불교조각대전’ 출처.

1950년 3월1일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로 금부처 1구가 밀반출될뻔 하였다가 공항 검색대에서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국보급의 불상을 대한민국 외무부 비서실장 이름으로 주일대표부 비서관에게 보내는 봉투 속에 넣어 일본으로 밀반출하고자 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 배후관계가 매우 주목되었다. 

평안도 출신 재일 무역상 박씨
외무부 서류 가장해 인편으로
밀반출 시도하다 세관서 적발
장관 특명 조사에도 흐지부지

부여규암리 금동보살입상으로
알려졌으나, 실제적 주인공은
출토지 미상의 금동보살입상
‘신수200번 금동보살입상’ 명
국립부여박물관서 소장 전시

불상을 밀반출하려던 박모씨는 평안도 출신으로 일본 도쿄(東京)에 살면서 수천만 원의 재산을 가진 무역상이었다. 그는 주일한인 대표로 구성된 시찰단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다. 그때 서부항공주식회사에 시찰단의 비행기 운임을 전부 외상으로 하였는데 그 외상값을 갚기 위해 우리나라에 주재하고 있던 모 외국인에게 2200달러의 미군표를 빌렸다. 문제의 불상 역시 모 외국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 불상을 도쿄에 가져가기 위해 미군표와 함께 포장하여 주일대표부에게 보내는 외무부의 서류로 가장하고 외무부 비서실장의 자동차로 운반한 후 일본으로 가는 인편(人便)에 보내려 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사실, 이 ‘금부처 밀송사건’은 외무부의 명의를 도용한 것으로 국제적으로 우리나라의 체면을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국보급 불상이 일본으로 밀반출되기 직전에 적발된 소위 ‘문화재 밀반출사건’이었다. 그러나 세관에서는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고 불상을 몰수하고 30만원의 벌금을 가함으로써 일단 마무리하려고 했다. 반면 외무부에서는 이 사건과 외무부가 관련이 있는 듯하여 장관 특명으로 불상 밀반출 사건을 조사하는 한편, 외무부 관련설의 사실여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금부처 사건은 한동안 세간에 화제거리만 되었을 뿐, 끝내 박씨와 외무부의 관련성이나 박씨의 배후관계를 밝히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사건의 주범인 박씨는 지난 2월18일에도 같은 수법으로 일본에서 서울로 오는 특별 비행기에 재봉틀 3대와 무거운 트렁크 등을 실어 밀반입하였다. 이때도 주일대표부 명의로 대한민국 외무부 비서실장에게 보내는 관용물처럼 꾸몄는데 이 물건 역시 박씨 집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모든 정황에서 볼 때, 박씨는 고미술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구입하거나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외무부와도 깊게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불상을 감정한 국립박물관 전문가는 “신라 중엽 이후의 금불상으로 제작기법의 기묘함으로 보아 백제 공인의 수법이 여실함을 발견하였으며 소형 입상금불로서는 국보급이라 할 만한 일품이다”고 하였다. 또 “삼국시대 말기의 작품으로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제품으로는 그만큼 큰 것은 드물다. 길이가 약 15cm이고 충분히 국보적 가치가 있다. 박물관에도 그와 비슷한 백제시대의 제품이 국보로 보존되어 있다. 시가는 500만원 정도이고 청동에 도금한 것이다. 입수경로를 잘 몰라 감정이 곤란하다”고 하였다. 당시 신문 지면에 실린 불상은 충청남도 부여 규암리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으로 금불상이 아니라 구리로 만들고 금을 입힌 금동보살상이다(사진 1).

▲ 금동보살입상, 백제, 높이 11.5cm.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부여 규암리 금동보살입상은 1907년 어느 날 농부가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땅속에 묻혀 있던 쇠솥 안에는 높이 21.1cm와 28cm의 금동보살상 2구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이 두 보살상은 일본 헌병대에 압수되어 있다가 1년 후 경매에 나왔는데 이때 니와세 히로아키(庭瀨博幸)라는 일본인이 구입하였다. 니와세는 두상 중 큰 금동보살상 1구를 1922년 당시 대구에서 큰 병원을 하고 있던 일본인 수장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에게 되팔았다. 이 자는 8·15 광복 후 미군정기에 불상을 직접 몸에 품고서 일본 오사카(大阪)로 밀반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판매된 금동보살입상은 한동안 이치다가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 소재지를 전혀 알 수 없다.

니와세가 소장한 나머지 1구의 금동보살입상도 1939년 이후 언제인가 일본인 니와세 노후유키(庭瀨信行)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 후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면서 금동보살입상은 압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신문기사에 실린 ‘금부처 밀송사건’의 주인공이며 현재 국보 제29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제로 밀반출 사건에 연루된 불상은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이 아니라 출토지를 알 수 없는 금동보살입상이었다. 1950년 3월9일자 ‘동아일보’에 사진이 잘못 실린 탓에 국보 제293호 금동관음보살상이 밀반출사건의 주인공으로 줄곧 여겨져 왔던 것이다.

‘금부처 밀송 사건’의 진짜 주인공인 금동보살입상은 1950년 4월13일 서울 세관으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수된 후 ‘신수200번 금동보살입상’이란 이름으로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사진 2). 전반적으로 부식이 많이 진행된 상태여서 얼굴 표정이나 세부표현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불상의 특징을 파악하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높이 약 11.5cm로 크기는 작지만 신체비례가 균형이 잡혔으며 비교적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준다. 머리가 작아지고 신체는 길어졌다. 늘씬한 몸매와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서있는 자태, 어깨에서 발아래까지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자락 등에서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조형감이 나타나 있다. 또한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 보주를 쥐고 왼손으로는 연봉우리를 감아쥐고 있는 모습에서 여유로우면서 여성적인 자태마저 풍긴다. 특히 날씬한 몸매에 몸을 틀고 서있는 자세라든지 보주를 손에 살짝 쥐고 있는 모습에서 7세기 중엽에 조성된 부여 규암면 금동관음보살입상과 상당히 닮은 점이 많다. 더욱이 6세기 후반의 백제 보살상에서 보이는 특징과는 달리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신체에 입체감이 강조되었고 천의도 부드럽게 흘러내렸으며 몸 앞에는 선각으로 간략하게 옷 주름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특징 역시 7세기 삼국시대 보살상에서 주로 볼 수 있으며 중국 수대 보살상과 관련 있는 새로운 요소이다. 대좌는 원형이며 3단으로 구성되었고 선각된 연꽃무늬에서도 둥근 맛이 엿보인다.

신수 200번 금동보살입상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국보적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국보로 지정될 것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이후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가치를 평가받지 못했으며 여태껏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412호 / 2017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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