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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밧디야 스님의 행복

“저는 부처님 가르침을 달게 마시고 있습니다”

▲ 그림=근호

쿠쿠다와타 국의 왕 캅피나는 어느 날 왕비와 관리를 거느리고 왕궁의 정원을 산책하던 중에 부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캅피나 왕은 부처님이 자신이 살아 있는 시기에 탄생하여 생존해 계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는 공원 산책을 중지하고 왕비는 궁에 남겨둔 채 관리 수백 명과 함께 부처님이 계신 곳을 향해 출발했다.

캅피나·밧디야 왕 부처님 설법에
왕 지위 버리고 출가해 행복 얻어
불안·두려움 한 점도 남지 않아
고통 소멸하고 열반 이를 수 있어

그때 부처님께서는 사왓티 성밖에 있는 제타와타 사원에 계셨는데, 마침 시내로 나가시던 길에 왕의 일행과 마주쳤다. 왕은 부처님을 뵙는 순간 크나큰 행복감에 휩싸였고,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설법을 해주셨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설법에 감동한 캅피나 왕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편 왕이 떠난 다음 뒤에 남게 된 이노자 왕비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시녀들을 거느리고 제타와나 사원을 향해 궁을 떠났다.  왕비 일행이 사원에 도착해보니 그녀의 남편은 이미 스님이 되어 움막 하나를 배정받아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캅피나 스님의 얼굴 표정이었다. 그는 왕이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비 일행은 왕을 만나 본 다음 부처님을 뵈었고, 그녀들 또한 부처님으로부터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 그런 끝에 그녀들 또한 캅피나 스님처럼 크나큰 행복을 느낀 끝에 스님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사뢰었고, 부처님께서는 그녀들을 모두 비구니로 출가할 것을 허락하셨다.

캅피나 왕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스님이 된 지 몇 해 뒤의 일이었다. 예전에는 여러 신하들과 어울려 지내던 캅피나 스님이었지만, 그분은 스님이 된 다음부터는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그 곁을 지나면서 보니 캅피나 스님이 외진 곳의 나무 아래에 앉아 “아, 얼마나 행복한가!”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스님은 궁금해서 캅피나 스님에게 무엇이 그렇게 행복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캅피나 스님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꿀처럼 달게 마시고 있습니다.”

현직의 왕으로서 스님이 된 분은 캅피나 말고도 또 한 분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밧디야이다. 밧디야 스님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서 부처님이 이어받게 되어 있었던 왕위를 물려받은 분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뒷날 고국을 방문하셨을 때 밧디야 왕은 부처님을 존경한 나머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년인가 흘렀을 때의 일이다. 밧디야 스님은 숲속에서 혼자 지내며 캅피나 스님처럼 “아, 나는 즐겁다!”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걸 보고 스님네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밧디야 스님은 속가에 있었을 때 왕비들에게 둘러 싸여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즐거움을 누리던 때를 생각하며 즐겁다고 중얼거리고 있으니 이것은 승려답지 못한 행동이다.”

이런 생각으로 몇몇 스님들이 밧디야 스님을 부처님께 고변했고, 그래서 밧디야 스님은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해명해야만 했다. 그때 밧디야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 실제로 저는 속가에서 왕의 신분으로 많은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저는 많은 왕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며,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제가 사는 궁전은 아름답고 튼튼했으며, 수많은 병사들이 저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저는 늘 불안했습니다. 저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었으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은 왜 늙고 병든 다음 죽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는 저의 삶은 실제로는 매우 불행하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뵙게 되어 저는 출가했습니다. 그런 다음 저는 아내도 없고 기름진 음식도 먹지 못하고 화려한 옷을 멀리한 채 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금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삶은 지극히 홀가분하고 개운합니다. 저는 출가한 이래 부처님께 배운 방법에 따라 숲 속 외딴곳에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계율을 잘 지켜 몸을 보호하고, 마음을 잘 안정시켜 편안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 홀로 조용히 앉아 정신을 한 곳에 모읍니다. 그러면 얼마 안 지나 제 마음은 바람 없는 때의 호수처럼 고요해지고, 그 고요함 속에서 잔잔한 행복감이 고입니다. 저는 그렇게 행복함을 느끼며 살아온 지 벌써 여러 해째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에게는 왕이었던 때 느끼던 불안이나 근심이나 두려움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 저의 마음은 지금 한  마리의 암사슴과 같습니다.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을 보면서 저는 죄 없고 순진한 사슴이 꼭 저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나무 밑이나 숲속에 앉아 ‘아, 즐겁다! 참으로 즐겁다!’라고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서 불교처럼 행복에 관심이 많은 종교는 없다. 불교가 이상적인 경지로 여기는 경지, 모든 불교인이 도달하고자 열망하는 경지인 열반은 곧 ‘특별한 행복’인 것이다.

다만, 불교는 행복에 세속적인 행복과 출세간적인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행복은 건강, 명예, 돈 등을 통해 얻는 행복으로서 불교는 이런 행복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행복은 견고하지 않고 무상하다고 불교는 말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행복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한 번 행복했다가 금방 없어지는 행복이 아닌, 한번 얻으면 한결같아 변하지 않는 견고한 행복이 필요한데, 열반이 바로 그것이다.

열반의 본래 의미는 ‘고통의 소멸’인데, 왜 그것을 ‘특별한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고 ‘고통의 소멸’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열반이 행복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미묘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면 여느 사람들은 세속적인 행복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에 열반을 ‘특별한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고 ‘고통의 소멸’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을 ‘특별한 행복’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것을 캅피나 스님과 밧디야 스님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두 분은 왕이라는 지위, 즉 세속적인 행복을 누림에 있어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유리한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었다. 그분들에게 그 경지를  제공해준 것은 불법, 즉 꿀처럼 달디단 부처님의 수행법이었다.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412호 / 2017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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